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 빌리 엔 / 오르바르 뢰프그렌 지음, 신선해 옮김, 출판지식너머(2013)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주인공 월터는 공상을 즐기는 인물이다. 폭발하는 건물에서 좋아하는 여자의 강아지를 구하는 상상을 하다 기차를 놓치고, 짝사랑 하는 직장 동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연 이탈리아 악센트를 가진 산악인이 돼 작업 거는 상상을 하며, 짜증나는 상사와 어벤져스 마냥 도시를 누비며 격투하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월터의 내면에서 그토록 격렬한 작용이 일어나는 것과 달리 주변사람들은 월터가 그저 ‘멍 때리는’ 줄 알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은 문화 미디어 연구학자 빌리 엔과 유럽 인류학 교수 오르바르 뢰프그렌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비형식적 설문조사 및 면담 ⦁관찰과 해당 주제와 관련된 문헌을 수집하는 민속 지학적 조사를 겸해 엮어낸 책이다. 이들은 멍 때리는 것처럼 보이는 ‘기다리는 시간’(예를 들어 마트에서 계산을 하기 위해 줄 서 있는 순간, 컴퓨터가 부팅을 완료하고 인터넷을 연결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성인이 되어 자유를 누리고 인격적 대우를 받을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청소년기의 시간 등), 별다른 생각 없이 아무렇지 않게 반복적으로 일상의 습관들(화장, 면도)을 수행할 때, 마음이 몸에서 떠나 상상의 세계를 떠도는 순간에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책은 ‘기다림’, ‘일상의 습관’, ‘공상’, ‘현대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등 네 챕터로 구성돼있다. ‘기다림’ 챕터에서는 기다림에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개념에 대한 학습과 윤리원칙이 반영됐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이 기다리면서 불안감과 감정적 에너지를 가지는 것은 새롭게 정립된 시간개념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태한 시간’을 경시하고 ‘생산적인 시간’을 존중하는 시대에 시간낭비는 불안감의 주된 원인이 된다.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뿌리내린 서구사회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하지만 저자들은 사회학자 필립 바니니의 글을 빌어 “삶이란 ‘평범한 시간들’로 이뤄진다고, 가능성을 제공하는 순간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기다림도 시간낭비가 아닌 역동적인 행위일 수 있다”(p.69)고 말한다. 기다리는 동안 몸은 묶여있을 지라도 마음은 다른 곳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고, 시간의 호흡이 사라져버린 감각을 느낄 수 있으며, 곁에 있는 낯선 이들과 자신의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챕터는 ‘공상‘이었다. 공상은 현실도피로 치부되고 ’잉여짓‘이라며 멸시 당한다. 그러나 공상이야말로 현실을 지탱하는 힘이다. “우리는 삶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다. 다른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고, 남들이 비현실적인 환상이라고 여기는 것을 체험하는 상상을 탈출의 기회로 삼는다.”(p,351) “공상을 하지 않는다면 명백한 사실이 아닌 것은 전혀 알 길이 없을 테고, 우리네 삶은 뻔하고 진부한 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p.366)
책은 또한 공상이 상업시장에서도 긍정적인 지위를 얻고 있다며 “환상 탐험을 통해 혁신적인 결과를 창출한 발명가와 사업가들의 성공담과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는 운동선수”를 예로 든다.
몸과 마음은 상호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몸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공상의 양상은 달라질 수 있다. 침대에나 소파에 누워 휴식을 취할 때 편안한 몸에서 느껴지는 마음의 움직임, 정처 없이 거리를 걸을 때 흐르는 의식(이를 담은 소설 중 대표적인 것으로 책에서는 <율리시즈>를 꼽는다. 서구의 <율리시즈>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있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자유로운 기분 속에서 떠오르는 공상들은 각각 미묘하게 다르다.
공상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또 다른 요소는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이다. 심리학자 디아네 바르트의 친구 바바라는 뉴욕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왜 앉아서 신문이나 책을 읽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며 본인은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사연을 읽는 게 훨씬 재밌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배낭을 둘러멘 청년이 눈에 띄면 그가 이제 막 대학생활을 시작할 참이라고 상상하며 어쩐지 작은 마을 출신이며 유년기에 말썽을 피웠을 것이라 공상한다.(p.266)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보고 울컥했다는 지인은 영화가 ‘사실 네가 했던 공상과 네가 보낸 일상은 헛된 것이 아니었어’라고 위로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이 책 역시 월터처럼 지루한 일상을 공상으로 버티어가고, 때로는 공상을 자책하는 이들이 읽으면 자존감을 높이는데 좋은 근거가 될 수 있겠다. 잉여로운 순간들이 일상을 버틸 수 있게 돕고 창조의 근원이라는 점을 상기할 수 있다. 다만 하고자 하는 얘기에 비해 책이 길고 지루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게 흠이다. 개인적으로 ‘연구자인 너님들에게나 흥미로운 거겠지ㅋ’ 싶은 부분도 있었고 뻔한 얘기를 길게 늘어놓았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었다(특히 챕터 2가 그랬다)는 점이 참고가 되면 좋겠다.

잉집장

<월간 잉여>는 잉여를 위한 잉여에 의한 잡지입니다. 15호까지 발간됐습니다. 이름만 월간 잉여임. 갈수록 발행텀이 길어지고 있음. 발행인 겸 편집인이 게으른 탓입니다. 그 발행인 겸 편집인이 저임. 최근 이상한 웹진 커뮤니티 사이트도 만들었는데 놀러오세요. http://ingch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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