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주: 범은하활자박멸운동위원회의 외계인, 파흐레느헤이트451인들은 인류가 가진 멋진 문화인 영화에 대해 무지하다. 그들은 영화와 실제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 <퀀텀 오브 솔러스>를 소개하면서, 영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를 읽을 지구인에게는 약간의 보론이 필요하다 판단해 주석을 단다.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는 007 제임스 본드의 영화를 어릴 때부터 접해왔고, 약간은 ‘유치한’ 특수장치나 플롯이 나이를 먹을수록 어색해져갔다. 원작 소설은 영화와 분위기가 다르다는 말은 들었어도 풀리지 않던 오해를, 원작소설의 일본 번역판 제2탄 <Live or Let Die>를 읽었을 때 풀 수 있었다. 영화로도 봤던 작품이었고, 영화 속 제프리 홀더가 연기한 부두교 주술사의 개성에 팬이 되었기에,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내용을 기대하며 읽은 작품에서, 부두교에 대한 진지한 보고서와 디테일이 잔뜩 들어가 (솔직히 조금은 번잡하고 지루한) 세밀한 문체로 그려지는 인간적인 제임스 본드의 ‘액션이 아닌 행동’에 매우 놀랐었다. 그 뒤로 (첫 판본은 번역으로 문제가 되긴 했지만) 원작으로의 회귀를 표방하며 나온 새로운 영화 시리즈 <카지노 로얄>에 힘입어 제1탄 <카지노 로얄>이 번역되었고, 나는 영화와 소설 모두 읽고 큰 만족을 느꼈다. 만족은 신 시리즈 영화 제2탄 <퀀텀 오브 솔러스>를 보며 조금 실망으로 바뀌었다. 오해의 시작이었다.

문학에디션 뿔에서 깔끔한 번역으로 다시 나온 <카지노 로얄>과 제프리 디버가 쓴 <카르트 블랑슈>도 구입했지만, 영화에서 받은 실망으로 <퀀텀 오브 솔러스>는 사지 않고 있었다. 내가 오해하고 있던 부분은 나중에 서점에서 책을 직접 들었을 때 (생긴 것과 달리 꽤나 가벼웠던 점도 오해가 깨진 부분이었다.) 이 책은 장편이 아니라 이언 플레밍의 단편 전집이었다. 영화는 이름만 빌려온 것이다. (의외로 많은 007 영화가 이언 플레밍의 단편에서 이름만 빌린 것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뷰 투 어 킬>, <포 유어 아이즈 온리>, <옥토퍼시> 등등)

즉각 사서 읽으면서, 깨진 오해는 새로운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장편에서 보던 지루할 정도로 지리멸렬한 행동묘사가 이어지는 전반부의 단편이 ‘장편이면 모를까, 길이도 짧은 단편에서 이런 문체라니’ 하고 실망하고 만 것이다. 책장 한쪽 구석에 꽂아둔 채로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머지 단편을 읽었고, 새로운 오해도 깨졌다. 특히 단편 <퀀텀 오브 솔러스>가 그랬다. 어떻게 오해가 깨졌는지는 아래의 보고서를 참조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 단편의 반전은 직접 책을 읽어 확인하기를 바란다.
(에이전트 S009)
---(이하 보고서)---
범은하활자박멸운동위원회 정기 보고서
작 성 자: 9급 에이전트 S009
문서번호: 20140110SMCHS402-17GNM00005
시행일자: 2014/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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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퀀텀 오브 솔러스
저 자: 이언 플레밍
출 판 사: 문학에디션 뿔
보고내용:
1. 지구인은 전쟁을 사랑하는 종족이라고, 당신들은 오해한다. 나는 이를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슬프다. 지구에는 많은 전쟁이 낳은 직업이 많다. 그 중 하나가 스파이다.
지구인은 스파이에게 일종의 환상을 품는다--비밀이 많고, 자기 자신을 통제해야 하며, 매우 중요한 일을 해내는 인물이라는 환상을. 이 환상의 고유명사가 된 인물이 007, 제임스 본드다.
2. 그는 언제나 주인공이고, 그의 이야기에서는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준비된 ‘음식’이다. 값 비싼 술도, 사치스러운 음식도, 아름답고 무미건조한 여자도, 미치광이 악당도, 이국적인 풍경도, 도박도, 모험도, 모두 다 자립하지 못하는 도구이자 객체일 뿐이다.
그는 초인이고, 평범한 지구인인 우리는 그를 보며 왜소한 자신을 잊는다.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도구로 이용당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입장에 선다.
나는 그를 사랑하면서도, 질투했다. 질투가 심할 때는 당신들이 이언 플레밍의 모든 장편을 없애버린다고 해도, 나는 괜찮다고 할 지 모른다. 그러나 단 하나, 이 단편집만큼은 남겨달라고 애원할 지도 모른다.
3. 그렇다. 나는 이 단편집을 ‘소멸’시키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퀀텀 오브 솔러스>라는 단편집을. 이 단편집 속 일부 단편에서, 본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관객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그 안에 수록된 단편 <퀀텀 오브 솔러스>를 가장 사랑한다. 이 이야기에서, 본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관객이 되고, 행동하는 지구인에서 사색하는 지구인이 된다. 자신이 겪어온 ‘비일상의 모험’보다 더한 드라마가, ‘평범한 일상 속’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퀀텀 오브 솔러스(Quantum of Solace)’는 ‘인간애의 총량’이라고 직역할 수 있고,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는 다른 언어다.) 당신들에게는 없는, 지구인의 애정, 위안, 위로, 인간애, 형제애, 사랑이라는 정동(情動)의 양을 말한다.
이언 플레밍은 평소의 스타일과는 달리, 자신이 존경하던 서머싯 몸의 스타일을 빌려 퀀텀 오브 솔러스를 이야기한다. 개체 간의 관계에서, 이 양(Quantum)이 영(0)이 돼버리면 그 관계는 끝난다고.
4.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제임스 본드가 쿠바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중 바하마의 낫소에 들려 사교계 명사들의 파티에 참가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낫소는 부자의 놀이터고, 값비싸고 지루한 일상으로 절여놓은 캐비어 같은 곳이다. 늙은 캐나다 부자와 경박하지만 아름다운 중년 부인과의 대화에서 지루함을 느끼던 본드는 그곳에서 늙은 총독이 들려주는 한 공무원과 아름다운 여승무원의 이야기를 듣는다.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젊은 공무원은 아름답고 화려한 여승무원에게 반해 결혼하지만, 그녀는 지루함을 견딜 수 없었고 공공연하게 바람을 피운다. 젊은 공무원은 퀀텀 오브 솔러스로 그녀를 참고 사랑하려 하지만, 결국 이 양은 영이 되어버리고, 그녀를 파멸로 몰아간다. 한없이 차갑고 냉정하게 그녀를 대한 공무원은 평생을 망가진 채로 살아간다. 그리고 여인은…….
나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해 줄 수 없다. 나를 놀라게 하고, 본드를 놀라게 한 이야기의 결말은 진정으로 지구인이 살아가는 세상이 (당신들의 세상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일로 가득 차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
5. 상냥하고 따뜻하던 사람이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다니--폭력과 새디즘(Sadism)으로 가득 찬 본드의 이야기들 중에서, 직접 육체적인 상처를 주지는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내게 입혔다.
본드가 온갖 기기묘묘한 고문을 받아도, 나는 오히려 묘환 쾌감을 느끼기까지 했었다. 본드는 <카지노 로얄>에서 구멍 뚫린 의자에 나체로 묶여, 구멍 아래로 나온 고환을 밧줄의 끝을 묶어 만든 둔기로 얻어맞은 적도 있다. (밧줄을 붕붕붕 돌리다, 의자 아래로 휙 던져, 퍽.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엄청난 고통과 후유증이 오는 고문이다.)
그럴 때도 내 마음에 외상(Trauma)를 남긴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언 플레밍이 존경했고, 그의 소설 속 스파이와 같은 일을 한 적도 있던 서머싯 몸의 글처럼, 예리한 면도칼처럼 마음을 후벼 판다.
6. 나는 이 단편 만으로도, 이 책은 ‘소멸’ 당하지 않을 가치가 있다고 단언한다. 지구인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당신들에게 있어, 이 단편은, 더 나아가 이 책은 당신들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그러니 부디, 이 책을 없애지 말아 달라.
끝.
범은하활자박멸운동위원회 지구지부 서울파출소

손지상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다. 미디어스에서는 범은하활자박멸운동위원회에 정기 보고서를 제출하는 '9급 에이전트 S009'를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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