소치 동계올림픽이 끝났다. 애초에 우려됐던 테러 등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고 러시아는 금메달 13개, 은메달 11개, 동메달 9개를 획득해 종합 1위를 거머쥐었다. 러시아의 1위 획득은 여러 면에서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구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동계올림픽 성적은 계속 하락해 2010년 캐나다 밴쿠버 올림픽에서는 10위권 안에도 들지 못했다. 때문에 러시아인들의 입장에서는 자국에서 개최되는 이번 소치 동계올림픽에 거는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고 할 수 있다.

▲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2014 동계올림픽 폐막식에 참석한 정홍원 국무총리가 24일 오전(한국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국무총리실/연합뉴스)

구 소련 붕괴 이후 사실상 독자적인 리더십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입장에서도 소치 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정국 안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던 모양이다. 50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쏟아부은 정황이 이를 뒷받침한다. 구 소련 붕괴 이후 민족, 종교 등에 의해 여기저기서 분리독립 요구가 터져나오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력한 이데올로기로서 ‘러시아민족주의’를 강력하게 밀어붙여온 푸틴 대통령의 전력을 고려해보면 소치 동계올림픽에서의 성공은 반드시 필요한 일 중 하나였다.

소치 동계올림픽에서의 종합 1위 달성은 냉전 시기 스포츠를 두고도 동서로 나뉘어 북미와 대등하게 겨뤘던 구 소련의 영광을 재현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를 통해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강력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주변 또는 러시아 내 자치국가들에 대한 정치적 압력 행사이다. 소치가 이슬람무장단체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소치 동계올림픽이 가진 정치적 의미를 더욱 강조해주는 요소다.

소치 동계올림픽으로 나름대로의 대성공을 거둔 푸틴 대통령의 리더십은 이제 우크라이나 사태를 목전에 두고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많은 언론들이 대립과 반목으로 황폐화된 우크라이나 상황에 푸틴 대통령의 결단이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뿌리 깊은 우크라이나의 동서대립

사태 해결을 위한 푸틴 대통령의 의중이 중요하다는 점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경험을 돌이켜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우크라이나는 구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 친화적인 동부, 남부와 유럽 등 서방국가에 친화적인 서부로 나뉘어 대립해왔다. 이번 사태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럽연합과의 경제협력 협정을 무력화하고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을 모색하면서 시작됐다. 많은 언론들이 친러시아와 친유럽의 대결에 포인트를 맞추고 있는데, 이것이 대립의 원인이 되는 갈등 축의 전부는 아니다. 두 집단은 사용하는 언어(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도 다르고 좋아하는 종교(가톨릭, 러시아 정교)도 다르며 정치적 지향도 다르다.

우크라이나에서 구 소련 체제는 일종의 ‘앙시앵 레짐’이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 친화적인 지도자들이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서 10년 간 부정부패를 저질러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혐오가 계속해서 증가해왔다. 2004년 ‘오렌지 혁명’은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다. 오렌지 혁명의 구호는 부정선거 규탄과 재선거 실시의 요구 등 민주화와 부정부패에 방점이 찍힌 것이었다. 여기서 구 소련 체제와 여기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동부 출신들 정치인들은 권위주의, 부정부패, 반민주세력의 상징처럼 돼버렸다.

▲ 2004년 오렌지혁명 당시 키예프 광장에 모인 시위대들. (위키백과)

오렌지 혁명의 성공으로 집권한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과 율리아 티모셴코 총리는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에 필요한 여러 개혁초기들을 잘 수행할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한계를 드러냈다. 오렌지 혁명의 동지이기는 하지만 잠재적 경쟁자인 티모셴코의 존재가 유셴코 대통령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 돼버린 것이다. 오렌지 혁명의 주동자들은 이내 분열했고 혁명의 과실은 다시 구 체제의 상징과 같은 인물로 2010년 집권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에게 빼앗기게 됐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정적인 티모셴코 전 총리를 감옥에 가뒀다.

대안의 부재가 만든 2014년 혁명의 양상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가스공급 요금 인상 및 중단 협박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유럽 등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않는 정권이 수립됐을 경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통치를 방해했다. 러시아는 천연가스 등 자원 공급의 비용을 인질처럼 활용했고 서방국가들은 긴축 재정과 화폐의 평가절하 등을 요구했다.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든 우크라이나 민중들의 삶은 시간이 지날수록 피폐해지기만 했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와 2004년 오렌지 혁명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안의 부재가 증명된 이후에 벌어진 이번 사태는 오렌지 혁명의 경우처럼 특정한 정치세력(오렌지 - 티모셴코 전 총리와 유셴코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흐름으로 수렴되지 못하고 있다. 반정부투쟁에 나선 우크라이나 시위대 속에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우익 급진주의, 파시즘과 함께 구 소련의 대립 항으로서의 무조건적인 유럽 낙관주의가 마구 뒤섞여있는 상태다.

▲ 지난 18일 키예프에서 벌어진 '유로마이단'(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지칭) 시위 장면. (위키백과)

따라서 양측의 갈등은 폭력사태가 반복해서 벌어지는 동안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고 서방국가들과 러시아의 사태에 대한 인식도 큰 차이를 나타낼 수밖에 없게 됐다. 미국과 유럽 등 서방국가들은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폭정과 실패를 문제삼지만 러시아는 시위대 내부의 급진적인 극우주의자들이 사태를 폭력적인 방향으로 악화시켰다고 지적한다. 서방국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배욕이 야누코비치 체제의 폭정으로 이어졌다고 공공연히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이번 사태의 원인 자체가 서방국가들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꾸민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둘로 쪼개 각각 유럽연합과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에 두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이런 상황의 배경에서 제기되고 있는 셈이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도주하고 의회권력이 야권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오렌지 혁명의 상징적 인물인 티모셴코 전 총리가 석방되면서 상황은 다시 급변하고 있다. 의회가 5월 25일 조기 대선을 선언하고 티모셴코 전 총리가 출마를 선언하면서 차기 대통령으로의 당선이 가능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누가 선출되는가의 차이가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친유럽성향 인물의 당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러시아와 미국·유럽이 우크라이나의 정치경제적 안정에 합의해야

▲ 율리아 티모셴코 전 우크라이나 총리. (위키백과)
우크라이나의 정치체제는 상시적인 불안정성을 갖는 특성이 있지만 어쨌든 이원집정부제에 가깝다.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면 총리를 누구로 임명하는가, 조각을 어떻게 하는가 문제가 된다. 친유럽성향 일색으로 내각을 도배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친러시아성향의 동부지역은 사실상 중앙정부의 통제에 따르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고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갈등이 한동안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가장 큰 문제는 중앙정부의 통제가 약화될 경우 우크라이나 내의 크림자치공화국의 독립 문제가 다시 뜨거운 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림자치공화국 정부의 입장은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질 경우 러시아 측에 보호를 요청해 독립을 강행하겠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군사적 개입을 단행하는 데 좋은 명분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2008년 그루지야 사태와 같은 비극이 다시 재발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대통령이 누가 선출되든 거국내각 구성과 친러시아성향의 동부권에 대한 일정한 양보는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럴 경우 분노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원하는 정치경제적 안정은 러시아와 서방국가들의 알력다툼 속에 상당 기간 유예될 가능성이 높고, 지금까지 오렌지혁명 관련 3세력(야누코비치, 유셴코, 티모셴코) 중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휘둘러 본 일이 없는 티모셴코 블럭마저 우크라이나 상황의 통제에 실패할 경우 결국 파국은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일한 길은 유럽, 미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정치경제적 안정과 지원에 합의하는 것이다. 마침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는 시리아 사태와 이란 핵 문제 해결이라는 카드가 남아있다. 하지만 러시아 측은 시위에 나선 야권 지도자들을 ‘폭도’로 규정하며 정국 정상화를 주장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결단’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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