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책 한권을 읽게 되었다. 발행날짜가 2013년 12월 24일인 이 책의 제목은 <이 사람을 보라>(원제는 “Behold the Man”. 마이클 무어콕 지음, 최용준 옮김, 시공사). 요한 복음서 19장 5절에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로마의 총독 본시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가 로마군인에 의해 고난을 겪는 예수를 가리켜 했던 말이다. 빌라도가 한 이 말은 라틴어로 “에케 호모”(Ecce Homo)인데 이것을 제목으로 삼은 성화(聖畵)가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그 많은 에케 호모들 중에는 할머니가 함부로 손을 대어 엉망으로 훼손된,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화제가 된 스페인 보르하 시의 산투아리오 데 미제리코르디아 성당의 에케 호모도 있다.

니체의 저작 이름이기도 한 “이 사람을 보라”는 1960년대에 마이클 무어콕이라는 영국 작가의 손에 의해 SF로 거듭났다. 1939년에 태어나 수 많은 SF와 판타지 소설을 쓴 마이클 무어콕은 영미 SF, 판타지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국내에는 <이 사람을 보라>가 최초로 번역된 그의 장편이다. 이전에는 그의 단편들이 SF단편선에 간간히 소개되었을 뿐이다. 주로 검과 마법을 소재로 삼은 판타지의 대가로 알려진 마이클 무어콕이지만 국내에는 예수를 소재로 삼은 이 작품 <이 사람을 보라>가 먼저 소개되었다.
예수의 위상과 영향력에 대해서는 굳이 길게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종교를 넘어서 갖은 분야에서 언급되는 예수는 외계인과 엮인 신흥종교에도 등장하고 SF 소설에도 종종 등장한다. 예수뿐 아니라 성서라는 고대 텍스트의 모호함은 의외로 SF소설과 잘 맞아떨어진다. 과학(Science)이 아니라 어떤 가설을 말이 되도록 이리저리 궁리하여 이야기로 풀어내는 사변(Speculative)라는 측면에서. 마이클 무어콕의 <이 사람을 보라>는 그렇게 성서와 예수를 소재로 삼은 SF소설들 중 대표격인 작품이다.
H.G. 웰즈의 <타임머신>부터 <닥터후>의 타디스를 보유한 시간여행의 종주국(?) 영국답게 영국 작가 마이클 무어콕은 1970년을 살고 있는 영국 청년 칼 글로거를 서기 28년의 이스라엘로 보낸다. 칼 글로거가 자신의 목숨까지 담보로 잡고 감행한 시간여행의 목적은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 그 존재조차 도전받고 있던 역사 속 예수를 직접 만나보는 것. 그런데 칼 글로거는 왜 예수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하는가. <이 사람을 보라>가 공들여 묘사한 칼 글로거의 유년시절과 성장기 속에 그 단서가 있다.
칼은 집의 모든 가스 불을 켜놓았고, 어머니가 직장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모든 것을 준비해두었다.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열려 있는 방문으로 걸어오기 직전, 칼은 거실 벽난로 앞에 누웠다.
집에 들어온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칼을 안아 들어 소파에 눕혔고, 1층의 모든 창문을 깬 다음 불을 끄고 의사에게 전화를 했다.
의사가 왔을 때, 어머니는 이야기를 꾸며 말했다. 사고라고 했다. 하지만 의사는 진실을 아는 듯했다. 의사는 칼에게 별로 측은함을 느끼지 않았다.
“넌 주목받기를 좋아하는구나, 꼬마야.” 칼의 어머니가 방을 나갔을 때 의사가 말했다. “내 의견을 말하자면, 넌 참 주목받기를 좋아해.”
칼은 울음을 터트렸다. (57~58p)

칼은 청소년 시절부터 편두통으로 고생을 했다. 현기증을 느꼈고, 구토를 했으며, 너무나 고통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편두통이 엄습한 동안 칼은 자신이 다른 존재가 된 척하기 시작했다. 책에서 읽은 등장인물 또는 현재 뉴스의 화제가 되는 정치가, 또는 만약 최근에 전기를 읽었다면 거기에 나오는 역사 속 인물이 되었다고 가정했다. (113~114p)
유년기의 애정결핍으로 인해 비대해진 자아를 갖게 된 청년 칼은 타인에게 꾸준한 관심을 요구한다. 타인에게 관심을 요구하는 방식은 지나친 자기애와 자기혐오를 드러내는 것으로 나타나고 어떤 사람들은 칼의 그런 관심병을 간파하고 지적한다.
“왜 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보이는 걸까요, 제라드? 전 단지 제가 누구인지 모를 뿐이에요. 저는 어떤 부류의 사람일까요, 제라드? 전 뭐가 잘못된 거죠?”
“자넨 아마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게 너무 열심인 것 같아, 칼.” (100p)

“네가 사물을 직면한다고 해도 크게 잘못될 건 없어. 넌 그냥 자기애가 과도할 뿐이야.”
“어떤 사람은 내가 자기혐오가 너무 심하다고 했는데……”
“여하튼 자기 자신에 너무 집착하는 거지.” (117p)
칼의 이런 자기애는 유년기를 형성하고 장악했던 종교, 기독교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교회와 성직자에게 얻은 유년시절의 상처는 그를 반기독교적인 입장에 세웠지만 스스로 뛰쳐나온 교회 바깥에서 오히려 그는 인간 예수와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기성 교회가 주입해온 예수에 대한 시각을 배제한 자신만의 예수 찾기에 몰입하는 원동력은 역시 그의 강력한 자아다. 그는 성서 속 예수의 고난을 자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겪는 외로움과 동일시 한다.
위대한 개인주의자들은 외로워야만 해.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무적이라고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어. 결국 위대한 개인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푸대접을 받아. 존재하지 않는 무엇인가의 상징으로 대접받아. 위대한 개인주의자들은 외로워야만 해.
외로워…..
세상에는 외로워야 할 이유가 언제나 있어. (93p)
이렇게 수시로 지나친 자기혐오와 자기애를 오가는 칼은 그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많은 실패를 겪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예민함과 감성에 끌려 다가왔다가 변덕스러운 자기애와 자기혐오의 반복에 질려 그를 떠난다. 개중에는 칼의 불안정함을 연민과 모성애로 감싸 안으려 노력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쁜 남자 칼은 오히려 그런 노력을 매몰차게 내치고 결국 후회하는 찌질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에게 가혹한 연인 모니카에게 집착하게 된다. 열 살 연상의 정신과사회복지사 모니카는 심리학자가 되고자 했던 칼을 사로잡지만 모니카는 칼의 예수에 대한 시각을 하찮게만 여길 뿐이다.
“하지만 뭐가 먼저일까? 그리스도라는 개념일가 아니면 그 존재일까?"
모니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존재가 먼저겠지. 순서가 중요하다면 말이야. 예수는 로마에 대항해 반란군을 조직하던 유대 골칫덩어리였지. 그 대가로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게 우리가 아는 전부고, 또한 알아야 할 전부야.”
“위대한 종교가 그렇게 간단히 시작될 수는 없는 법이야.”
“필요하기만 하면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시작점에서도 훌륭한 종교를 만들어낼 수 있어.”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모니카.” 칼은 열심히 손짓을 해대며 자기 뜻을 표현했고, 그 때문에 모니카는 살짝 뒤로 몸을 비켰다.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이 ‘존재’보다 앞섰단 말이야.”
“오, 칼, 말도 안 돼. ‘예수’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개념에 앞섰어.” (105~106p)
예수라는 인물이 실존했는지조차 의문이라고 칼의 예수에 대한 시각과 집착을 교정하려 애쓰는 모니카의 시각은 <사해문서> 및 여러 사료들의 발굴을 통해 제기된 역사 속의 예수, 인간 예수에 대한 의문을 담고 있다. 한때 인터넷에서 입소문을 탔던 타큐멘터리 <시대정신>과 유사한 시각이다. 때문에 모니카와 칼은 수시로 논쟁을 벌이게 된다.
“당시 갈릴리에는 구세주라고 불리던 이가 수십 명이 있었어. 예수도 그런 구세주 가운데 하나였지만 역사와 우연으로 인해 그 신비와 철학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뿐이야….”
“아니, 단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 거야, 모니카.” (194p)

넌 기독교라는 게 마치 예수의 죽음에서 복음서가 쓰였던 그 몇 년 사이에 나타나 발전한 거라고 오해하고 있어. 하지만 기독교는 새로운 게 아니야. 단지 이름만 새것일 뿐이야. 기독교는 서양 논리와 동양의 신비주의가 만나 상호 교배하고 변성되는 장을 제공했을 뿐이야. 지난 세월 동안 그 종교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시대에 맞춰 자신을 어떻게 재해석해왔는지를 살펴봐… (107~108p)
종교와 예수에 대한 판이하게 다른 견해에도 불구하고 칼은 모니카와 관계를 유지하지만 결국 자기혐오와 자기사랑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칼의 자기애에 지친 모니카는 다른 인연을 찾는다. 실연당한 칼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거절하던 시간여행 제의를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서기 28년의 이스라엘. 칼은 성서 속 인물인 세례자 요한을 만난다.
“요한, 티베리우스가 로마를 얼마나 다스렸느니 혹시 아나요?” 글로거는 지금까지 이 질문을 할 기회가 없었다.
“14년이오.”
그렇가면 서기 28년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던 예수의 십자가형까지 1년이 채 남지 않을 때로, 글로거의 타임머신이 바로 이 시기에 부서진 것이었다.
이제 세례자 요한은 정복자 로마에 대항해 무장 봉기를 계획하고 있었지만 만약 복음서 내용을 그대로 밑는다면 곧 헤롯에 의해 목이 잘릴 터였다. 이 당시에 대규모 반란은 분명히 일어나지 않았다. (81p)
글로거는 세례자 요한을 생각하면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지도자가 떠올랐다. 강인함과 상황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 면에서 레지스탕스 지도자와 비슷했다. 요한은 자기 나라에 주둔한 로마군을 물리칠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만약 반란을 오래 끌게 되면 로마는 반란군을 물리칠 충분한 병력을 예루살렘에 보낼 터였다. (82p)
세례자 요한을 만난 칼은 당연히 예수와의 만남을 기대한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도 그를 받아들인 에세네파도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 뿐이다. 서기 28년인데도. 이대로 예수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모니카가 칼을 좌절시켰던 "예수가 존재하고 그리스도라는 개념이 나왔다"는 말도 차라리 희망적이게 된다. 예수란 사람이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칼은 당황한다. 이 와중에 요한은 시간여행자 칼에게 비상한 관심과 기대를 보여준다. 에네세파가 기다려온 구세주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왜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거요, 임마누엘? 나는 당신이 아도나이의 사자임을 알고 있소. 당신은 에세네파가 찾던 신호요. 때가 거의 다 되었소. 하늘의 왕국이 가까워졌소. 우리와 함께 합시다. 사람들에게 당신이 아도나이의 목소리로 말한다는 사실을 알리시오. 위대한 기적을 행하시오.”
“당신의 힘이 줄고 있는 거군요?” 글로거가 날카로운 눈으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따르는 반군들에게 다시 희망을 품게 하기 위해 제가 필요한 건가요?”
“당신은 마치 로마인처럼 말하는구려. 어찌 그리 투박하게 말한단 말이오!” (83p)
“내 부하들이 당신을 보았소! 공중에서 갑자기 빛나는 물체가 나타나더니 깨어지면서 그 안에서 당신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했소. 그게 마법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당신이 입었던 옷이 지상에서 입는 옷이란 말이오? 전차 안에 있던 부적들은 또 다 뭐요? 그 모든 것이 당신의 강력한 마법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면 뭐란 말이오? 예언에 따르면, 마법사가 이집트에서 올 것이며 임마누엘이라 불린다 했소. <미가서>에 그렇게 적혀 있단 말이오! 내가 지금 한 말 가운데 단 하나라도 참이 아닌 것이 있소?”
“거의 전부가 틀립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전 모두….” 글로거는 ‘이성적’이라는 단어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말을 멈췄다.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당신들과 마찬가지로요. 저에게는 기적을 일으킬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단지 인간일 뿐입니다!”
요한이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나를 돕지 않겠다는 뜻이오?”
“저는 당신과 에세네파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죽을 뻔한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만약 제가 보답할 방법이 있다면…..”
요한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답할 수 있소, 임마누엘.”
“어떻게 말입니까?”
“내가 원하는 위대한 마법사가 되어주시오. 조급해 하면서 아도나이의 뜻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 앞에 당신을 내세울 수 있도록 해주시오. 당신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왔는지 내가 사람들에게 말하게 해주시오. 그리고 당신은 이 모든 것이 아도나이의 뜻이며 우리는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해주시오.” (84~85p)
아직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시점에서 세레자 요한과 에세네파 사람들은 자신을 구세주라 믿고 해야 할 일을 다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1970년에서 온 시간여행자 칼은 당연히 자신이 구세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요한과 에세네파 사람들의 오해를 가라앉히려 노력한다. 그리고 실존하는 예수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칼의 오랜 기질인 외로움과 관심받고 싶은 욕망이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 점점 자라난다. 예수에 대한 칼의 탐색은 이렇게 그의 안팎에서 병행된다.
칼의 노력에 의해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역사 속에 온전히 보존되지만 시간여행자 칼의 본질은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관심병 환자이기이에 그의 노력과 결말은 독실한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라도 인간 예수에 대한 존경을 갖은 이들에게도 불쾌함을 불러 일으킬만 하다. 작품이 발표되었을 당시 작가는 독실한 신자로부터 살해협박을 받았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예수에 대한 칼의 탐색과 그 성과는 딱히 신자가 아니어도 심지어 에수에 대한 별다른 감흥이 없는 사람에게도 사람에 따라서는 불쾌한 농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이 불쾌할 수도 있는 농담을 유쾌하게 즐길 만한 변태(?)들도 떠오른다.
찌질한 내면을 계속 드러내는 주인공에게 끝까지 동정을 두지 않는 서사와 인류를 구원하는 위대한 구세주의 서사가 얽히고 섥히는 과정은 신으로서의 예수를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인간 예수, 역사 속 예수를 탐색해본 이들에게 자신의 탐색을 돌아보게 하고 쓴웃음을 짓게 할 만하다. 구립도서관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전집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만 빼놓고 전부 구비되어있는 것을 보고 신청하여 결국 서가에 꽂힌 그 책을 보았을 때 승리감을 맛보았던 내 모습도 겹쳐 보인다.
이 SF 소설에서 신학적인 깊이와 감동은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바란다. 다만 서기 28년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대해도 좋다. 그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 되어 <이 사람을 보라>는 서사의 개연성과 핍진성을 갖추게 된다. 성서 역시 적절한 타이밍에 투입되어 칼의 탐색과 노력을 그럴 듯하게 만들어 준다. 블랙코미디치고는 세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 소설을 하나의 기준으로 잡고 어디까지가 학계에서 어느정도 인정된 역사적 배경인지 그리고 어디까지가 작가 개인의 SF적 상상력인지를 가늠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지점이다.
<이 사람을 보라>는 세계 어디보다 기독교가 오랫동안 종교적 헤게모니를 쥐었던 서구에서 반기독교와 탈기독교를 넘어서 SF와 잘 들어맞는 사변적 유희의 도구로서 기독교를 사용한 사례다. 기독교뿐 아니라 여타 종교에 대한 신성한 가치를 부여하는 이들에게는 불쾌하고 불경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개인의 신앙이나 종교에 대한 시각과는 별개로 SF 소설의 테두리 안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신성한 서사들도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다. 심지어 코미디인지도 긴가민가할 정도로 어둡고 암울한 영국식 블랙 코미디로도. 도저히 봉합이 어려워보이는 이 두 가지 서사가 하나로 결합된 아귀들은 기가 막히고 재치가 폭발한다.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은 슬쩍 감추거나 생략하고 넘어가고 잘 맞아떨어지는 곳은 더더욱 세심히 공들여 돋보이게 하는 재주는 “거짓의 예술인 소설은 어떻게 해야 탁월해지는가”를 제대로 보여준다. 이런 거짓말이라면 기꺼이 거짓말이란 것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는 것이 제대로 즐기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가 불쾌하고 불경한 껍질을 두른 유쾌한 거짓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소설에는 일말의 진정성이 담겨있다. 작가 마이클 무어콕이 겪었던 젊은 시절의 방황은 이 소설에 일정부분 담겨 있다. 편두통에 시달렸던 칼처럼 1939년생인 마이클 무어콕 역시 젊은 시절 내내 원인모를 편두통에 시달렸다. 그는 이 편두통의 원인을 심리적 요인이라 생각하고 평생 떠안고 살았다. 하지만 의학의 발달을 통해 1980년대에 니코틴으로 인한 반작용임을 알게 되었고 니코틴을 멀리하면서 두통은 사라졌다. <이 사람을 보라>를 탄생시킨 편두통의 전말이 조금 허망하기는 하지만 이런 허무함도 영국식 블랙 코미디와 맥락이 맞아떨어진다.
2014년 현재 일흔 네살인 마이클 무어콕은 여전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2010년에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영국 SF 드라마의 전설인 <닥터 후>의 주인공이 대결하는 소설 <The Coming of the Terraphiles>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BBC에서출간된 공식 닥터 후 프랜차이즈 소설이다. <이 사람을 보라>를 통해 그동안 영미권 SF, 판타지 독자들 사이에서 이제는 대가로 추앙받아 왔지만 국내에서는 오직 소수에서만 회자되었던 마이클 무어콕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최원택

드라마 잡지 <드라마틱>과 장르소설 잡지 <판타스틱>의 기자를 거쳐 책 만드는 일을 하다가 곧 자유낙하가 멀지 않은 자유기고가가 되었다. 허영에 휘둘려 책장을 넘기고 마우스를 클릭하다가 깜냥을 확인하는 것도 우직하게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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