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여러 가지로 차별이 많은 나라이지만, ‘나는 차별을 한다’거나 ‘나는 차별에 찬성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차별의 피해자라는 호소도 많지만, 그것이 꼭 모두 차별의 피해가 맞는지 들여다보면 또 아리송하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람들은 차별이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 ‘그 특정 기준이 누군가에겐 차별이 되지 않을지, 형평성을 고려했을 때 적절한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그건 차별이 아닐까’라는 말은 ‘너는 나쁜 놈이 아니냐’는 공격적 의미만 부각된다. 그래서 듣는 쪽도 발끈하며 일단 차별이 아니라고 답하기 마련이다.

이런 인식 하에서 내가 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구분이어야만 한다. 차별이라고 인정하면 그것은 ‘나는 나쁜 놈이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 도덕성만의 문제라면 차라리 쉽겠는데, 이익의 문제까지 긴밀하게 얽혀 있다. 내가 이익을 얻는다면 그 기준은 정당하며, 내가 손해를 본다면 그것은 차별이 되는 것이다. 차별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내가 이익을 덜 보거나 손해를 보도록 바뀌면 이것은 이제 역차별이라는 다른 차별이 된다. 기준의 정당성이나 형평성, 상대방이 겪는 피해, 공동체 전체에 끼칠 영향이나 장기적 관점에 대한 고려는 없다.
‘내가 나쁜 놈이라 이거냐’는 도덕적 비난에 대한 심정적 반발도 한몫 할 테지만, 현실적 이익이 걸려 있는 이상 이것은 이성적으로 반성하고 검토해볼 중립적인 대상이 되기 어렵다. 차별일지도 모른다는 반성은 ‘내가 얻을 이익이 사라지거나, 내가 손해를 봐야 될지도 모른다’는 의미인데, 먹고 살기 여유롭다면 그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먹고 살기 어렵다면 이런 생각 자체가 위협이다. 이러니 ‘그것은 차별이 아닌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이성적 토론이 아니라 현실의 실존을 공격한다. 납득하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반격하고 방어해야 할 영역이다.
왜 차별이 보편적 형평성과 연결되지 않고 이익과 이렇게 밀접하게 연결되었을까. 그것이야말로 사회가 실제로 작동하는 원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형평성은 아무 곳에서도 효력이 없고, 결과적 차이에 의해 손익이 민감하게 결정되는 마당에 여기에 초연하고 이것을 초월해 사고할 수는 없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공부하고 스펙 쌓느라 돈이며 시간이며 에너지를 아주 많이 쏟아 붓고, 인간적인 욕망을 억눌러가며 경쟁에 시달리면서도 보장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지금의 20대들은 자신이 가진 작은 경쟁우위에 집착하지 않기가 힘들다.
소위 인서울 명문대에 온 학생들은 그 경쟁의 틀 속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다 하고 그 위치에 도달했으니, 이 노력을 수포로 돌리는 답을 요구하는 질문 앞에서 과연 평정심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을까? 네가 그 고생을 하고 도달한 지금의 위치가, 네 다음 서열 대학의 학생들이나 배치표상 저 아래에 있는 대학생보다 네가 우월함을 뜻할 수는 없지 않냐고 물으면, 제일 처음 떠오르는 감정은 억울함일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도 아니고, 실존에 기반한 감정을 이성만으로 거스르기를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런 기대는 실존이 좀 더 살만한 상태일 때에나 적절할 것이다. (실존이 안정돼 있어도 자신이 받아들였던 프레임을 180도 전환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호, 개마고원)라는 제목은 도발적이다. ‘괴물이 된 20대의 자화상’이라는 부제목은 더더욱 도발적이다. 이것만 두고 보면 마치 20대가 정당화 없이 대놓고 차별을 긍정하면서 찬성한다고 나오는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주문하면서 혹시 그런가 예상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세대나 별다를 것 없지 않은가. 차별에 찬성하면서 그것이 차별이 아니라고 정당화하는 것은 모든 세대가 언제나 해왔고 하고 있는 행동이다. 읽어보니 저 도발적인 제목은 저자가 ‘다른 세대는 안 그러더라도 20대는 마땅히 차별에 반대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더라’는 사실을 알고 받은 충격을 의미할 뿐이었다.
저자가 그런 기대를 가지는 이유도 이해할만 하다. 경제학자가 경제적 이익에 대해 주목하는 것이 당연하듯, 사회학자는 사회적 진보에 대해 주목하기 마련이고, 한국 근현대의 사회적 진보는 소위 대학생들에게 큰 빚을 졌다. 다른 세대에게 딱히 그 역할을 새삼 기대할 수도 없고, 여전히 진보에 대해서만큼은 다들 대학생들에게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대학생의 사회적 지위가 ‘튼튼한 사회경제적 지위가 보장되어 있는, 세대 내에서도 소수인 기득권 예비 그룹’에서 ‘보장된 것 없이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그 세대 대다수’로 바뀐 이상 그 기대 자체가 헛되다. 이 헛된 기대가 무참하게(?) 꺾이자 20대들이 차별에 찬성하는 괴물이라고 느낀 것이다. 저자만의 문제은 아닐 것이다. 대학생들은 열악해진 현실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가장 깨어있는 그룹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미 몇 년째 비난받고 있다.
책은 꽤나 재미있어서 빠르게 읽을 수 있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며 ‘그것은 차별이 아니냐’고 끈질기게 묻는 저자와, 그것이 차별이 아니고 정당한 구분이며 우리와 그들은 다른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대학생들 사이의 실랑이가 씁쓸하면서도 흥미진진하다. 저자의 질문이 이상적이다보니, 상대적으로 거기 대응하는 대학생들은 지나치게 현실의 대변자가 된다. 근거가 될 만한 논리는 없는데 저자의 질문이 부적절하다는 직관은 있다 보니 수긍할 수는 없고, 결과적으로 말도 안 되는 찌질한 것들을 근거라고 주워다 붙이면서 오히려 자신의 입지를 약화시키기도 한다. 온갖 이유를 붙여가며 학교와 학과의 서열을 강화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 치사한 화법을 쓰고, 사회 전체의 형평성을 위해 도입된 제도로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멸시적인 별명을 붙인다. 이 양상 자체는 상당히 놀라웠다.
나는 저자와 비슷한 연배로, 운동권 문화의 끝물을 조금 경험했다. 비록 무너져가는 중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학생은 진보의 아이콘이었던 시대였고, 그렇다보니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실감난다. 지금 대학생들이 이렇단 말인가? 짐작은 하지만, 이렇게까지 심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 사례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부정적인 모습을 모르는 채로 20대를 평가하기보다는 아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막연한 기대를 줄이고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도덕적으로 눈살 찌푸려지는 광경들도 많지만, 인간이 한두 세대만에 유전적으로 변화가 생기거나 진화를 하지는 않는다는 걸 감안하면, 이것은 명백히 ‘사람을 저렇게 만드는 환경의 변화’에 주목할 일이다. 저자도 강조하지만, 그들 개개인이 성격이 나쁜 것도 아니고, 도덕성이 마비된 것도 아니고, 나름 총명한 부분도 많고, 인지상정이라 할 만한 정서들도 살아 있다. 그들을 두고 개탄할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어떤 압박이 이 세대를 지배하기에 사람이 이렇게 작은 이익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게 되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들이 지난 시대의 대학생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처지에 놓였음을 알면서도, 그들이 이렇게 철저히 자발적으로 서열을 내면화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유를 자기계발서에서 찾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계발서로 대표되는 ‘자기책임 강조’가 문제라고 여긴다. 사회적 문제로 대다수가 낙오할 수밖에 없는데, 자기계발서식 논리에서는 이것을 개인이 덜 노력한 탓으로 돌리고, 따라서 개인이 자신을 계발(사실은 취업을 위한 개발)하는 것이 해법이라 한다. 그렇게 자기계발로 성공한 소수의 케이스는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개인의 실패는 그저 자기실패이며 개인의 돌파구는 자기계발이 되는 논리, 거친 요약이라 정밀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이것이 대학생들을 스펙에 몰두하고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며 아래쪽 남에게 선을 긋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생들이 모두 깨달음을 얻어 자기계발서를 다 불태우더라도, 혹은 인문고전을 읽으며 더 깊은 학문에 매진하더라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이 차별에 찬성하는 것은 자기계발서나 자기책임으로 돌리는 풍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논리가 대학생들을 꾀어 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대책을 떠올릴 수 없는 실존의 문제가 더 근본적이다. 자기계발서들이 그런 실존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런 실존이 있기 때문에 자기계발서식 논리가 팔리는 것이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온갖 투자를 해 힘겹게 얻은 수능배치표상의 지위가, 비록 사회 전체의 시선에서 보면 한없이 작고 의미없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유일한 획득물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움켜쥐고 방어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투자한 만큼 대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 희망할 수도 없다. 개인이 모여 여럿이 힘을 합쳐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해 시위를 하는 것은, 그 개인에게 다시 한 번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다.
지난 시절 대학생들이 자신을 희생하며 사회적 진보의 발판이 될 시위와 운동을 한 것은, 우리가 그 세대에게 빚을 진 일이다. 그나마 그들은 대학생이란 것만으로 보장된 것이 있는 세대였고 경제는 호황이었으며 IMF도 오기 전이었다. 지금 대학생에게 사회를 바꿀 생각을 하라는 것은 이미 많은 것을 희생하고 시달려오고 얻을 것도 없는 세대에게 다시 한 번 사회를 위해 희생하라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10대들을 주로 대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 책에 나오는 찌질할 정도로 스펙에 집착하는 20대들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이들은 내가 몇 년 전에 가르쳤던 10대들인 것이다. 지금 가르치는 10대들이 또 몇 년 뒤엔 20대이자 대학생이 될 것이다. 이들의 실존은 날이 갈수록 위태롭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다양한 감정과 자유와 감각의 경험이 속박되고, 학업이 우수하지 않은 다수는 온갖 비난과 질책과 모진 시선을 받고 있으며, 학업이 우수한 다수는 그 장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더욱 공부에만 매진하느라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욕구라 할 수 있는, 하루 8시간 열심히 일했을 때 3인 가족이 평범하게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이 지금 한국 사회에선 마련되지 않는다는 걸 다들 알 것이다. 이것이 마련되고 나서도 조금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치며 남을 밀어 내린다면 그것은 이기적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조차 불투명해 포기해야 되는 세대에게, 논리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근시안적으로 자기 지위에나 연연한다고 괴물이라고 부르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이들을 위해 해야 하는 건 자기계발서를 믿지 말라는 비판이 아니라, 그렇게 악착같이 투자하고 살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하나라도 더 만드는 일이다. 그것마저 그 세대더러 시위해서 얻으라고 하지 말고, 저렇게 살지 않아도 되었던 어른 세대가 할 수는 없을까? 왜 진보는 언제나 20대들에게 떠맡기고, 새 희망은 언제나 10대들에게서 찾으려 드는가. 내 세대까지는 그래도 초중등학교 때 학교 마치면 신나게 뛰어 놀 수 있었다. 뛰어 노는 어린 시절을 가진 세대가 차라리 지금 어린 세대를 위해 뭔가 희생하고 사회를 바꿀 길이 없는지 찾는 게 덜 미안할 것 같다.

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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