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고양이의 소통의 간극은 하늘과 땅 사이다. 나는 좋다고 꼬리를 세우지만 상대방은 이를 공격의 징후로 생각하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내 진심을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고 도리어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니 개와 고양이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절대로 없을 듯 보인다. 여기,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 으르렁대는 남녀가 있다. 호정(한혜진 분)은 아버지가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하는 통에 신체포기각서를 쓸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 호정을 보자마자 한눈에 사랑에 빠지는 남자가 있다. 태일(황정민 분)이다. 사랑하는 호정을 위해 자신이 받을 보너스 대신에 호정 아버지가 갚아야 할 빚을 갚아주기로 마음먹은 태일은 호정에게 매일 한 시간씩 만나자고 한다. 한 시간씩 만날 때마다 빚을 줄여주겠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채권자인 늑대가 채무자인 양에게 이런 조건을 앞세우니 호정 입장에서는 태일이 반갑다기보다는, 빚을 갚아주겠다는 조건으로 검은 마음을 품지 않을까 염려된다. 이러니 둘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질 리가 없다. 호정과 태일의 첫 만남은 사랑이라기보다는 태일의 짝사랑, 늑대와 양의 어색한 만남, 개와 고양이의 소통이다.

태일은 호정에게 다가가기를 바라지만, 호정이 마음 문을 굳게 닫고 경계를 늦추지 않을 때에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짝사랑에 다름 아니다. 채무자를 향한 채권자의 사랑 가운데에서 탈색되는 건 태일의 폭력성이다. 태일은 사채업자다. 받아야 할 돈을 100% 받을 수 있는 건 채무자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때이다. 부하들이 받지 못하는 채무를 쉽게 받을 수 있는 건 태일의 폭력적인 성향이 한 몫 한다.

하지만 태일은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자신의 폭력성을 철저하게 감추고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다. 일은 일일 뿐, 호정이 마음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해서 평소의 호전적인 성향을 드러내지 않고 호정이 마음의 문을 열어줄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채무를 받는 데 있어선 기다림이란 없는 사내가 사랑 앞에서는 기다림에 익숙해진다.

여자가 남자의 진심을 알아주고 남자에게 마음 문을 열기 전의 상황이라는 건 조폭이라는 직업군의 폭력성이 로맨스라는 달달함에 가라앉아 있을 때다. 태일의 직업이 사채업자라는 건 호정과의 사랑에 있어서 아름답고 정상적인 사랑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걸림돌이 될 것을 암시한다.

태일의 직업인 사채 받는 일이 호정의 빚을 갚아주면서 호정의 사랑을 연결하는 끈으로 작용하지만, 반면 호정과의 사랑이 익어가는 사랑의 숙성을 방해하는 장벽으로도 등장한다. 다른 보통 커플처럼 사랑을 성숙시켜 나아가기에는 사채업자라는 직업이, 아니 엄격하게 따져 보면 금전적인 유무가 사랑을 성숙하게 만드느냐 아니면 차갑게 식어버리게 만드느냐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채업자라는 직업이 사랑의 끈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걸림돌이 되는 이중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어찌 보면 태일의 비극은 영화가 갖는 장르성, 느와르라는 장르 안에 내포되어 있던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느와르는 사랑을 성숙하게 만들기보다는 사랑의 걸림돌, 나아가 사랑을 차디차게 만드는 데 익숙하니까 말이다. 느와르에 잠식당한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서는 데 있어서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사랑을 성숙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사채업자라는 태일의 직업은 사랑하는 여자와의 사랑에 있어 걸림돌이 된다. 아니, 어쩌면 태일이 사채업자라는 건 은유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성숙하게 만드는 비료 중 가장 중요한 비료는 돈이다. 곳간에서 나는 건 인심만이 아니다. 사랑도 곳간에서 나는 게 요즘 세상사니까. 돈은 태일과 호정을 묶어주면서 동시에 멀어지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만일 호정의 아버지가 돈이 있었다면 사채를 끌어 쓸 일이 없고, 그랬다면 태일과의 인연은 결코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태일이 호정과 사랑을 키우던 와중에 사채업자의 세상으로 다시 빠지는 핵심 요인 역시 돈이다. 돈은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호정과 태일의 사랑을 묶어주다가 풀어헤쳐버리고야 마는 양면성을 갖는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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