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1일 한국은행 총재 임기가 만료되는 상황을 앞두고 차기 총재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20일 박원석 정의당 의원 주최로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누가 한국은행 총재가 되어야 하는가’ 제하의 토론회에서는 변화된 글로벌 경제 상황에서 물가안정목표제를 대체할 새로운 통화정책 패러다임과 금융감독 관련 역할 배분 등의 논의에서 슬기롭게 처신할 총재의 자격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이 날 발제에 나선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은행 신임 총재의 가장 큰 덕목으로 ‘신뢰’를 꼽았다. 전성인 교수는 “새로운 한국은행 총재는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유연한 사고와 현실적인 정책대응을 추진할 수 있는 인물이 바람직하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뢰”라면서 “화폐수량설, 물가안정, 준칙주의 등 도그마에 포로가 되지 않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성인 교수는 1997년 이후 한국은행의 정책적 과제에 있어 독립성 유지와 물가안정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여기에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게 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에서 미 연준, 일본은행 등이 보다 적극적인 통화완화 조치를 취해 이러한 필요성을 제시하였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 역시 누적된 가계부채와 점증하는 재정적자의 위험성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적극적인 중앙은행의 역할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전성인 교수는 노령화의 진전에 따른 디플레이션 심화 가능성 역시 한국은행이 물가안정에만 치중할 수 없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전성인 교수는 물가안정목표제와 같은 준칙주의가 아니라 ‘신뢰에 기반한 재량’을 근거로 정책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견해를 내놨다. 그러자면 한국은행 총재로 신뢰가능한 인사가 선임되어야 한다는 게 전성인 교수 주장의 핵심이다.

▲ 한국은행본관건물 (연합뉴스)

이후 토론에 나선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도 “물가안정이란 정책목표는 결국 1970년대의 유산일 뿐”이라면서 경상수지 적자, 부동산 버블, 가계대출 버블 등의 리스크에 중앙은행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종규 연구원은 “한국은행은 인플레이션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미래의 우리 경제에 엄청나게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인 의사표시, 정책조정 등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면서 “경제의 앞날을 내다보고 통화신용정책의 몇 년 뒤를 헤아릴 수 있는 실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토론자로 참가한 김대식 한중금융경제연구원장은 중앙은행의 변화된 역할과 위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물가안정목표제의 폐지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피력했다. 김대식 원장은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물가안정이 경제안정의 충분조건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었다”면서도 “이 때문에 물가안정목표제를 폐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김대식 원장은 한국경제에 저성장 및 디플레이션 위험이 제기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플레이션 우려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물가안정목표제를 폐지하는 것보다 개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물가안정이란 인플레이션을 대비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에 대한 대응도 포괄하는 의미라는 해석이다.

김대식 원장은 “경제주체들의 기대를 정책당국이 의도한 대로 형성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경제주체들이 통화정책의 정책결정체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면서 “기계적인 공식을 따르자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준칙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대식 원장은 이러한 준칙은 정치적 외압 가능성이 높은 거시건전성정책 운용에서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또 다른 토론자로 나선 원종현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중앙은행이 직접적으로 금융안정을 위한 독자적인 조치를 취하기에는 많은 난관이 있다”면서 최근 제기되는 중앙은행의 위상과 역할 변화에 대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원종현 조사관은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금융안정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경우 물가안정이 필요한 시기에는 오히려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했다. 원종현 조사관은 ‘아베노믹스’를 예로 들며 “정부의 재정정책과 독립적인 통화정책 기능이 약화된 상황에서 과연 엔화의 안정, 일본 경제의 안정이 어떻게 이루어질게 될지 궁금하다”고 발언했다. 최근 일본 성장률이 2013년 4분기 기준 전분기 대비 0.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부양책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후 일본은행이 취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불분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토론자로 나선 윤석헌 숭실대학교 금융학부 교수는 글로벌 경제 상황의 변화와 한국은행의 금융기관에 대한 자료 제출권 요구권 확립 등으로 중앙은행의 역할에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여기에 덧붙여 금융감독유관기관과의 협력관계 강화 등 거시건전성 감독 및 정책 주체가 명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윤석헌 교수는 관료나 정치인 출신 등은 한국은행 총재 논의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석헌 교수는 한국은행의 적극적 역할 수행에서 새로운 정책수단의 개발 노력 등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윤석헌 교수는 “신용정책수단으로서 금융중개지원대출제도 운영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윤석헌 교수는 “금감원은 상호연계성을 책임지고 한국은행은 경기순응성을 책임지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면서 “위기시는 정부가 (금융감독을) 주도한다는 데 합의는 용이하지만 정상시의 운영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 대안 마련과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윤석헌 교수는 미국과 영국 등에서 금융감독체계 개편을 통해 중앙은행의 거시건전성 감독 기능을 확충하고 금융소비자보호 강화를 도모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한국은행이 그간의 모습처럼 ‘진공’ 속에서 존재하는 듯 처신할 게 아니라 문제해결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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