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TN의 구본홍 '법적으로만' 사장이 아주 열심히 출근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아침에 막으면 점심나절에 기습 출근하는 '법적으로만' 구 사장을 막아야 하는 YTN노조는 정말 죽을 맛이 아닐 수 없다.

뚫리면 '혹 노조가 열어 준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에서부터 '저 정도밖에 싸우지 못하느냐'는 비난까지 감수해야 한다. 막으면 막는대로 '법적 위협'이 도사리고 있고, 공권력의 협박성 경고가 시시때때로 구성원들을 괴롭힌다.

▲ YTN 구본홍 사장 ⓒ송선영
내부는 내부대로 계속해서 분열 양상이 봉합되지 않은 채 간극이 벌어지고 있을 터. '법적으로만' 구 사장 쪽에 줄을 서면서 '실용주의'를 외치는 일부 간부들. 반대로 '순진하게' 방송독립을 외치며 출근을 저지하는 노조 쪽에 줄을 선 조합원들. 권력이나 명예 그것도 아니면 돈이라도 바라며 줄을 선 것이 아니라 정당한 민주주의적 권리를 위해서 싸우다보니 어느새 그토록 혐오해마지 않았던 어느 한 쪽에 줄 선 꼴이 되어버린 조합원들의 비애.

한 번이라도 방송독립투쟁, 또는 낙하산 사장 저지투쟁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안 봐도 '비디오'인 장면들이 YTN관련 기사 이면에 아프게 묻어 있음을, 보는 관전자들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그러니 막상 전선에 서 저지투쟁을 벌이는 조합원들, 그들이 이전에 어떤 투쟁성을 지녔는지와 무관하게 현실에서 방송독립의 그 생생한 절박성과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터. 공권력의 몰합리 몰상식 몰이성적 공격에 좌절에 가까운 분노가 분출되고 있을 터.

21세기 한국, 그것도 전국단위 보도전문채널을 향해 가해지는 정치권력의 린치. 그동안 '남의 나라 이야기 또는 다른 집단의 폭력성'쯤으로 투쟁하는 집단을 바라봤던 조합원들은 이것이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로 인식하는 과정이다. 노동자들의 불법집회를 보며 '천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투쟁방식'으로 '시민들과의 괴리감만 더 확대시키는 무지한 행위'쯤으로 바라봤던 조합원들은 '할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없다'는 수단의 궁핍함과 방식의 한계를 절감할 터.

공권력이라는 것이, 정치권력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노무현 정권 때나 이명박 정권 때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절감하는, 귀중한 사회학습과정이다.

그들은 바랄 터이다. 사회학습 충분히 했으니 이제 좀 몰상식이 상식으로 몰합리가 합리로 몰이성이 이성으로 전환되는 그 어떤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마지노선을 붕괴시킬 수 없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주지의 사실. 결국 현 정권은 이분법적 선택만을 YTN조합원들에게 강요한다. 굴복할래? 잡혀갈래?

방송독립. 이것이 단순히 투쟁을 위한 슬로건이 아니라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사수해야 하는 보도전문채널의 절박한 현실이라는 것을. 그래서 접을 수 없는 싸움이 되어 버린 지금 굴복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잡혀가기에는 뭔가 판단이 서지 않는 상황.

지난 촛불집회 과정에서 YTN은 거리에서 촛불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비난받으면서 시청자들과 괴리된 방송사, 특히 보도전문채널은 결코 생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보도의 공신력 훼손이 얼마나 혹독하게 내부 구성원들에게 돌아오는지, 그 부메랑 효과를 철저히 몸으로 겪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겨우 YTN은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그 결과 그 수가 많든 적든, YTN을 매일같이 밝혀 주는 작은 촛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YTN 조합원들은 4일 오전 7시부터 서울 남대문로 YTN 사옥 후문에서 구본홍 사장 출근 저지 투쟁을 벌였다. ⓒ송선영
그래서 더욱 접을 수도 없다.

굴복할래? 잡혀갈래? 이 양단의 선택지에서 그나마 자율적으로 제3의 길을 엿본다면 그것은 구본홍 개인의 결단이다. 이제는 단 한 사람의 의인만을 요구하는 벼랑 끝에 YTN 구성원은 서 있다.

지금은 비록 '공공의 적'이자 '정권의 파수꾼'이라는 이중적인 평가 속에서 좌고우면할 '법적으로만 사장' 구본홍의 결단, 그것만이 진퇴양난의 외통수에 걸려 있는 YTN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제3의 길이다.

지난 수 십 년을 MBC 기자로서 보도국의 책임자로서 정치권력의 무자비한 탄압과 그에 맞서 일정한 저항을 경험하기도 했고, 정치권력에 줄 대기를 해 본 경험도 있는 구본홍.

이제 그는 초심을 되돌아보며, 후배들의 그 뼈를 깎는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선배로서의 역할, 기자후배들의 그 실존적 고뇌를 품어주는 선배기자로서의 휴머니즘을 발휘해 줄 때가 바로 지금이다. 기억에 남는 결단을 보여준 선배기자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지 아니면 무참히 후배들을 짓밟은 정권의 주구로서 역사에 기록될지, 이는 온전히 구본홍의 결단에 달려 있다. 그의 휴머니즘을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구본홍의 휴머니즘에 기대하는 순진한 발상이라 비난하지 말라. 이것이 한국 사회, 한국 방송의 비극적 현실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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