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자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도, <은하철도 999>나 <천년여왕> 같은 작품은 남녀노소 누구나 한 번쯤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아무리 애니메이션이나 원작 본편을 전부 보지 못했더라도 가수 김국환이 부른 동명의 주제가는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그 정도로 만화가 마츠모토 레이지(松本零士)의 작품은 시대와 국경을 뛰어 넘어 많은 독자들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는 거의 소개되지 못했지만,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은 몇 번이고 끊임없이 리메이크되고 재창작되고 있다. 1월 16일에 개봉한 <캡틴 하록>(수입 영화사 조은, 배급 박수엔터테인먼트) 역시 그렇게 제작된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캡틴 하록>은 최근 10년 사이에 제작된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 중에서 가장 최근에 공개된 작품이자, 오랜만에 한국에 소개되는 작품이다. 특히 <캡틴 하록>의 경우 2003년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을 연출하여 유명한 린 타로 감독의 <우주해적 캡틴 하록> 이후로 약 10여년 만에 제작되는 작품이어서 그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작비로 30억엔(약 300억원)을 쏟아 부었던 만큼 블록버스터적인 의미에서도 많은 흥미를 끌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공개된 실물은 상당히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일본에서 <캡틴 하록>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독수리 5형제>의 실사판과 더불어서 일본 현지에서도 무수한 혹평과 흥행 참패를 기록했던 작품이었다는 사실은 한국 개봉 전부터 알음알음 알려져 왔다. 작품은 오랜 시간 동안 <캡틴 하록> 시리즈의 속편을 기대한 이들은 물론 <캡틴 하록>에 대해서 잘 모르는 관객들에게도 실망을 주기에 충분한 품질을 지니고 있다.

분명 제작비 30억엔에 달하는 작품이지만 예산의 규모와 풀CG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작품의 그래픽 수준은 2000년대 초 전 세계적으로 개봉하여 혹평과 흥행 참패를 기록한 일본 스퀘어 에닉스 사의 인기 게임 시리즈 <파이널 판타지>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CG와 차이가 없어 보인다. 멀리서 CG를 비출 때의 모습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화면이 인물들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실망감은 짙어진다. 감정의 변화와 상관없이 캐릭터들의 표정은 변화가 거의 없으며, 캐릭터들이 움직이는 동작도 조금씩 어색한 느낌이 들고 만다. 작품의 클라이막스가 되어야 할 우주 전투 장면도 상당히 밋밋할 따름이다. 만약 2000년대 초반에 이 작품이 나왔으면 그럭저럭 좋은 평가를 들었을 것이나, 애석하게도 이 작품은 2013년에 거액을 들여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다.

그렇다고 스토리에 깊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캡틴 하록>은 약 백 년 전에 벌어졌던 전투와 관련되어 비밀을 지닌 ‘캡틴 하록’과 그를 감시하기 위해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가이아 위원회’의 스파이로 보내진 청년 ‘야마’, 그리고 야마의 형이자 애증의 관계를 지닌 ‘이즈라’ 간의 관계를 통해 서사를 전개한다. 하지만 스토리의 큰 축이 되어야 할 ‘야마’와 ‘이즈라’의 갈등은 SF보다는 TV용 드라마에 걸맞은 수준의 것이며, 작품 중후반부에 공개되는 하록의 비밀과 고뇌 역시 관객들을 납득시키기엔 상당히 곤란한 수준이다. 게다가 작품에서 악의 축으로 설정된 가이아 위원회의 행동도 상식 밖의 모습만을 보이면서 작품은 중심축을 잡지 못하고 걷잡을 수 없이 표류하고 만다.

또한 한국 개봉판의 경우 더빙에서조차도 심각한 문제를 보이고 만다. 남도형, 성완경 등 전문 성우들로 구성된 조연진의 연기는 괜찮지만 주연진 세 명의 경우 캐릭터 해석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애매한 목소리 연기를 구사하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 ‘캡틴 하록’을 맡은 배우 류승룡의 목소리는 중년의 느낌이 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을 잡을 수가 없으며, 성우 서유리가 담당한 캐릭터 ‘케이’ 역시 단순히 천방지축 아가씨라는 인상만을 심게 만든다. 특히 배우 김보성이 맡은 캐릭터 ‘야타란’이 제일 심각하다. 캡틴 하록의 곁에서 충실하게 감초 역할을 수행해야 할 캐릭터에 김보성의 목소리가 합쳐지는 순간, 목소리가 뭉개져서 대사 전달이 안 되는 것은 물론 마치 한국 조폭 코미디에 나올 것 같은 인상으로 전락한다.

대체 도에이 애니메이션은 이렇게 처참한 수준의 <캡틴 하록>으로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애초에 감독으로 무수한 혹평을 들어왔던 <애플시드> 시리즈의 아라마키 신지를, 각본에 한일 양국에서 숱한 논란을 빚어온 소설 <종전의 로렐라이> <망국의 이지스>로 알려진 후쿠이 하로토시를 기용했을 때부터 작품이 어떻게 굴러갈지는 이미 결과가 정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도에이 애니메이션은 <원피스>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비롯해 인기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계속 보유하고 작품을 내놓고 있지만, <캡틴 하록>을 비롯해 거액의 자본을 투자한 애니메이션에서는 실망스러운 성과만을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에서는 2013년에서야 개봉한 데즈카 오사무의 동명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2011년 작품 <붓다 : 싯다르타 왕자의 모험>은 10억엔(약 100억원)을 들여서 만들었지만 <캡틴 하록>처럼 흥행과 비평 모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었다. 외견적인 작품의 제작 규모는 커졌지만, 정작 그 안에 담긴 내용과 기술은 오히려 발전 대신 퇴보만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캡틴 하록>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영화-애니메이션계가 놓인 상황을 매우 극명하게 보여주는 반면교사적 작품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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