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이슈가 지나가는 것이 한국 사회다.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했던 15곳 학교 중 14곳이 시민들의 항의에 밀려 교과서를 변경했는가 하면, 프로게이머에서 방송인으로 저변을 넓힌 홍진호는 ‘일베’ 논란에 시달린다.

8일자 <한겨레> 5면 기사는 <보수가 10년 공들인 ‘역사 전쟁’…시민 상식 앞에 참패>라는 제목으로 시민들의 힘이 교학사 교과서를 저지한 상황을 고무적으로 기술했다. 물론 교학사 교과서는 워낙 수준 이하였고, 그럼에도 교육부 측의 ‘편파판정’과 보수성향 교장들의 ‘외압’으로 채택되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반발이 최후의 보루인 상황이기는 했다.
▲ 8일자 한겨레 5면 기사
그러나 언론의 입장으로는 시민적 상식에 의한 심판에 단순히 환호하기보다는 사태에 대한 다른 접근을 고민했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언론의 역할은 시민적 상식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건강하고 깊이 있게 만드는 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학사 교과서 문제야 앞서 말했듯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사정이 있지만, 여전히 개혁성향 지지자들이 정치적 반대자들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극단적인 편가르기나 배제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이는 연예인들의 ‘일베’ 코드를 꼬투리삼아 그들의 인격을 폄하하는 행태에서도 드러난다.
‘홍진호 사건’은 그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프로게이머였다가 방송인이 된 홍진호가 ‘일베’를 하면서 굳이 영화 <변호인>을 감상하고, 굳이 그에 대한 감상을 트위터에 올리며, 굳이 ‘일베’ 용어를 섞었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그런데도 ‘찌릉찌릉’이 ‘일베’에서 사용하는 지역차별 용어라는 주장이 일부 커뮤니티에 퍼지자 홍진호는 해명해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많은 이들이 ‘찌릉찌릉’은 ‘일베’ 용어조차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해명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논란이 생기자 언론들은 조회수를 챙기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어 기사를 양산하기 시작했고 논란을 증폭시켰다.
홍진호가 ‘일베’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무엇인지 알게 되니 엮이기도 싫다는 수준의 해명을 하자 사태는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다. 일부 누리꾼들은 그가 몇 년 전 ‘민주화’를 부정적인 의미로 몇 번 사용하다가 사과한 전력을 다시 끌어냈다. “전력이 있으니 ‘일베’로 의심 받을 만하다”라거나 “설령 ‘일베’를 안 하더라도 ‘민주화’란 말을 그런 식으로 사용한 건 무식의 소치이니 논란의 대상이 되거나 비판받는 걸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타났다. 전효성의 사례를 언급하며 “홍진호가 이렇게밖에 안 까이면 전효성이 억울하지 않느냐. 홍진호 ‘쉴드’치는 거 불쾌하다”는 반응도 나왔다.
▲ tvN의 게임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더 지니어스 시즌2'에 출연하는 전직 프로게이머 임요환과 홍진호의 모습. (연합뉴스)
먼저, 전효성에 대한 누리꾼들의 비판도 정상적인 수위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사건의 경우 소속사와 연예인이 초기 대응을 잘못하여 문제가 확산된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름 뒤에 ‘벌레’를 붙이거나 성추행적 수사를 만들어내고 유통한 일까지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일베’의 패륜성 중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여성혐오와 지역비하일 텐데, 여성혐오를 버젓이 전시하며 ‘일베’하는 연예인(이라고 알려진 이)을 비난하는 것은 무슨 상황일까. 물론 그런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그 연예인의 양식 없음을 제대로 비판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개개인의 책임과는 별개로 인터넷에서의 상황은 전체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일베’ 코드라는 것이 ‘일베’ 식별에 애쓰는 누리꾼들의 생각처럼 확증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일베’에서 사용되는 많은 방언들은 과거 디시인사이드나 이글루스 등 많은 사이트에서 생성된 것이며 처음 생겨날 때에는 지금 정도로 심각한 의미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또 ‘일베’에서의 용법이 정착된 후에도 게임커뮤니티와 같은 곳에 흘러 들어가 그 용례의 의미를 모르는 채 따라하게 된 상황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 연예인이 ‘일베’와 같은 정치성향이나 세계관을 표출한 것도 아닌데 단어 한두 개로 단정하는 것은 소모적인 논의가 될 뿐이다.
‘민주화’를 ‘획일화시키다’나 ‘왕따’와 같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세태도 마찬가지다. 바람직하지 못한 조류이나 사람들을 비난만 할 게 아니라, 그 단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데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동의한 이유도 생각해봐야 한다. ‘일베’에는 패륜적 행태, 사실에 어긋나고 균형잡히지 않은 역사관, 모종의 정치의식 등이 어지러이 섞여 있는데, 이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이중 일부만 가지고 있으면 ‘벌레’ 취급하는 것은 얼마나 ‘민주적’인 일일까.
물론 독재정권을 지지한 전력이 있는 산업화세력도 극단적인 편가르기와 배제의 논리를 작동시키기는 마찬가지다. 야권 정치인이나 지지자들을 툭하면 ‘종북’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응이 비슷한 수준이어서는 곤란하다. 지지자들도 주의해야 하지만, 언론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교학사 교과서가 대단히 한심한 수준이지만 뉴라이트 운동 십년을 모조리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매도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뉴라이트 내부의 상이한 결을 구별하지 못하고 모조리 일본 극우파와 비슷한 이들로 취급하고 식민지근대화론 자체를 일본 식민통치에 보은하자는 논리로 이해하는 것이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일 것인가. 저들이 ‘민족’만 나오면 김일성주의를 의심한다면, 이쪽은 ‘근대’만 나오면 일본 극우파를 의심했던 것은 아닌가.
비록 동의하진 못할지라도 민족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뉴라이트 논의의 일부 타당한 부분은 받아들이고 나머지를 비판하면서 넘어서야, 진보담론도 전진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한겨레>의 보도에선 그러한 지점에 대한 고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시민적 상식이 우리 편에 있다는 환호만으로 사태파악을 끝낸다면, 양 진영이 대화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들고 ‘홍진호 사건’ 같은 극단적인 사례들만 축적되게 된다. 원칙의 문제야 그렇다 치더라도, 과연 이런 식의 관성적 대응을 반복하며 차기 정권은 가져올 수 있는 걸까. 야권에선 2004년 뉴라이트를 탄생시켰던 보수세력의 절박함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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