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국가가 있지 않았다. 국가가 있기 전에 국민 될 사람이 먼저 있었다. '민주주의 공화국'이란 바로 그 사람들이 스스로 국가를 구성한 주인(민주주의)이며, 국가는 그 사람들이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만든 협의체(공화국)임을 명시한 개념이다. 촛불집회 주제가인 <헌법 1조>는 이같은 국가의 설립 과정과 의미를 법전 밖 거리에서 새삼 상기시킨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외치는 촛불시민을 짓밟는 공권력의 행위는 미친개가 밥 주는 주인을 무는 꼴과 같다.

건국절 개명 시도, 촛불 계승으로 비칠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광복절'을 '건국절'로 개명하겠다고 한다. 그 의도가 무엇이든, 이번 기도는 한국사회의 국가주의 신화를 깨뜨리는 데도 한 숟가락 보탤 것이 분명하다. 국가는 먼저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뒤에 ‘건설’된 것이라고, 이를테면 불도저로 만드는 대운하 같은 것이라고 스스로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건국절 개명을 관철하기에 앞서 자신의 행위가 자칫 촛불의 계승처럼 비칠 수 있음을, 그리하여 마침내 제 발등을 찍을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경향신문 4일치 4면
국민이 국가에 선재(先在)한다는 번연한 진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언론이라고 다르지 않다. 경향신문이 지난 4일부터 연재를 시작한 기획기사 '정부 수립 60주년 특집 - 국가를 묻는다'는 한국사회 주류언론이 단 한 번도 '국가 이전의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고 있다. 과문한 탓인지, 나는 국민이나 민중을 구호로 주워섬기는 것 말고, '노가다'와 '식모'의 일대기를 '국민'의 반열 위에 올려놓고 쓴 대형 르포르타주를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다.

노가다와 식모 '연보' 보고 눈물 왈칵

'현대사 60년의 주인공들'이라는 관형어가 결코 과분한 헌사(獻詞)가 아니라는 걸, 나는 황태순·성송자 두 사람의 '연보'를 먼저 읽고 눈물을 왈칵 쏟으며 깨달았다. 어디 주류언론에서 '국민학교 졸업'으로 시작해 '막노동' '사우디아라비아 하역작업 인부' '회사 부도로 6개월치 월급 떼임' '호텔 경비원, 자동차 부품회사 근무' '현재 뇌졸중, 일손 놓음'으로 이어지는 연보(황태순)를 구경이나 해봤던가. 6살부터 19살까지 점철된 '식모살이'의 유전(流轉)에서 '노점' '남편 사별' '건어물점 운영'에 이르는 연보(성송자)에는 그나마 '국민학교 졸업'마저 빠져 있다.

이건 내 아버지, 어머니, 삼촌, 고모, 이모의 연보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삶을 드문드문 기록한 빛바랜 흑백사진들은 시골집 벽에 먼지를 보얗게 쓰고 걸려 있는 내 가족·친척들의 사진 모음 액자 그대로다. 경향신문은 앞으로 '공순이'와 '농투산이', '복덕방 주인', '386 학원장'까지 다룰 거라고 한다. 그때 가면 그들로 구성된 '정부 수립 60년'의 모자이크, 아니 레고 조형물이 완성될 것이다. 정·관·재계의 노른자위만 골라 딛은 프로필과 화려한 조명을 받은 사진들로 구성된 포토스토리만 다뤄온 주류언론들이 '국가 이후의 존재'로만 취급했던 바로 그들이 주인공이다.

▲ 경향신문 4일치 5면
이명박 정부의 건국절 개명 추진은 경향신문의 기획과 정반대 편에 배치된다. 그 배후에는 이른바 '뉴라이트'가 있다. 그들이 몇해 전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어올리는 작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광복절이 건국절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을 미처 내다보지 못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4일 <프레시안>에 쓴 글("건국절? 차라리 8·29를 '문명절'이라 해라")을 보니, 이들은 박정희를 '산업화의 아버지'로 윤색한 데 이어, 이승만·박정희마저 (과거를 숨기고) 언급을 회피했던 친일파에 대해, '현대 문명의 아버지'라는 월계관을 씌웠다.

건국절 개명은 대한민국의 친일파의 주권국 선언

처음부터 치밀한 기획이었다. '현대 문명화의 (비극적) 종식'을 '(환희의) 광복'이라고 불러야 하는 치명적 모순을, 이들은 건국절 개명이라는 손쉬운 수단으로 극복하려 하고 있다. 당연히 그 기획에서 일제강점기 억압받던 이들의 삶과 투쟁은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60년 동안 채워넣지 못했던 그 36년 세월, 유일하게 황태순·성송자가 국가 이전의 존재로 희미하게 남아 있던 그 기간을 문질러 지우고, 친일파가 대한민국을 구성한 주인이고,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이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만든 협의체가 되는 모자이크를 완성하려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에서는 '국민'과 '비국민'의 차이가 더 확연해질 것이다. 요즘 조·중·동으로부터 지극한 '배려' 속에 철저히 ‘외면’받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부인의 사촌언니 김옥희씨와 식모 출신 성송자씨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김씨에게 30억원을 건넨 김종원 서울시 버스운송사업조합 이사장과 그의 버스를 모는 버스기사, 그의 버스에 매달려 출퇴근하는 시민은 더욱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종부세 부과 기준을 9억원으로 올린 것에 해당 사항이 전혀 없으면서도 희색이 만면한 9억원 이상 주택 소유자와 무주택자도 서로 얼굴 붉힐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대통령 처언니 김옥희와 식모 성송자, '국민 대 비국민'

물론 여태 그랬듯이, 비국민도 국민으로 호명되는 상황은 빈번하게 찾아올 것이다. 4년 또는 5년에 한 번씩 투표할 때, 나이 스물이 넘어 휴전선에서든 집회현장에서든 총부리나 방패를 들어야 할 때, 1년에 몇 번 세금을 내야 할 때, 경제 위기의 책임이 임금 문제와 고용 안전성 문제로 돌려질 때, 가깝게는 베이징에서 애국주의적 메달 경쟁을 벌일 때,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 친일파의 후예는 황태순·성송자와 그들의 피붙이들을, 비국민을, '국민'이라 부르며 국가동원체제 안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 동아일보 2일치 1면 기사
하지만 탄생 설화를 재구성하는 것(건국절 개명) 하나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는 벅차다. 역사의 기억을 바꾸려는 시도는 그 기획이 역사적 사실에서 동떨어질수록 허망하다. 건국의 근간이 된 제헌헌법은 전문에 3·1운동 정신의 계승을 명시하고 있고, 부칙에 친일 반민족 행위자의 처벌 근거를 두고 있다. 또 사회주의적 통제 경제에 가까운 경제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삼아, 중요 산업의 국유화, 무상 교육, 무상 치료 등을 골자로 한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담고 있다(한홍구, 같은 글).

'탄생설화' 바꾼다고 진실이 감춰지지는 않아

황태순·성송자와 그들의 피붙이들은 이미 대한민국 헌법 1조의 참뜻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그리고 그 헌법 정신이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는 사실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8월 15일을 끝내 건국절이라고 부르게 된다면 그날은 대한민국의 건국은 아직 미완의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해마다 환기시켜 촛불을 들게 하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 공영방송 KBS와 MBC가 건국절 전야제를 생중계하지 않는다고 눈을 흘기는 일부 신문은 이 점을 똑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인 경향신문의 '국민 복권' 시리즈가 앞으로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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