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을 주제로 한 독서회

“기본소득 독서회는 아주 간단한 고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땡땡책협동조합의 정관 목적에 “건강한 노동으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무엇으로 우리의 노동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노동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런 고민으로 독서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의가 단지 얼마를 소득으로 받을 것인가, 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이런 논의가 분배나 복지의 재구성이 아니라 삶의 재구성과 맞물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본소득을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우리 삶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을 줄 여러 책들을 함께 읽으려 합니다. 더 구체적인 부분은 독서회를 진행하면서 더욱더 풍부해지리라 생각해요. 굴욕을 경험하지 않는 일과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누구나 살고 싶은 삶이 아닐까요?“(하승우) [1]

야밤 12시 하고도 23분. 땡땡이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달이 밝다. 간만에 보는 달이라 더 밝은 거 같기도 하다. 근래 새로 깐 아스팔트가 무심한 학교담장 길의 한적한 분위기를 더 한다. 십년을 같이 한 중고 마티즈를 주차해놓곤 했던 곳인데 남고생의 우람한 담타기에 징검다리가 되기도 했던 나의 애마는 기어코 주인의 무심함에 못 이겨 부산에서 올라온 낯선 이에게 심청이처럼 팔려갔다.

오늘은 기본소득이란 주제로 『래디컬 데모크라시』라는 두 번째 글을 끝장까지 읽었다. 제목도 몽땅 영어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한 내용이라니 시큰둥했던 것도 사실이다. 녹색평론의 「기본소득 논의 좌담」을 여는 문으로 하여 기본소득에 대한 기초적인 담론을 『분배의 재구성』에서 알아봤고, 『래디컬 데모크라시』는 세 번에 나눠 읽었다. 이 글은 생각보다 이해하기 쉬운 표현과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민주주의, 발전, 빈곤 기계 등의 개념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하는 데 좀 더 훌륭하다. 또 사적인 감성과 행위로 굳어진 신뢰, 행복, 희망이란 것들에 대한 공적인 것으로의 보다 폭 넓은 해석은 왜 우리가 독서라는 개인적 행위를 함께 여럿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설득도 내장하고 있다. 이런 공감대에, 글의 내용을 우리말로 잘 풀어낸 땡땡이 H를 비롯한 두 역자들의 품까지 더한다면 아직까지 출간되지 않고 있는 아쉬움은 커진다.

주제가 있는 독서모임이라 심도 있는 나눔이 있을 거 같지만 사실 그 깊이는 엉뚱한 데 가 있다(다음 읽을 책이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이란 긴 이름을 가진 600쪽 두께의 책이긴 하다). “이번 읽기가 대체 기본소득과 어떻게 연결된 거지?” 이런 질문을 한 땡땡이 K에게 아무렇지 않게 “그러게” 하는 땡땡이 K2, 모임자료와 기억을 더듬어 연결시켜주는 땡땡이 J, 그러다 땡땡이 G의 노동과 생기 있는 삶에 대한 고민에, 땡땡이 S가 참여하는 다른 독서모임에 대한 궁금증으로 옮아가다, 또 다른 땡땡이의 이사 이야기 같은 일상들에 더 궁금해 하고 그것들에 대한 ‘수다’로 대부분을 채운다.

노동에 대한 질문

기본소득 독서회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땡땡이들을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지만 더불어 노동에 대한 흩어져 있는 생각들을 정리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내가 원하는 노동과 사회가 요구하는 것의 괴리는 개인의 무능력으로 전이되곤 하는데 그것에 대한 당혹감을 나눌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누군가에게 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 무엇인가에 질문 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 돼버렸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모임에서 나눠지는 땡땡이들과의 독서를 통한 교감은 반가움과 위로가 된다.

불안정한 무산계급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는 나는 현재 구직자다. 그 전에는 사회복지사란 직업으로 십 여 년을 먹고 살았지만 다시 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 되묻고는 한다. 현실 회피가 아니라 현실적 탐색인데 일에 대한 나의 태도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직장이 비슷한 여건이겠지만 복지가 있는 복지현장도, 희생과 봉사를 강제로 요구받지 않는 사회복지사도,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희생과 봉사를 생산하는 기계는 되고 싶지 않다는 나의 바람은 공허한 이상주의자의 목소리로 사라지곤 한다.

“아이고 누가 너를 뽑아주긴 한데?”, “왜 너만 유별나니 남들은 다 참는데”, “아직 배가 부르구나” “꼬면 너도 만들어 아님 이민을 가든가” 이런 소릴 듣는 것은 흔하다.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 말인지도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만이 하는 말은 아니다. 정작 동료나 가족에게서조차 들을 때도 있다. 이 말들은 결코 갑의 것이지 을의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왕이면 “맘에 안 들면 너도 뭉치면 될 거 아냐” 이런 말이 나올 법도 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을이고 노동자인데.

이런 고민의 골을 채우기도 전에 ‘왜 (노동)일하는 사람만이 생존, 생활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란 질문이 목젖에 걸려 있다. 정작 생활이 먼저 보장되어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일이 무엇이냐는 그 후의 살아 있는 자의 질문이어야 하지 않나? 일과 가치에 대한 기준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정해졌는가, 정말 그것은 정당한가? 질문이 꼬리를 문다. 기계의 부품 같은 역할만이 삶의 방법은 아닐 것인데 우린 그 역할에 너무나 충실하게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왜 그 익숙함만큼 안녕하지 못한 것일까?

그래서 너는? 나 역시 노동은 ‘내가 가치라 여기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빈 통장 앞에 장사 없다는 명언(?)처럼 충혈 된 눈으로 모니터의 구인란을 클릭하고 있다. 그렇게 되돌아오는 질문들에 자기기만과 타협을 알게 모르게 섞어가며 현실과 현실 너머의 사이를 떠돌고 있다.

불안으로부터의 노동, 안전으로부터의 노동

그래도 여전히 난 내가 사는 곳에서 사람들과 같이 잘 살고 싶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것이 나의 일, 나의 노동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질문이 많은 백수는 선택할 여지가 많지 않다. 자본주의 땅에서 대부분의 일은 화폐의 조직체와 구조가 사람보다 우선되기 때문이다. 그 삶은 피폐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생활을 위한 일의 선택은 나의 기쁨이나 안전, 존엄을 담보로 한다. 생활을 위한 비(非)생활이다. 살아 있기 위한 살아있지 않음이다. 오늘도 인간의 존엄이냐 아니면 생존을 위한 비(非)생존이냐의 갈림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하게 서 있거나 실제로 죽어간다. 삼성의 ‘또 하나의 가족’처럼. 불안으로부터의 노동이다.

하지만 생활은 기본적인 권리다. 어미가 새끼를 키우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듯이 공동체가 그 구성원의 생활을 지키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기본소득제는 그런 기본권을 지키는 하나의 방법이다. 생존, 생활이 보장된 조건은 어떤 삶이나 일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주체로부터의 자율적으로 선택된 노동은 보다 더 능동적이며 질 높은 생산성을 발휘할 것이고 양질의 노동은 보다 더 적합한 협상력을 가질 것이다. 이는 경제적인 면뿐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 영향을 끼칠 텐데 단적인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자. 기형적인 빚쟁이 학생들이 덜 할 것이며, 생활고로 아이를 버리거나 버려지는 비극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노인들은 자식들의 눈치를 덜 봐도 되며, 실업자들은 고용자들에게 덜 굽실거려도 되고, 고용자는 필요한 노동자를 얻는데 비용이 덜 들 것이며, 돈이나 경쟁이 전부가 아닌 기준들이 더 많아 질 수 있다. 생활이 보장된 노동은 보다 더 자유롭다. 안전으로부터의 노동이다.

불안으로부터의 노동과 안전으로부터의 노동은 참 많은 것들이 다르다. 그래서 사회제도는 불안이 아니라 자유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현 체제가 불안으로부터 노동의 동기를 부여한다면 기본소득제는 안전으로부터 노동의 동기를 부여한다. 그래서 인간적인 삶, 그것의 바탕이 되는 기본적인 소득을 공동체가 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사회가 기계나 괴물이 아닌, 적어도 인간의 공동체라면 말이다.

기본소득이 내게 주는 가능성들 _ 삶의 재구성, 사회의 재구성

상상만 해도 입 꼬리가 올라간다. 만약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당장 굶어 죽을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집세의 무게를 덜 수도 있겠고 장바구니에 과일과 생선을 담을 수도 있겠지. 혹은 고장 난 히터를 바꿀 수도 있겠지.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에 가까운 방향의 일을 고민하고 찾을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벌수도 있겠지. 그리하여 보다 건강한 노동을 하게 된다면 이유 없이 아프지도 않겠지. 먼 곳의 친구들도 한 번은 더 만나러 갈 수 있겠지. 배우고 싶은 것을 서슴없이 배울 수도 있겠지. 사랑하는 이의 특별한 날에 어울리는 선물을 줄 수도 있겠지. 이런 것들은 누군가에게는 저절로 주어진 것들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갖지 못하는 일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인간의 존엄은 이런 일상 자체이기도 하다.

일개미 옆에서 노래하는 베짱이 심보가 아니냐고? 누구는 일만 하고 싶겠냐고. 쉬고도 싶고 연극도 보러가고 싶고 여행도 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삶의 팍팍함을 다 감내하고 있다고. 혹은 모두가 놀기만 하면 나라가 망하지 않겠느냐. 그럼 기본소득이란 돈은 어찌 만들어지겠느냐 등. 그런데 같은 것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보자면, 사람들에겐 자신이 하고픈 것들이 있다. 물론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일에서 자존감이나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 그 일이 남들이 보기에 하잘 것 없어 보여도 말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기본소득을 받아도 일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나’는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을 것 같다”라는 응답이다. 과연 당신은 ‘나’에 속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 속하는가? 적어도 그동안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생활이 보장되는 조건에서 시작되는 선택지를 가진 노동은 사회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바꾸게 할 것이다. 굴욕적인 노동, 열악한 대우의 일터들이 줄어들게 될 것이고 불합리한 권위주의나 비인격적인 시스템 등 자본주의의 악순환들을 재생산하게 되는 상황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인간적인 일상을 주기도 하고 좀 더 평등한 사회를 꿈 꿀 수 있게도 한다. 이렇게 기본소득은 삶을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렇다고 기본소득만으로 현 체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변화를 위한 기재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땡땡이들과 기본소득을 공부한다. 책을 읽고 영화를[2] 보고, 또 다른 땡땡이들을 만나면서.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방법들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수다를 떤다.

한적한 외길도 달빛으로 녹일 수 있는 용기

내가 그리는 삶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삶터가 누군가의 욕심으로 위협받지 않을 만큼만 평화로웠으면 좋겠고, 기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목적지까지 잘 태워다 주는 것이 즐겁고, 글을 쓰고 내는 사람은 그것으로 기쁨이 되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고, 도움을 주는 것이 즐거운 사람은 강제로 요구받지 않는 희생과 봉사가 일어나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이게 추상적인 상상이나 비현실적인 몽상으로 여겨진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바로 내 얘기이기도 하고 내 이웃들의 현실적 삶에 관한 것인데 말이다.

단지 우리는 이 자연스러움을 얻기 위해 광장에서 외치고 일터에서 투쟁을 하고 그 사이사이 서로에 기대여 기본소득을, 인간의 존엄을 술에 취한 듯, 꿈을 꾸듯 이야기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가 꾸는 꿈은 그것 자체가 희망이고 현실이라고 하지 않는가. 너도 나도 같이 꾸자! 꾼다고 손해 볼 건 없다.

아픔을 공유하는 것이 연대라면, 그곳을 진지라 일컫는다면, 땡땡이들이 있어 참 다행이다. 닮아 가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풍요로운 감성과 안도를 준다. 감성은 인간적 삶에 대한 인식과 그것에 대한 민감한 감각 같은 것일 게다. 땡땡이들은 나에게 야밤의 한적한 외길도 달빛으로 녹일 수 있는 그런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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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서회는 누구나 주제를 제안할 수 있고 만들 수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_ 땡땡책협동조합 카페(http://cafe.daum.net/00bookcoop?t__nil_cafemy=item)에서 가져왔습니다.

[2] [기본소득: 문화적 충동 Grundeinkommen: ein Kulturimpuls (2008, 45분)] 스위스의 기업가 다니엘 해니와 독일의 예술가 에노 슈미트는 2006년 스위스 기본소득 이니셔티브를 창립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제작한 영화로, 기본소득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널리 권유되며 50만 명(2011년 기준)이 넘게 시청한 작품입니다. 창공을 나는 새의 이미지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돈을 주어도 괜찮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부터, '일'의 의미가 변화한 현대사회에서 기본소득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 전면적인 기본소득 도입 이전에 시도해 볼 수 있는 정책들까지 기본소득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들을 어렵지 않게 전합니다. [기본소득: 문화적 충동]은 구체적이고 명료한 해결안까지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없는 불안 속에 움츠러든 우리의 상상력이 더 나은 삶을 향해 기지개를 켜도록 도울 것입니다. (유투브나 관련홈피들에서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 많이 공유해주세요)
_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https://sites.google.com/site/basicincomey/act/film/screening_manual)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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