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강신주 씨(이하 강신주)는 문화권력이다. 그의 강연은 늘 사람들도 북적이고, 그의 신간은 매체 지면의 목 좋은 곳을 오르내린다. 그는 얼마전 SBS 힐링캠프에서 공개강연을 진행해 화제가 됐다. 인문학적 깊이를 갖춘 강연자이자 상담자로서의 진면목이 드러났다는 칭찬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강신주의 글을 좋아했고 2000년대 중반 무렵엔 여기저기 읽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강연에 매진하던 무렵부터는 이런 저런 이유에서 그의 글과 멀어졌다. 하루에 평균 2회 이상의 강연을 수년간이나 꾸준히 해왔다니, 일단 그의 체력에 먼저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 글은 강신주 개인을 비판하는 글이라기보다는 '강신주 현상'을 읽는 하나의 관점으로 읽혔으면 한다. 그를 두고 '인문학 팔아먹는 장사치'나 '사기꾼'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다. 하지만 최근의 행보들, 그리고 몇몇 글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강신주라는 아이콘을 통해 우리의 오늘을 한번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모든 나쁜 것으로서 '자본주의'
<유한계급론>('한가한 무리들'이라 번역되기도 한다)에서 베블런은 상류계급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에 돈과 시간을 과시적으로 낭비하는지에 대해 거의 가학적인 집요함으로 해부한다. 이 책이 고전으로 이름 날리고 있는 이유는 단지 부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기행을 까발렸기 때문이 아니다. 부자가 부자인 이유는 그들이 금욕적이고 절제할 줄 알기 때문이며 가난한 자가 가난한 이유는 눈앞의 쾌락 앞에서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당시의 지배적인 학설을 산산조각냈기 때문이다.
베블런이 20세기 후반까지 살아있었다면 19세기 부르주아 계급만큼이나 여가를 확보한 지난 세기 중산층, 중간계급의 소비문화도 그의 수술대에 올랐을지 모른다. 베블런은 20세기 초에 죽었지만 그의 후예들은 좀 엉뚱한 분야에서 튀어나왔다. 미국 중산층을 대형 쇼핑몰에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영혼 없는 좀비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예술가들, 그들이 바로 '베블런의 적자'였다.
19세기의 부르주아들, 20세기 후반의 미국 중산층은 탁월한 학자나 예술가에 의해 설명되어야하는 대상으로 존재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깨닫지 못하는 체제의 향유자들이었고, 그래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은 어떨까. 월스트리트를 점거하고, 광장에서 촛불을 드는 중산층들은 과시적 소비자나 영혼 없는 좀비와는 좀 달라 보인다.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에 몸서리치고, 지구온난화를 진심으로 우려하며, 유기농 농산물을 공동구매하거나 아예 도시를 떠나 귀농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강신주 현상을 만들어낸 건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일부다. 강신주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가? 재래시장을 살리고 싶은가? 생태문제를 해결하고 싶은가? 가족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싱싱한 식품을 원하는가? 그럼 냉장고를 없애라! 당장 냉장고가 없다고 해보자. 우리 삶은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직접 재래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식품을 사야 한다. 첨가제도 없고, 진공포장 용기에 담겨 있지 않다. 식품을 사가지고 오자마자, 우리는 가급적 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중략)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 그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절망한다. 자본주의는 너무나 거대한 체제이기에, 우리가 길들이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 아닐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냉장고를 없애라! 한 번에 없앨 자신이 없다면, 냉장고의 용량이라도 줄여라! 가족 건강 문제, 생태 문제, 이웃 공동체 문제, 재래시장 문제가 그만큼 해결될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 “여자가 여자에게 추천하는 속이 넓은 냉장고”의 유혹, “살고 먹고 사랑하는 데 필수적인 냉장고”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냉장고의 폐기, 혹은 냉장고 용량 축소! 여기가 바로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는가!

강신주,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경향신문> 2013.7.21
냉동기술의 발명이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아와 질병에서 구해냈는지에 대한 인식은 강신주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냉장고 없이 신선하고 질 좋은 식자재를 그때그때 구해 먹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노동인지, 혹은 특권인지에 대한 고려도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얼마나 남들과 다른 방식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느냐이다. 강신주는 글이나 강연에서 자본주의의 폭력이 얼마나 인간성을 황폐하게 하는지를 늘 강조한다. 거의 부흥회를 연상시키는 열광적인 분위기의 어느 강연에서는 지폐를 공중에 뿌리는 퍼포먼스도 나왔다고 한다.
▲ SBS '힐링캠프' 방송 화면 캡쳐 사진
강신주에게 자본주의는 역사적 산물이자 사회적 관계로서 생산과 축적 양식, 착취와 억압의 메커니즘이 아니다. 그에게 자본주의란 인간을 소외시키는 지폐, 공동체를 파괴하는 냉장고, 서울역 앞의 노숙자 등의 '물화'된 사물이다. 그리고 때로 자본주의는 '기술문명'이 되기도 하고, '신자유주의'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물질만능주의'나 '관료주의'가 되기도 한다. 요컨대 강신주가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의 그 자본주의란 우리를 둘러싼 '일상적이고 총체적인 악/고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반자본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 모색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자기소외적인 현대사회의 상투성으로부터의 개인적 해방'이란 의미에 더 가깝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런 불분명하고 미분화된 인식은 구조적 모순에 대한 집단적 해결이 아니라 개인적 적응전략 또는 자족적 저항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강신주가 상담자에게 내놓는 답변 하나하나가 그 증거다.
자본주의 vs. 강한 자아
2012년에 강신주는 수치와 치욕에 대해 쓴 글에서 서울역 앞 노숙자를 "한 마디로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마비되어 있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마비’가 편한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깨울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순간 노숙자는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 칼럼을 비판했다. 노숙자가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인식 없이 노숙자들을 수치도 모르는 인간으로 비하하고 있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이런 비난을 받은 근본적인 이유는 글을 못 썼기 때문이다. 논점이 제대로 살아있지 못하고 중언부언하는 글이어서 노숙자를 비난하는 글로 읽힌 측면이 있다. 그러나 강신주의 진의는 그런 게 아니었을 게다. 그 정도 지식인이 노숙자 문제를 순전히 개인 책임으로 인식할 리가 있을까? 날마다 자본주의의 병폐를 이야기하는 그가? 사실 그는 노숙자 문제에 대해 여러 강연과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혹시 노숙자를 본 적이 있나요? 이 분들이 왜 거리에 나앉은 걸까요? 길거리가 좋아서? 그럴 리는 없겠죠. 이분들은 대부분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숙자를 양산하는 체계입니다

강신주 외, 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철수와 영희, 2012, 165쪽
강신주는 자본주의가 "노숙자를 양산하는 체계"라고 말한다. '노숙자 발언'으로 그를 비난했던 이들 대부분이 아마 이 명제에 동의할 것이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노숙자를 만들어낸 사회구조니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택광은 강신주의 노숙자 발언이 뒤늦게 화제가 되자 트위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제의 본질은 "강신주가 노숙자를 수치스러운 존재라고 말했다"가 아니다. 그의 진의가 "노숙자는 수치스럽다"였을 리가 있겠는가. '완전한 자기의 완성'을 추구하려면 본받지 말아야할 존재로 노숙자를 제시한 것.(2014.1.18)" "완전한 자기의 완성"은 좀 어색한 표현이지만 어쨌든 논란 당시 나온 이야기 중 칼럼의 진의에 가장 가까운 말이다. 나는 '강한 자아'라고 고쳐 부르고 싶은데, 어쨌든 이런 멘탈리티는 강신주의 최근 글과 강연을 모두 관통하는 핵심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강한 자아'는 물론 초인을 의미하는 게 아니며, 자본주의 사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지배계급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강한 자아는 악의와 소외로 가득찬 자본주의 세계에서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자아를 의미한다. 거대한 악에 저항하는 작은 개인의 숭고성! 바로 이런 이유에서 강한 자아는 필연적으로 멜랑콜리한 주체가 된다. 강신주는 "성공할 거라 믿고 열심히 노력하면 이미 너는 행복해 있다!" 주장하는 자기계발 강사들과 다르다. 그는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서바이벌 전문가처럼 말하길 좋아한다.
제가 늘 강의를 하면서 하는 말이지만,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게 급류 같은 데 던져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본주의라는 급류에 떨어진 거죠. 원하지 않지만 휩쓸리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버티는 거, 저는 이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배우고 공부합니다.
강신주 외, 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철수와 영희, 2012, 206쪽

물론 살아남는 자아는 강한 자아이다. 하지만 단지 생존만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 강신주의 매력이다. 어떻게 살아남는가? 다시 말해서 어떻게 인간의 존엄(dignity)을 지키며 살아남느냐가 관건이다. 강신주의 인문학이란 내가 보기엔 바로 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전부 수렴된다. 이른바 "돌직구"라 불리는 그의 멘토링 스타일이 나오는 것은 이 대목이다. 얼마 전 방영된 힐링캠프에서 어느 시청자가 '은퇴해 병들고 늙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집착하는데 너무 힘들다'고 상담을 청하자 강신주는 대뜸 "아버지를 걱정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를 제거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욕망에 가면을 뒤집어씌우지 말고 그것을 직시하라는 이야기다. 강신주의 인문학에서 이 '돌직구를 맞는' 단계는 필수적이다. 화폐로 매개된 관계, 속물적 욕망으로 더러워진 내면을 객관화시키지 않으면 윤리적 주체, 자본주의라는 급류에 견딜 수 있는 강한 자아는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라는 급류에 견딜 수 있는 강한 자아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강신주에 따르면 이건 '의지'에서 나온다. 어떤 청소년이 강연에서 이렇게 물었다. "돈이 인간관계를 매개하지만 단절시키는 측면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러한 단절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강신주는 이렇게 답했다.

"이걸 스스로 의식하고 극복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만약 친구와 나 사이에 돈이라는 매개가 끼어든다, 이것 때문에 사이가 불편해진다 싶으면 의도적으로 돈을 배제하는 겁니다. 돈 때문에 만난 친구라면 돈 말고 다른 즐거움을 찾는다거나, 돈을 매개로 한 만남 대신 인간적인 만남을 찾는다거나 하는 것도 방법이겠죠. 그 과정에서 좀 더 성숙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겁니다."(같은 책 173쪽)
▲ 주요 온라인 서점들은 강신주 특별 페이지 운영을 시작했다. 사진은 알라딘 화면 캡처.
자아성형산업의 미래
강신주는 '나는 사람들에게 힐링을 하는 게 아니며 멘토도 아니'라고 말해왔다. "나를 멘토로 생각하고 강의를 들으러오면 나한테 욕 듣는다. 내가 해주는 건 네 고민은 별거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뭔가 고민이 있으면 억지로 어렵게 만들고 그걸 고민하는 척 한다."(<더 뮤지컬 2013년 5월호) 문제는 멘토 스스로가 자신이 멘토가 아니라고 부인해도 사람들이 그를 계속 멘토라고 생각하고, 그의 효용이 떨어지면 또 다른 멘토를 찾아 떠날 것이라는 점이다. 강신주가 멘토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끝없이 멘토를 욕망하는 사회야말로 숙고의 대상이며 그런 욕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게 바로 인문정신이다. 강신주 스스로가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뭔가 '다른 것'으로 포장하고 구별짓는 일은 마케팅 전략 차원에서는 비난할 일이 아니겠다. 그러나 철학자라면 그런 자신의 '구별하고자 하는 욕망'에게도 정직한, 혹은 풍자적인 돌직구를 날려야 하지 않을까.
몰락해가는 불안한 중산층에게 비교적 싼 비용으로 최대한의 지적 쾌락과 위안을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인문 멘토링'이다. 그 사회적 순기능은 분명히 적지 않다. 단언컨대 여기엔 어떤 비아냥도 없다. 카리스마적 스타강사들이 강연을 열면 그야말로 구름처럼 청중이 몰려든다. 말 잘하는 멘토들은 청중들로부터 거의 집단 엑스터시에 가까운 반응을 끌어낸다고 한다. 삶의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던 어떤 이에게 강신주의 글 한줄, 말 한 마디가 구원일 수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절절한 '간증'을 보라.
"저는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서의 소양으로 엄마와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살아야하는 역할을 할 때 행복한줄 알고 살다가 문득 견딜 수 없게 불행하게 느껴져서 죄책감과 더 이상은 살아낼 수 없다고 울음이 나올 때 만난 게 강신주의 인문학이죠“

"더 이상 실체를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해방됐고 역할이 아닌 그냥 나로서 살려고 쌈질하면서 살고 있죠. 강신주 박사의 인문학은 그냥 인간입니다."
https://twitter.com/wj2151112/status/424359348010115072
https://twitter.com/wj2151112/status/424360369167945728
위의 고백에서 "강신주의 인문학" 대신 어떤 종교나 다단계 마케팅을 집어넣어도 별 위화감 없이 들린다(물론 나는 다단계나 사이비 종교보다 강신주의 인문학이 한 사람의 개인에게 훨씬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진부하고 모호한 휴머니즘이지만, 세상에 해악을 끼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내가 고통 받을 때 위무해줄 무언가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굳이 인문학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연애상담, '픽업아티스트'의 헌팅요령 강의, 자기계발 멘토링이 대중적 콘텐츠가 된지도 오래 되었다. 구글의 광고처럼, 각 개인에 적합한 상담을 자신의 취향에 맞는 컨설턴트로부터 구입하는 사회가 도래했다. 이 모든 것들은 약한 자아에 관념적 보형물을 집어넣는 수술이라는 점에서 자아성형산업(ego-plastic surgery industry)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며 남들과의 끝없는 비교에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지는 사람들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모든 이가 프로작을 처방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아성형산업의 미래는 무척 밝다.
자아성형산업의 미래가 밝은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 사회의 문제해결방법이 탈사회적이고 탈정치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제도적 해결방식에 대한 극단적 불신("다 똑같은 놈들")과 각개약진의 해법("억울하면 출세해라")이 일반화되어 있다. 기업, 종교단체가 아닌 다른 형태의 사회적 조직을 별로 경험해보지 못한 한국인들은 문제가 생기면 주변 사람들을 조직하고 작당(作黨)하는 것보다는 어떤 '큰 타자'를 호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개인은 '현자'에게 고통을 위로받고, 집단이 되면 왕(대통령)과 직접 대면하려 한다. 그러나 거기에 사회적인 것, 그리고 정치적인 것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남은 건 축제와 탈진의 반복이며 영원한 각개약진의 개미지옥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