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 시작해보자. 『혁명의 영점』(원제: Revolution at Point Zero)은 어디인가? 부제로 붙은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 아마도 이곳이다. 재생산노동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장 귀중한 상품인 노동력을 생산”하고 있고, 대부분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으며, 가사노동은 이것의 대표적인 형태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것이 바로 여성들의 재생산노동이기 때문에, 혁명의 영점도 바로 그곳이어야 하는 것이다. 즉 혁명의 영점은 자본주의의 영점이기도 하다. 때문에 재생산노동을 멈추면, 자본주의도 멈출 것이고, 재생산노동을 새롭게 조직하면 새로운 사회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재생산노동은 혁명의 영점이다. 그렇다면 왜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인가?

저자인 실비아 페데리치에 따르면 "혁명의 걸림돌은 기술적인 노하우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노동계급 사이에 조장되는 분열"이다. 성차별은 이 분열의 대표적인 형태다. 성차별은 단순히 허위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부불가사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규제하고 분할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는 노동력재생산을 위해 막대한 부불가사노동에 의존해야 하지만, 동시에 노동력비용을 줄이기 위해 이런 재생산 활동을 평가절하해야"하기 때문에, 가사노동을 마치 여성의 본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만든다('당신은 천상 여자야'와 같은 끔찍한 말). 가사노동이 타고난 기질이 되면 그것은 감춰진다. 시야에서 사라진 가사노동은 재생산노동이 아니라 공장 바깥, 가정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서비스가 되었다. 그러나 재생산노동 또한 노동력이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이기에, 공장의, 자본의 바깥에서 '여가를 누리는 가정'(이것은 많은 남성에게만 보이는 환상이다)이란 있을 수 없고, '사랑'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희생'은 노동착취에 대한 수사에 불과하다. 가사노동은 정말 '노동'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맑스는 "재생산노동을 노동자의 임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의 소비와 해당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으로 축소함으로써 재생산노동 문제를 가볍게 넘기고 말았다."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건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분석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맑스주의 이론이 21세기의 반자본주의 운동에 화답할 수 있으려면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재생산" 문제를 재고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재생산 문제를 살피지 않는다면, 우리는 노동력이란 상품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자본은 어떻게 이 과정을 '사랑', '희생' 등의 추상적 언어로 포장할 수 있었고, 이것이 어떻게 자본축적에 기여하고 있는지, 거꾸로 말하면 자본이 부불가사노동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삶의 모든 영역이 '사회적 공장'으로 얽혀 들어감에 따라, 투쟁의 장은 공장을 넘어 가정으로 확장된다. 아니, 가정은 이미 공장이었고, 그래서 투쟁의 장이었다. 그래서 여성 또한 이미 노동자였지만, 전통적인 사회주의자들, 심지어 여성주의자들도 여성들이 집을 떠나 '생산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계급투쟁'에 합류하는 것을 여성해방의 전제조건으로 여겼다. 이것은 여성도 '노동계급'의 일원이 됨으로써 남성과 동등해진다는 의미를 갖는 것일 테지만, 중요한 것은 남성과 동등해지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남성처럼 노동하는 것은 해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남성이 이미 해방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점에서 남성과 동등하기를 원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문제는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자본주의가 성차별에 기반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여성주의의 목표는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남성과 동등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차별에 기대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남성과 여성 모두의 노동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자본은 성차별에 의해, 여성이라는 특수한 노동자를 생산함으로써 존속하고 있기에, 여성들이 대부분 수행하는 '재생산'은 자본주의적 조직방식과 변혁 양자 모두에서 중심성을 갖는다. 저자가 재생산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재생산의 중심적 위치를 밝힌 것은 여성들의 투쟁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부불가사노동의 중심성을 밝히고,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상(象)을, …… 가정이라는 플랜테이션농장과 조립라인의 거대한 순환으로 재구성한 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전개된 가사노동에 대한 여성들의 반란이었다." 저자가 직접 참여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캠페인>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이 수행한 "재생산노동의 발견 덕분에 자본주의적 생산은 특수한 형태의 노동자에 의존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사적 영역을 생산관계의 영역과 반자본주의 투쟁의 영역으로 재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6, 70년대의 투쟁순환에 대응하여 나타난 세계경제의 재구조화는 특히 여성들에게 파국을 몰고 왔다. "노동과 천연자원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기업자본에게 넘겨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계화는 이를 위해 모든 생존수단을 박탈해야 했고, "사회적 생산의 물적 조건과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 노동의 주요 주체인 여성들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을 필요로 했다. 여성들이 자연자원(토지, 물, 삼림)의 비자본주의적 이용과 자급지향적인 농업을 지키는데 앞장서며, 공유재(공통재, 공유지, the commons)의 파괴를 저지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등을 앞장세운 자본의 세계화는 토지와 일거리, 관습권에서 유리시키는 전 지구적 엔클로저 과정을 통해 수백만 명을 화폐수입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국가는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복지국가의 해체를 통해 노동력재생산에 대한 투자를 철회했다. "보건, 교육, 연금, 대중교통에 대한 보조금이 모두 삭감되고 높은 요금이 부과되어 노동자들이 자신의 재생산비용을 떠안게 되자 노동력재생산의 모든 절합지점은 직접적인 축적지점으로 바뀌"었다.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직접적인 축점지점이 된 이 재생산영역을 다시 재구성하자는 것으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재생산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자본과 시장의 논리 밖에서 재생산노동과 관련된 새로운 협력의 형태를 창출함으로써 재생산을 둘러싼 집합적 투쟁의 문을 다시 여는 것이다." "그 어떤 운동도 참여자의 재생산을 중심에 두고 고민하지 않으면 지속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유재가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른다. 저자도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피터 라인보우는 <마그나카르타 선언>에서 엔클로저 이전, 공유지를 기반으로 한 공통하기(commoning)의 삶을 그린 바 있다. 저자는 이러한 공통하기의 삶의 사례를 여성들의 공유지 수호를 위한 투쟁과 자급농업, 도시텃밭 등에서 찾는다. 자원의 공유재화(commoning)는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의 자산을 세계시장을 매개로 빼앗은 상품흐름과 우리의 재생산활동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때 우리의 재생산노동은 자본축적의 요구에 복속된 '노동력' 생산만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저자와 라인보우가 모두 주장하는 것처럼, 공유재가 단지 공유하는 땅, 재화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공유재화가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공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즉, 공유재는 물질적 사물인 동시에 사회적 관계이며, 공통적인 것(the common)에 대한 공통적인 관리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우리가 새로운 집합적 생활양식을 만들어내야 하며, 당면한 사회경제적 위기가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을 강요한다고 말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혁명의 영점에 근접해있다는 말로 들린다. 지젝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유일한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공통적인 것’을 사유화하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활개치도록 놓아둔다면 인류의 자멸을 포함한 파국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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