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티스트는 픽업아티스트다.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든 아티스트는 픽업아티스트지만 모든 픽업아티스트가 아티스트는 아니라는 말이다. 직업으로서의 ‘픽업아티스트’라면 두 말 할 것도 없다. 혹자는 그것을 창조 경제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지만, 고작해야 그들은 자기 자신의 밥벌이를 창조할 뿐이다.

예술의 역사는 곧 여성을 유혹하기 위한 남성들의 ‘창조적’ 노력의 역사다. 여자들의 호감을 사기 위한 고군분투가 예술사를 만들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군분투의 결과물이라고 해야겠지만. 아트와 ‘픽업아트’는 본디 하나였다. 미안하다. 나는 지금 여성을 주체가 아닌 대상의 자리에 놓고 있다. 하지만 역사가 그따위인 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인간 역사를 통틀어 공개적으로 과시된 미술들의 거의 전부가 성적으로 성숙한 남자들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사실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뭔가에 대한 선호가 존재할 때, 이러한 선호를 섹스 파트너를 유혹하는 데 이용하려는 동기는 남자 쪽이 훨씬 강하다. 미술 창작능력을 문화적 발명품이 아니라 수천 세대에 걸쳐 진화한 진정한 생물학적 적응으로 단정하는 것은 온당해 보인다. (제프리 밀러, <연애>(김명주 옮김, 동녘사이언스) 366쪽)
▲ 라스코 동굴벽화 (부분)(발기한 성기를 주목할 것)
인류 최고(最古)의 예술품중 하나인 라스코 동굴벽화를 보자. 황소, 사슴, 멧돼지, 코뿔소 같은 야생동물들이 있고 샤먼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있다. 교과서에서야 사냥의 성공을 비는 주술적 의미 운운하지만 그건 차라리 이런 뜻이다 : “레이디, 날이 밝는 대로 내가 당신을 위해 저것들을 잡아 오겠소(당신이 나와 함께 오늘밤을 보낸다면 말이지만).”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또 어떤가.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는 한 여인의 조각상은 지금까지 풍요를 비는 주술적인 의미로, 다산의 상징으로 알려져 왔지만 그건 평론가들의 고담준론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늦은 밤, 알 수 없는 충동이 빚은 작품을 쓰다듬으며 고대의 털북숭이 예술가가 홀로 중얼거린다 : “나의 불꽃, 나의 생명, 나의 비너스! 도대체 당신은 언제까지 내 마음을 외면할 작정인 거요? 오늘 나는 당신을 그리며 이런 걸 만들었소. 내일이면 당신도 알게 되겠지. 당신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보고 싶구려(그리고 당신의 몸도).”
문학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누군가는 운문의 기원이 경전이라 했다. 아니, 법전이라고 했던가? 모르겠다. 우리는 박식함이 더는 섹시하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고, 정확한 인용을 위해 수고할 마음이 내게는 없다. 어차피 경전이나 법전이나 ‘픽업’의 관점에서는 매한가지다. 록스타 못잖은 인기를 자랑하는 유명 종교인이나 결혼정보회사의 1등급 신랑감인 판검사를 떠올려보라. 사제복이나 법복을 향한 ‘제복 판타지’를 떠올려도 좋다. 말하자면 고대의 시인은 언어로 만들어진 제복을 걸치고 있던 셈이다. 그러니 누군들 시를 쓰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모든 사람이 시인이 될 수는 없는 법. 시인을 추방하고 철인정치를 해야 한다고 목 놓아 외치던 플라톤의 절규를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산문, 다시 말해 소설에 대해서는 조금 긴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먹어 주는fuckable’ 픽업아티스트였던 소설가들은 인터넷의 발달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한물간 신세가 되었고, 이는 소설이라는 예술 형식의 기반을 뒤흔들었다. 소위 말하는 소설의 위기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애당초 극복할 필요가 있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소설가들의 스마트폰에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여성 회원이 많은 ‘데이팅 앱’을 깔아준다면 그들의 삶이 조금은 나아질 거라는 사실은 장담할 수 있다. 문인을 위한 복지 정책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음악에 대해서라면, 글쎄, 나는 앞서 이미 ‘록스타’라고 말했고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록스타가 있다. 또래의 여자아이들을 꼬시기 위해서 음악을 시작했다고 말하는 솔직한 록스타와 그 사실을 숨기는 새침한 록스타. 그게 전부다.
섹스에 대한 기대가 없는 곳에 ‘아트’는 성립하지 않는다. 무성생식이 가능했다면 예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웠겠지. 그것이 바로 모든 ‘아트’가 ‘픽업아트’인 이유고, 모든 ‘아티스트’가 ‘픽업아티스트’인 이유다.
사사키 아타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예술에 의해 만들어졌고, 우리는 예술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예술을 펼칠 것이다. 고로 우리가 작품을 만드는 작업은 우리 아이들과 우리 부모를 동시에 구원한다. 이는 우리 부모들이 좋은 예술을 갖고 있으며,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예술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버팀목도 없는, 실로 위험천만한, 어떤 보증도 바랄 수 없는 도박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 (<이 치열한 무력을>(안천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181쪽)
문화체육관광부보다는 차라리 보건복지부에 어울리는 그의 주장을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 우리를 만든 부모님의 행위가 예술(=픽업의 예술)이고, 우리가 아이들을 만드는 것도 예술이다. 아이를 낳는 게 부모님께 효도(=부모님을 구원)하는 거다. 그것은 우리 부모들이 좋은 예술(이때 예술은 유전자를 뜻하고,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 살펴볼 것이다)을 가지고 있고 우리 또한 그렇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버팀목도 없는, 실로 위험천만한, 어떤 보증도 바랄 수 없는 도박이다(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사회에서 양육비는 어떻게 충당할 것이며, 그렇게 키운 자식이 작가나 프리랜서 혹은 비렁뱅이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그저 ‘픽업아티스트’가 되는 수밖에).
도대체 왜?
데이비드 실즈는 우리 모두가 “세포들의 생명을 전달해주는 매개동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주기 위함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결국 예술이란 생존(=번식)을 위한 유전자의 특정한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죽고, 유전자는 살아남는다. 개개의 인간은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원나잇’(정확히 말하자면 ‘원라이프’ 상대라고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유전자의 입장에서 우리의 생애는 하룻밤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상대에 불과하다. 우리의 유전자가 바로 픽업아티스트인 것이다! 유전자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를 충동할 뿐. 유전자는 당신을 속이고, 이용하며 끝내는 헌신짝처럼 내던진다. 나쁜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그것이 빌어먹을 진화심리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리처드 도킨스 또한 <이기적인 유전자>를 통해 유전자의 추악한 실상을 폭로한 바 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술과 ‘픽업 아트’를 분리된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간단한 대답은 ‘밥벌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연애에도 매뉴얼이 필요한 시대를 위한 니치 비즈니스로서의 ‘픽업 아트’다.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종의 특화된 자기계발인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기계발 강사들이 그렇듯, 그들은 스스로를 ‘계발’할 수 없다. 그들의 성공은 오직 당신의 수강신청(혹은 도서구입)에 달려 있다. 그러니 아무런 관심도 주지 말고 스스로 망하게 내버려두시라.
두 번째 대답은 조금 복잡하다. ‘픽업 아트’를 예술의 나무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가지로 바라보는 것이다. 지루하고 상투적인 기존 예술의 패러다임에 반발했던 초현실주의 운동과 같은 새로운 예술 사조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초현실주의의 주창자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초현실주의. 남성 명사. 순수 상태의 심리적 자동운동으로, 사고의 실제 작용을, 때로는 구두로, 때로는 필기로, 때로는 여타의 모든 수단으로, 표현하기를 꾀하는 방법이 된다. 이성이 행사하는 모든 통제가 부재하는 가운데, 미학적이거나 도덕적인 모든 배려에서 벗어난, 사고의 받아쓰기. (<초현실주의 선언>(황현산 옮김, 미메시스 펴냄) 89쪽)
우리는 그의 정의에서 단지 하나의 단어를 추가함으로써 픽업 아트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픽업 아트. 남성 명사. 순수 상태의 심리적 자동운동으로, 사고의 실제 작용을, 때로는 구두로, 때로는 필기로, 때로는 여타의 모든 수단으로, 표현하기를 꾀하는 방법이 된다. 이성이 행사하는 모든 통제가 부재하는 가운데, 미학적이거나 도덕적인 모든 배려에서 벗어난, 사고의 받아쓰기. 혹은 껄떡거림.
이제 기묘한 전도가 발생한다. 앞서 나는 직업으로서의 픽업아티스트는 결코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위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픽업아티스트야말로 진정한 아티스트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나아가 해야 할 것만 같은 공간이 열리기 때문이다.
가령, 아래와 같은 ‘픽업 아티스트 교재’를 보라.
▲ 픽업아티스트 교재 (출처: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817675)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는다. 현실이 여성과는 아무 연관성이 없고, 일반적인 남성의 염치의 한계마저 훌쩍 뛰어넘는 위와 같은 ‘기술’(art 혹은 écriture)이야말로 브루통이 주장했던 ‘자동기술écriture automatique’에 다름 아니다.
사실주의 또는 현실주의가 현실의 무거운 조건들을 파헤쳐 그 두터움에서 어떤 깊이를 발견하려 한다면,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상상해냄으로써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정신을 해방하려 한다.(황현산, ‘역자 해설’, <초현실주의 선언> 10쪽)
픽업 아티스트의 일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이성이며 염치며 ‘스펙’ 같은 것은 모두 던져버리고, 자신들이 습득한 모종의 기술(=자동기술)로 모든 여자를 유혹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정신을 해방하려 하는 것이다. “강력한 정신의 힘을 확보하여, 현실에 구애되지 않는 전면적인 정신의 자유를 확보”(14쪽)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하나의 문제가 있다. 벌써 한 세기 전에 유행했던 사조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예술이 성립하지 않는다. 예술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세 번째 대답이 등장한다. ‘픽업 아트’란 다름 아닌, 이미 자본에 종속되어버린 기존의 예술 전체를 비웃는 일종의 패러디, 혹은 메타 담론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이때 초현실주의는 조롱을 위해 그들이 이용하는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적절한 방법론으로 보인다.
이때 ‘픽업 아트’는 엘리트주의적인 예술이 된다. 그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이를 소외시킨다. 그들은 기존의 예술을 애호하는 사람들과 (당연한 상식으로) ‘픽업 아티스트’를 비웃는 사람들과 ‘픽업 아티스트’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 모두를 비웃는다. 그리고 돈을 챙긴다. 과연, 완벽한 예술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지루한 예술 논쟁을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다만 누군가 픽업의 기술을 ‘진정으로’ 필요로 한다면, 마치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듯 그렇게 찾는다면, 픽업 아티스트를 찾는 대신 (아트와 픽업으로서의 아트 모두에) 성공한 예술가의 사례를 살펴보라고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픽업 아티스트 교재를 읽는 대신 몇 편의 소설을 읽는 게 낫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 경우, 나는 로맹 가리보다 나은 작가를 알지 못한다.
(* 픽업 아트의 모든 것 : (2) 실천 편에 계속…)

금정연

이런저런 매체에 책에 관한 글(90%)과 책에 관한 글이 아닌 글(10%)을 납품하고 있는 소규모 자영업자이자 LG 트윈스팬. 지은 책으로 <서서비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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