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내가 들이마시는 시대의 공기는 몹시 탁해졌고 또 희박해졌다. 더 이상 사람들은 긍정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다. 사람들은 미래를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편, 한때 과거의 일 혹은 먼 나라의 일로만 느껴졌던 경제적, 정치적 위협들이 속속 현실화되고 있다. 가장 절망스러운 것은, 내가 느끼는 시대의 괴로움이 감동적이고 우아한 일급의 비극이 아니라 삼류 막장 드라마에 가까운 것 같다는 것이다. 사실 당연한 것이다. 사람들을 정말로 좌절하게 하는 것은 고통의 강도보다는 고통의 내용, 그것의 텅 비어 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가진 문제의 대부분은 어느 다른 시대의, 혹은 어느 다른 나라의 어설픈 복사본이거나 덜떨어진 유령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도착할 결말이 막장 드라마의 마지막 회처럼 그저 혼란스럽고 바보 같을 것임이 자명해 보인다. 스페인 국경의 음독자살 같은 멋진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개처럼 죽거나, 혹은 개같이 살아남거나. 삶에도 죽음에도 치욕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이게 우리가 처한 가장 큰 곤경이다. 절망조차 우습다는 것. 그것은 지금 여기 일말의 인간적 존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니까.”

-김사과, <불가능한 비극>, 한겨레 2014/1/19
소설가 김사과는 시대의 괴로움을 이야기한다. 그 시대는 낙관이 금지된 우리의 시대이며, 이미 지나간 것들 혹은 멀리 떨어진 어딘가의 것이라고 상상된 ‘경제적 정치적 위협’이 현실화되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IMF사태를 통과해 20대로 진입한 청년세대에게 꿈꿀 자유를 열어주지 않았으며, 인원 감축과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30대를 과로와 좌절로 이끌었고, 명예퇴직이란 이름으로 40대를 직장에서 내쫓았다. 최후의 보루라는 자영업을 과다경쟁으로 내몰았고,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고사 위기에 처하게 했다. 그렇게 이 시대가 강요하고 남겨놓은 미래란, 전체의 절반이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노인세대의 현실이다. 정치권력은 민의를 반영하지 않고 사회적 안전망의 상징이던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은 위태로워 보인다. 미래란 희망과 기대가 탈각된 시간의 흐름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비극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기적이 일어나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고 해도 현재를 지탱하는 수준에 불과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 모두는 비극을 피하고 싶어하며 그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대출을 받고, 미친 듯이 스펙을 쌓고, 권장하는 금융상품에 분산투자하고, 한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전설적인 대통령의 딸에게 투표하고, 떨어지는 집값을 잡기위해 임대주택 건설을 반대한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노력 덕분에 비극이 더욱 공고히 예정된다는 점에 이 비극의 비극성이 있다. 그리하여 김사과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개처럼 죽거나 개같이 살아남”아, “삶에도 죽음에도 치욕을 피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시대에 대한 독해가 지나치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거기에 반박하지 않겠다. 그러나 김사과의 글은 시대를 지배하는 불안의 일면을 정확하게 표상한다. 아무리 고개 저어도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안을 거부하지 못한다. 501번째 내는 이력서에서 1차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있을지를 불안해하는 삶에서, 내년에 재계약이 될지 어떨지 불안해하는 삶에서, 3년 후면 직장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불안에 시달리는 삶에서, 건물 주인이 이번엔 얼마나 임대료를 올려달라고 할지 불안해하는 삶에서, 우리는 삶의 추락과 파탄을 엿본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음에도 카프카 소설의 한 장면처럼 우리 앞에 던져질 것이란 예감은 비극으로 표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김사과의 글을 읽으며 ‘누구도 원하지 않던’, ‘삶에도 죽음에도 치욕은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는 두 구절을 되새기던 나는 책장 속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꺼내 읽어 보았다.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아 자식들까지 낳았던,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비극을 맞아 치욕과 모멸에 내던져진 한 인간의 이야기가 거기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어떤 인간인가
<오이디푸스 왕>은 사태 한 가운데에서 시작한다. 테바이에는 역병이 돌고 죽음이 도시를 덮고 있다. 시민들은 양털실을 감은 나뭇가지를 들고 스핑크스로부터 도시를 구해주었던 지도자 오이디푸스를 찾아 왔다. 오이디푸스는 그들을 기꺼이 맞는다. 아니 자신이 먼저 이들에게 다가간다. 테바이 시민들이 찾던 오이디푸스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탁월한 사람이다. 그는 과감하게 행동한다. 도시에 역병이 창궐하자 청원이 들어오기 전에 크레온을 보내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한다. 그리고 시민들을 만나 불안을 덜어주려 애쓴다. 권력자의 가식이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걱정하며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슬퍼한다. 그는 시민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가엾은 내 아들들이여. (...) 그대들이 모두 고통당하고 있음을 잘 알겠소. 하지만 그대들이 고통당한다 하더라도, 나만큼 고통당하는 사람은 그대들 중에 아무도 없을 것이오. 그대들의 고통은 각각 당사자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과는 어느 누구와도 무관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내 마음은 도시와 나 자신과 그대들 모두를 위해 비탄하오. 그대들은 잠자고 있던 나를 깨웠던 것이 아니오. 그대들은 내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수많은 생각의 길을 헤매고 있었음을 알아두시오.” (58~67행)
그는 실천력만 갖춘 것이 아니다. 사태를 꿰뚫어보고 원만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지성도 갖추었다. 크레온이 돌아와 테바이를 더럽히는 오욕의 인물이 있으며 그는 선왕 라이오스(오이디푸스의 친부)를 죽인 자라고 신탁을 전하자, 오이디푸스는 즉시 심문을 시작하고 포고령을 내린다.
“그대들 중 누구든 랍코스의 아들 라이오스가 어떤 자에게 살해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내게 사건을 전말을 알리시오. 이건 명령이오. 그리고 자신의 범행이 두려운 자는 자수하여 극형의 위험을 면하도록 하시오. 그는 아무 피해없이 나라를 떠날 뿐, 그 밖에 다른 불쾌한 일을 겪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누군가 이방인을 범인으로 알고 있다면, 그는 침묵을 지키지 마시오. 그에게 나는 상을 줄 것이고 사의를 표할 것이오.”(224~232행)
살인자가 직접 자수한다면 어떤 형벌도 내리지 않을 것이고, 어떤 불쾌한 일도 겪지 않도록 조처할 것이며, 살인자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상까지 내리겠다고 약속한다. 원하는 것은 살인자가 도시를 조용히 떠나는 것뿐이다. 자백할 조건을 만들고, 보복을 금지함으로써 죽음이 만연한 도시에 또 하나의 죽음을 더하는 비극을 방지하려 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달콤한 회유책만 제시할 수 있는 유약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엄격함과 단호함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대들이 침묵을 지킨다면 (...) 내 일러두거니와 그 살인자가 누구든 (...) 그 누구도 그자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거나 말을 걸어서는 안 되며, 그와 공동으로 신들게 기도하거나 제물을 바쳐서도 안 되며, 물로 정화의식을 베풀어서도 안 되오. (...) 그 알려지지 않은 살인자는 혼자서 범행을 했든 여러 사람과 작당했든 사악한 인간인 만큼 불행한 일생을 비참하게 살다 가라고 나는 저주하오! 그리고 만일 내가 알고도 그 자를 집안의 화롯가에 받아들인다면 방금 그 자들에게 퍼부은 것과 같은 저주가 내게도 실현되기를!”(233~251행)
범인이 자수하지 않는다면 강제력을 동원하여 고립 상태에 빠뜨리고 맹세코 저주를 내릴 것이라고 공언한다. 나아가 우연으로 그러한 행위를 자신이 한다면 저주를 자진해 받겠다고 천명한다. 회유책과 위협을 동시에 가하면서 현명한 선택을 이끌어내려는 오이디푸스의 모습은 기지와 재주가 있는 어떤 청년이 운 좋게 수수께끼를 풀어 왕이 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는 결단하고 실행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통찰과 지성으로 자신의 지위를 정당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그는 탁월한 사람이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인간이다.
그는 영웅의 면모만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오만하다. 테바이의 시민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입으로 서슴없이 “세상에 명성이 자자한 이 오이디푸스가 몸소 왔”(7~8행)다고 말한다. 자신의 노력과 명민함으로 이뤄낸 것들에 지나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콤플렉스도 있다. 자신이 테바이의 이방인이며 본래 왕위와 관계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못 견뎌한다. 살인자를 밝히기 위해 포고령을 명하면서 자기는 선왕의 부인과 결혼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선왕은 혈연관계이고, 선왕은 친부와 다름없다는 빈약한 논리를 강요한다.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를 성급하게 만든다. 살인자를 찾기 위해 불러온 예언자가 오이디푸스를 역병의 원흉으로 지적하자, 오이디푸스는 이 모든 것이 예언자와 결탁하여 자신을 쫓아내려는 음모라고 예단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충성스러운 크레온에게 퍼붇는다.
“자네 어찌 그리도 후안무치하단 말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나를 살해하려 하고 분명 내 권력을 도둑질하려는 주제에 감히 내 집까지 오다니! 자, 신들께 맹세코 말해보게. 내게 이런 음모를 꾸미다니. 자네 나를 겁쟁이나 바보로 알았나? 자네가 이렇게 몰래 나를 향해 기어들어오는 것을 내가 모르거나, 알더라도 막지 않을 줄 알았나? 추종자들이나 친구들도 없이 왕권을 쥐려 하다니, 그런 짓을 하는 자네야말로 어리석지 않은가!”(532~541행)
크레온의 거듭된 부정과 논리적인 설득에도 불구하도 오이디푸스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크레온이 라이오스 왕의 혈육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은 오직 자신의 왕위에 한정되어 있다. 크레온을 저주할 때, 그는 불안에 시달리는 인간이다. 자신이 모든 힘을 다해서 이룬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질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이 그가 맞닥뜨려야할 비극에 대한 응분의 댓가인지는 의문스럽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일 뿐이다. 누구나 칭송할만한 탁월함과 현명함을 지녔지만 그만큼 오만함과 성급함을 자제하지 못하는 그런 인간.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지닌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말이다.
비극을 맞이하다
오이디푸스는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에게 묻는다. 선왕 라이오스가 어떻게 살해당했느냐고. 이오카스테는 선왕이 마차를 타고 델포이를 가다가 세 갈래 길이 만나는 곳에서 살해당했다고 답한다. 이에 오이디푸스는 불길한 예감을 토로한다. “오오, 제우스이시여 그대는 내게 어떤 운명을 정해 놓으셨나요?” 이오카스테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자기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는 것. 무서운 운명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의 나라를 떠났다는 것. 테바이로 오던 중 세 갈래의 길이 만나는 곳에서 아주 무례하게 굴던 낯선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 그래서 그들을 죽였다는 것. 오이디푸스는 ‘오욕의 인물’이 자기 자신임을 직감한다.
“그 낯선 남자가 혹시 라이오스와 친척간이라면[세상에 나보다 더 비참한 자가 어디 있을 것이며,] 나보다 더 신에게 미움 받는 자가 어디 있겠소? 어떤 이방인도 나를 집안에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아무도 내게 말을 걸어서는 안 되며, 모두들 나를 집 밖으로 내쫓아야 하니 말이오. 그리고 나를 저주한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나 자신이었소. 그리고 나는 내가 죽인 사람의 침대를 그를 죽였던 이 두 손으로 더럽히고 있소. 나야말로 사악하지요? 또한 아주 불결하지 않소?”(814~823행)
이오카스테는 좋은 말로 위로하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라이오스의 시종 중 하나가 도망쳤고, 그를 불러온다면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있으며, 자신이 살인자가 아니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비극은 기대를 배반한다. 오이디푸스의 양부의 나라에서(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친부의 나라로 알고 있는) 사자가 도착한다. 그리고 코린토스의 왕이 죽었으니 가서 왕위를 물려받으라는 소식을 전한다. 잠시동안 기쁨이 넘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슬픈 것이지만,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오이디푸스가 신탁과는 달리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으며, 자신의 어머니와 동침하지 않으리라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이오카스테는 걱정할 것이 없지 않았느냐며 오이디푸스를 격려하지만, 여전히 오이디푸스는 두려워한다. “하지만 내 어찌 어머니의 침대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소?”(976행) 이런 오이디푸스의 모습을 보고 사자는 묻는다. “그대가 두려워하는 그 여인이 도대체 누구지요?”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이야기한다. 그러자 사자는 감춰져 있던 출생의 비밀을 밝히기 시작한다. “내 아들이여, 그대는 분명 자신이 뭘 하는지 모르고 계시는군요.”
“오이디푸스 : 무슨 말을 하는 게요? 폴뤼보스가 내 아버지가 아니란 말이오?
사 자 : 나보다 더는 아니옵니다. 나만큼이라면 또 몰라도
오이디푸스 : 아버지가 남과 어떻게 같다는 게요?
사 자 : 그분이나 나나 그대를 낳지 않기는 마찬가지니까요.“ (1017~1020행)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재차 묻는 오이디푸스에게 사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아기였던 오이디푸스를 건네받아 폴뤼보스에게 데려갔음을, 그때 오이디푸스의 두 발이 묶여 있었음을, 그리고 자신에게 오이디푸스를 건네준 사람이 라이오스 왕의 가신이었음을 말한다. 이때 새파래진 이오카스테가 소리친다. “이 사람이 말하는 자가 누구면 어때요? 조금도 신경쓰실 것 없어요. 그 따위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다 허튼소리에요.”(1056~1057행)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진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은 채 출생의 비밀까지 겹치자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출신성분에 대해서만 걱정한다고 여긴다.
“오이디푸스 : 염려마시오. 내 어머니가 노예이고 내가 삼대째 노예로 밝혀지더라도, 당신이 천민으로 드러나지는 않을 테니 말이오.
이오카스테 : 제발 내 말을 들으세요. 부탁이에요. 더는 따지지 마세요. (...)
오이디푸스 : 누가 가서 그 목자(오이디푸스를 사신에게 전한 라이오스의 가신 - 인용자)를 이리 데려오고, 이 여인은 자신의 부유한 가문을 자랑하게 내버려두시오.“(1063~1070행)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비극을 확인하려는 오이디푸스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사랑하는 아들이자 남편인 이 남자에게 다음의 말을 남긴 채 궁전으로 들어간다.
“아아, 가여운 분.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예요. 다른 말은 차후에도 듣지 못하실 거예요.”(1071~1072행)
이오카스테의 슬픔에 가득찬 목소리도 출생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오이디푸스의 결심을 꺽지 못한다. 아기였던 오이디푸스를 사자에게 건넨 목자가 들어오고 사자는 자기들 앞에 앉아 있는 왕이 바로 그 때의 어린애라며 목자의 기억을 환기시키려 한다. 목자는 모든 것을 알아차린다. 당장 그 입을 다물라고 사자에게 호통치지만, 왕의 명까지 거역하지는 못한다.
“오이디푸스 : 어디서 났느냐? 그대의 아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의 아이냐?
목 자 : 내 아이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받았사옵니다.
오이디푸스 : 여기 있는 시민들 중 누구에서 어느집에서?
목 자 : 제발 부탁이니 주인님 더는 묻지 말아주소서.
오이디푸스 : 나로 하여금 다시 묻게 하면. 그때는 끝장이다.
목 자 : 그러시다면 그 애는 라이오스 집안의 아이였습니다.“ (1162~1166행)
이제 오이디푸스도 모든 것을 알게 된다. 비극을 말하게 된 목자는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끝까지 확인하려 한다. 목자의 대답에 의해 자신이 라이오스의 왕의 버려진 아들이었으며,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고, 자신의 어머니와 동침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그는 절규한다.
“아아.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오오 햇빛이여. 내가 너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기를! 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태어나,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과 결혼하여,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구나!” (1182~1185행)
그 후에 벌어진 일을 사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님께서는 이렇듯 남편에게서 남편을, 자식에게서 자식을 낳게 한 이중의 혼인을 슬퍼하셨어요. 하지만 그 다음 마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떠나셨는지는 저도 몰라요. 오이디푸스 왕께서 비명을 지르시며 뛰어 들어오시는 바람에 우리는 마님의 고통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주위를 뛰어다니시던 그분에게 시선을 집중했으니까요. 그분께서는 우왕좌왕하시며 우리에게 창을 달라 하셨고, 아내가, 아니 아내가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자식들을 낳은 이중의 어머니의 밭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어요. (...) 방안에서 우리는 흔들리는 밧줄의 꼬인 고에 마님께서 목을 매달고 계신 것을 보았어요. 마님을 보시자 그분께서는 큰 소리로 무섭게 울부짖으며 마님께서 매달려 계시던 밧줄을 푸셨어요. (...) 그분께서 마님의 옷에 꽃혀 있던 황금 브로치를 뽑아 드시더니 자신의 두 눈알을 푹 찌르며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말예요. ”이제 너희들은 내가 겪고 있고, 내가 저지른 끔찍한 일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너희들은 보아서 안 될 사람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보았으면서도 내가 알고자 했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어둠 속에서 지내도록 하라!“ 이런 노래를 부르시며 그 분께서는 손을 들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자기 눈을 찌르셨어요. 그리고 찌르실 때마다 피투성이 된 눈알들이 그분의 수염을 적셨어요. 그리고 핏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의 검은 소나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어요.“(1149~1279행)
비극 이후에도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
비극을 맞이하여 치욕과 모멸 속에 내던져진 오이디푸스에 대해 우리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그는 '개같이' 되었는가? 오이디푸스가 맞이한 비극은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운명이 그에게 던진 치욕은 짐승에게도 합당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고, 한줌의 존엄도 구걸할 수 없는 인간이 되었다. 그에게 ‘개처럼 죽거나, 혹은 개같이 살아남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오이디푸스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눈을 찌른 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운명을 저주한다. 왕위에 오를 크레온에게 자신을 추방시켜달라고 간청하고, 불행한 자식들의 앞날을 슬퍼한다. 오이디푸스가 보여주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저열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비극을 통해서만 드러낼 수 있는 고귀함이 엿보인다.
후지타 쇼조는 <어느 상실의 경험>에서 "승리가 지배와 권위와 명성을 의미하지 않고 패배가 참상과 굴욕과 동정받기를 의미하지 않은" 인간의 조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인간은 단절없는 발전과 극복을 통해 '성장'을 이루는 존재가 아니라, "고꾸라져 쓰러지는 하강과 몰락"을 통해 '재생'을 이루는 존재라는 것이다. 재생은 전환을 뜻한다. 전환은 극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극복이 위기를 넘어서 위기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이라면, 전환은 위기를 영점으로 삼아 위기 이전과 단절하는 것이다.
완벽한 단절은 아니다. 그러나 위기 이후에는 이전의 삶의 방식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이렇게 전환은 위기 이전과 이후 사이에 위치한다. 기존의 통념으로 볼 때 전환은 철저한 몰락과 패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방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삶의 방향과 가치가 파괴되는 것이 불가결하지만, 이때의 파괴는 자기파괴가 필연적임을 증명하는 ‘몰락’과 ‘패배’의 형상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몰락과 패배가 ‘전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환에는 기존의 가치에 순응하는 동시에 저항하는 이행기적 완고함이 요청된다. 패배에 좌절하되 허우적대지 않고, 몰락을 저주하되 거부하지 않으며, 희망을 말하지 않지만 절망으로 이행하지도 않는 어떤 불가능함을 지향하는 자세가 그것이다.
오이디푸스가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을 맞이했음에도 고귀하게 현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만 신들에게 책임 전가를 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저주하지만 손쉽게 죽음을 택하지 않는다. 자신의 치욕을 수치스러워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런 불가능함을 지향하는 자세를 견지하며 인간적인 슬픔에 잠겨있는 것이다. 불가능함을 추구하는 강함과 슬픔으로 점철된 나약함의 결합을 통해 그는 ‘전환’의 가능성을 고귀함으로 드러낸다. 오이디푸스에게 크레온이 다가온다. 그리고 신들에게 물어보겠다고 말한다. 오이디푸스는 비극을 맞아 몰락했다. 기존의 삶은 회복될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새로운 신탁이 기다린다. ‘재생’이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후지타 쇼조의 전환에 대한 통찰은 다음을 기약하자. 대신 <오이디푸스 왕>이 보여주는 인간 존엄의 조건을 환기해보자. 김사과가 예감하듯 우리 모두는 비극을 피할지 못할지도 모른다. 과거의 정치적 경제적 위협이 현실화되고, 새로운 세대와 가치가 진입하지 못하며, 구조는 내버려둔 채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 유일한 탈출구가 되는 순간, 우리는 치욕과 모멸 속으로 던져질지 모른다. 그러나 삼류 막장 드라마에 가까운 비극이라도 우리가 재생을 준비하는 한, ‘고통의 내용, 그것의 텅 비어 있음’에 이행기적 완고함을 채워 넣는 한, 우리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거기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시민들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쫓아내달라는 오이디푸스와 그런 오이디푸스를 고귀한자로 대해 집안으로 모시는 장면이 지시하는 것. 비극 이후에도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책임을 안은 개인과 환대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사회적 유대감이 OECD 최하위에 속하고 믿을 것은 오로지 돈밖에 없는 한국인의 현실을 떠올려 볼 때, <오이디푸스 왕>은 비극을 앞둔 우리가 절실히 가져야 할 것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지 않는가?

고덕영

2006년에 결혼했다. 결혼 직후 용돈이 궁한 탓에 한 번 사면 오래 읽을 수 있는 난해하고 어려운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그런 책들을 오독하다 보니 '인문 딜레당트'로 '전락'하여 이런 저런 책을 뒤적뒤적하며 나락에 빠진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의구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로 인문 쪽 책들을 건너다닌다. 한 아이의 아빠이자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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