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는 그의 소설만큼은 아니지만 꽤 유명하다. 그는 매일 10킬로미터를 달리고 마라톤 풀코스도 수십 차례 완주했다. 달리기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고, 묘비명에 ‘작가 겸 러너,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고 써달라고 할 정도로 달리기에 대한 애착이 깊다. 임마누엘 칸트의 산책은 그의 철학보다 훨씬 유명하다.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읊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칸트가 산책하는 걸 보고 마을 사람들이 시간을 알았다는 신화는 진실로 여겨진다.

하루키는 왜 달렸고, 칸트는 왜 산책을 했을까. 물론 건강도 중요한 이유겠지만, 이건 일종의 의식(儀式)이다. 삶의 리듬을 유지하고 무언가 해내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 이런 일상의 반복적인 행동 패턴을 ‘리추얼’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작가, 예술가, 과학자, 영화감독 등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161명의 인물들이 어떻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연구를 하고 구상을 할 수 있는 나름의 상태를 만들고 유지했는지를 그들 각자의 리추얼을 통해 살펴본다.
책을 열자마자 역사 한 구석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할 우리가 얼마나 허세를 부리며 살았는지 바로 깨닫게 된다. 미국 시인 위스턴 휴 오든은 ‘정직한 예술가는 밤에 일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양철북>으로 유명한 귄터 그라스는 “밤에는 절대 글을 쓰지 않습니다. 밤에 글을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험적으로, 밤에 쓴 글을 아침에 읽어보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글을 쓰려면 햇빛이 있어야 합니다.”라 말하며 왜 우리가 매일처럼 써놓은 글에 좌절하는지 이유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여기에 복음주의 신학자 조너선 에드워즈가 ‘그리스도께서 이른 새벽이 일어나신 것처럼’으로 운을 떼니 백기를 들 수밖에 없다. 아쉽게도 우리의 밤을 응원해줄 이들은 대개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늙어서 잠이 줄어든 경우라 모른 척 넘어가야겠다. “저, 이분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어렸을 때야 작가나 예술가라고 하면 어느 순간 생각이 떠올라서 미친 듯이 글을 쓰거나 붓을 움직이는 장면을 떠올렸지만, 그건 꿈속에서나 벌어지는, 현실에서 벌어진다고 해도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천재에게나 허락된 일이라는 걸, 우리는 너무 늦게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무려 열다섯 편의 장편을 남긴 찰스 디킨스는 기계처럼 규칙적으로 살았다고 한다. “7시에 일어나 8시에 아침 식사를 했고, 9시에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오후 2시까지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전에 휴식을 겸해 가족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지만, 그동안에도 디킨스는 무아지경에 빠진 듯 기계적으로 식사하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식사를 끝내자마자 서재로 돌아갔다. 평일에는 이런 식으로 작업하며 2,000단어를 썼고, 때로 상상력에 날개가 더해지는 날에는 그보다 두 배나 많은 양을 쓰기도 했다.”
작은 위안은 그런 그도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는 것이고, 큰 좌절은 그런 날에도 예외 없이 작업 시간을 준수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디킨스도 타이머와 버저 소리에 맞춰 글쓰기를 시작하고 멈춘 심리학자 스키너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스키너는 이에 더해 글을 쓴 시간과 그 시간에 작성한 단어의 수를 그래프로 정밀하게 기록했는데, 이 두 가지 자기 강화 행동으로 매일 아침 글을 쓰기 편한 상태로 자신을 조건화시켰다고 한다. “아, 제가 동네를 잘못 찾아온 것 같네요. 지도를 잘못 봤나.”
물론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왠지 모르게 뿌듯해지는 인물도 있다. 극작가 톰 스토파드는 만성적인 무계획과 뒤로 미루는 습관 때문에 평생 고생했는데, 그는 자신이 글을 쓰게 만드는 요인은 두려움뿐이라며 “마감 시간에 쫓겨 혼비백산해야만 타이트라이터 앞에 오랫동안 붙어 있게 된다.”고 고백한다. 마음이 조금 놓이지만, 앞서 나온 인물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 게 분명하니 역시 아쉽다. 나의 존재 이유를 확충해주고, 나의 미래를 확인해줄 사람을 좀더 찾아보자. 아,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 옹.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지독히 싫어하는 형식논리학에 대한 강의 준비라는 이유로 벽난로 붙을 뒤적이고, 의자를 똑바로 세우고,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털고, 책상 위를 정리하고, 신문을 집어 들고, 눈에 띄는 책의 제목을 적어두고, 손톱을 정리해야 하지만 차일피일하며 아침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 요컨대 모든 일을 무계획적으로 행하는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아니, 선생님, 저를 알고 계신다고요? 저희 집에는 벽난로가 없는데요.”
이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췄으니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다채로운 리추얼을 만나보자. 추리소설가 조르주 심농은 단번에 80페이지를 써낼 수 있었고 수정도 하지 않았다는데,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에는 똑같은 옷을 입고, 작품 하나에는 1.5리터의 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새로운 작품을 기작하기 전과 끝낸 후에 체중을 쟀다고 한다. 아, 이제 이 정도로는 놀랍지 않을 텐데, 그래서 살짝 알려드리면, 심농은 성욕이 엄청났다고 한다. 심농의 전기에는 “대부분의 사람은 매일 일하고 주기적으로 성생활을 즐긴다. 하지만 심농은 매일 성행위를 했고, 수개월마다 광적으로 집필 작업에 빠져들었다.”는 평가가 있고, 심농 자신도 “길면 두 시간, 짧으면 10분 동안 지속되는 그런 모험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내가 소설에서 어떻게 수십 명, 더 나아가 수백 명의 여성 등장인물을 창조해낼 수 있었겠는가?”라며 호방하게 웃는다.
이렇게 시끄럽게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가 있는 반면, 같은 추리소설계에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이가 있었으니 바로 ‘독살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다. 수십 명을 독살로 보낸 소설과는 달리(?) 그는 쥐도 새도 모르게 집필을 했다고 한다. [많은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소설을 언제 쓰는지 모르겠어. 네가 글 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 심지어 글을 쓰겠다고 어디론가 떠난 적도 없잖아.” 나는 개들이 뼈를 물고 사라질 때처럼 행동해야 했다. 개들은 말없이 순식간에 사라져서, 30분가량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코에 진흙을 잔뜩 묻힌 채 수줍어하며 돌아온다. 나도 거의 똑같이 행동했다.] “심농 선생님, 정녕 그 길만이 저의 길인가요. 그렇다면 흔쾌히 따르겠지만.”
자, 이제 나의 리추얼을 찾을 시간이다. 헤밍웨이는 자만하지 않으려고 그날 쓴 단어의 수를 기록해두었다는데, 이제는 한글 문서정보가 대신해주니 자만은커녕 그 시간에 글을 쓰는 게 남는 장사일 테고, 스콧 피츠제럴드는 “단편은 길이에 따라 다르지만 단번에, 많아야 세 번 만에 써내야 가장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 세 번에 나눠 쓰더라도 사흘을 연속해서 쓰고, 하루 정도 수정해서 끝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거라면 원고지를 트위터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조너선 프랜즌처럼 예술가와 결혼을 할 수도, 윌리엄 스타이런처럼 중상층의 생활 여건을 마련할 수도, 헨리 그린처럼 사업가라 거래처 관계자들이 책을 사줄 리도 없다. 그나마 가능한 건 제임스 조이스가 2만 시간에 걸쳐 <율리시즈>를 썼다는 건데, 아무리 평균 수명이 늘었다지만 “일단 저는 그렇게 긴 작품을 쓸 생각이 없는걸요.”
안 되겠다. 이제 리추얼이고 뭐고 내가 살 길을 찾아보자. 에드워드 애비처럼 “나는 약속이나 의무감에 쫓겨 글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압박감을 받으며 작업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라여 짐짓 점잖은 척을 하고서는 “그러나 미리 원고료를 받으면 좋겠습니다. 압박감이 있어야 작업을 하니까요.”라고 모른 척 말해보는 건 어떨까. 아니다. 그나마 내가 이 바닥에서 버티는 건 그저 몸을 낮추고 낮은 곳에 임했기 때문 아닌가. 아, 드디어 발견했다. 미국 소설가 버나드 맬러버드 선생님의 귀한 말씀에 귀 기울여본다.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나일 뿐, 피츠제럴드도 아니고 토머스 울프도 아닙니다. 글을 쓰려면 그냥 앉아서 쓰면 됩니다.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자신의 기질이나 성격에 맞는 방법을 택하면 됩니다. 어떤 작가가 철저히 시간을 지키며 작업한다고, 그 사람이 어떻게 작업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제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방법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비결이 있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소설을 쓰는 겁니다. 시간은 훔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을 글로 표현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결국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한마디로, 깨야 할 진짜 미스터리는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한마디로, 깨야 할 진짜 미스터리는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라고?? 저기, 작가님. 이걸 왜 마지막 쪽에 넣으셨나요. 이런 게 작가님의 리추얼인가요. 161번째 리추얼이라고 이렇게 특별 대접을 하시면 앞선 리추얼과 작가들은 뭐 잘났다고 떠든 꼴이 되지 않을까요. 너무 하십니다. 그렇다면 저도 반격하는 심정으로 미디어스 서평을 어떻게 쓰는지 제 리추얼을 공개하겠습니다. 우선 이 지면은 한 달에 한 번인지 5주에 한 번인지 알 수 없지만, 담당자인 한윤형 기자와 수시로 이야기를 나누는 터라 매주 마감하는 기분입니다. 한윤형 기자는 제 기분을 모르겠지요. 매번 마감을 제때 지키지 못하고 시간을 넘겨 바쁘게 만들지만, 그 미안함은 일단 원고를 넘기면 금세 사라집니다. 이것이 필자의 위치 아니겠습니까. 담당자는 리추얼 같은 사치를 부릴 상황이 아닌 게지요. 지금은 퇴근 시간을 넘긴 6시 45분, 원래 마감은 오후 4시, 한윤형 기자는 7시 저녁 약속을 앞두고 마음속으로 제 욕을 하고 있으려나요. 뭐 그것도 나름의 리추얼이라면 그 정도는 시원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쨌거나 ‘세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는 혼자만의 의식’으로서의 리추얼이 아니라 내 삶이 빛나면서 주변도 함께 밝힐 수 있는 리추얼을 찾아갸겠습니다. 다름 아닌 마감을 제때 지키는 일이겠지요. 이를 위해 귄터 그라스처럼, 찰스 디킨스처럼, 제임스 조이스처럼, 아,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조르주 심농처럼 리추얼의 향연을 펼쳐보겠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의 리추얼은 공개하지 않은 거죠? 혹시 당신도 심농파?“

박태근

온라인 책방 알라딘에서 인문, 사회, 역사, 과학 분야의 책을 맡습니다. 편집자란 언제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사람이라 믿으며, 언젠가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을 짓고 책과 출판을 연구하는 꿈을 꾸며 삽니다. 공식 애칭은 서경식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바갈라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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