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不穩). 마지막으로 접한 것이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꼭꼭 숨어 있던 이 말이 어느 날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말사전을 열었다. 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다는 뜻이란다. 정부의 물가 중점관리 50개 품목 지정 사건(!)을 연상시키는 국방부의 불온서적 23권 선정(왜 23권뿐인지도 불가사의다!)이 물가를 인위적으로 잡아보겠다던 정부의 순진한 발상 이상으로 요즘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똑똑한 독자들은 문제의 책들을 부러 찾아 읽느라 분주하단다. 23권 가운데 몇 권쯤은 조만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성큼 오를지도 모르겠다. 불온서적을 지정한 행위 자체도 황당할뿐더러 <세계화의 덫>이나 <삼성왕국의 게릴라들>을 '반자본주의'라는 범주에다 분류해 놓은 것을 보고는 그만 말문이 턱 막혀 버린다.

▲ <나쁜 사마리아인들-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이런 책들을 반자본주의 서적으로 읽어내는 그 희한한 독법(讀法)은 도대체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유추해볼 수 있는 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불온서적을 골라낸 장본인들이 무지(無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방부 관료들이 적어도 사관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배운' 사람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추측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남은 해석은 국방부가 이 정부의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다고 판단한 책들을 적어도 군대 내에서만큼은 절대 읽히지 않도록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뭐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국방부는 우리 국민(장병)들의 수준을 이렇게도 모르는 것일까. 답이 어느 쪽이든 소가 웃을 노릇인데, 특히 후자의 경우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의 기본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점에서 체제의 마음에 들지 않는 글에 '불온하다'는 낙인을 찍고 가차 없는 탄압을 자행하던 군사독재 시절의 망령을 되살린 '시대착오적'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정부·반미 서적으로 분류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장하준 교수가 줄기차게 지적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자유 무역' 또는 '무역 자유화'에 대한 맹신(盲信)은 장 교수가 '사다리 걷어차기'보다 더 심각하다고 지적한 '역사에 대한 건망증'에서 비롯됐다. 장 교수는 부자 선진국들이 "왜곡된 역사적 기록을 퍼뜨리는 의도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를 감추고자 하는 데 있다"고 비판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창하고 '사악한 삼총사'로 불리는 국제 경제 기구들-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WTO)-에 의해 통제되는 자유 무역은 대안 없는 지고의 선(善)인가? 규제 철폐와 민영화, 국제 무역과 투자에 대한 개방을 통해 전 세계 각국이 저마다 차별 없는 성장을 이루고 있는가? 토머스 프리드먼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주장한 대로, 역사의 순리에 따라 경제 번영을 이끌기 위해서는 치수가 하나뿐인 황금구속복(golden straitjacket, 신자유주의의 핵심 의제들)을 입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는 것인가?

▲ 장하준 교수.
장하준 교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세계화와 관련해서 불가항력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화의 주된 추진력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주장하듯 기술이 아니라 정치, 즉 인간의 의지와 결정이다." 장 교수는 부자 선진국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를 감추고자 하는" 정사(正史) 속의 역사적 오류들을 하나하나 부숴나간다. 1870년에서 1913년 사이의 첫 번째 세계화 시기에 영국이 주도한 자유 무역은 대부분 시장의 힘이 아닌 '군사력' 덕분에 가능했고, 1945년 이후 1970년대까지의 두 번째 세계화 시기는 개발도상국들의 국가주의적 정책이 끔찍한 재앙을 불러왔다는 정사(正史)의 설명과는 정반대로,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가 훨씬 빠르게 성장했고, 훨씬 안정적이었으며, 소득 분배도 훨씬 균등했다는 점을 상세하게 논증한다. 1980년대 이후의 세 번째 세계화 시기에 대해 장 교수는 개발도상국들이 선진국들로부터 '성적이 형편없었던 옛날'이라는 평가를 받은 과거 보호 무역과 국가 개입 경제 시기보다 형편이 더 나빠졌다며 다음과 같이 꼬집는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형편없는 '성장' 기록은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부자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부자가 되었을까?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이미 논증한대로, 자유 무역의 최대 옹호국인 미국과 영국은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강력한 보호무역을 실시한 나라였다. 비단 이 두 나라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오늘날과 같은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보호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썼다는 증거들은 풍부하다. 그런 선진국들이 이제 과거를 교묘하게 감춘 채 자신들이 설파하는 자유 무역의 의제들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며 개발도상국들을 곤경에 몰아넣고 있다.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라, 황금구속복을 입는 것 외엔 대안이 없다… 그러나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이 선진국들의 경제적 번영의 초석이었다는 세계화에 관한 신화는 이 책에서 무참하게 깨진다. 지난 20여 년 동안 실제로 진행된 급속하고, 무계획적이며, 포괄적인 무역 자유화가 개발도상국에게 가져온 결과를 두고 장하준은 이렇게 지적한다. "독자들은 보호주의적인 수입 대체 산업화 시기의 '성적이 형편없던 옛날'에 개발도상국들의 성장률이 현재의 자유 무역 하에서 이룬 성장률의 평균 두 배에 이르렀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자유 무역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보다 쉬운 비유가 있다. "성공한 어른들은 성공을 했기 때문에 자립을 한 것이지, 자립을 했기 때문에 성공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규모와 수준과 능력이 다른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평평하게 만들어놓은 경기장'에서 동등하게 경쟁을 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무역 관련 지적소유권(TRIPS) 협정이나 비농산물 시장 접근(NAMA)과 같은 제안들은 개발도상국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인도의 상공부 장관 카말 나스는 특히 선진국의 비농산물 시장 접근 협상을 '사람으로 치면 중환자실과 화장터 중간쯤 되는 것'이라고까지 표현했다고 한다. 외국인 직접 투자는 필수적인가? 민영은 좋고 국영은 나쁜가? 물가 상승은 재정 건전성에 치명적인 독약인가? 부정부패는 언제나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가? 신자유주의적 경제 이념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이 이 책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 불온서적 목록.
그렇다면 장하준의 결론은 무엇인가. "경제 발전이라는 목표에 이르는 최선의 길은 자유 무역이 아니다. 한 나라가 자국의 필요와 능력이 변화하는 정도에 어울리도록 조정된 보호와 보조금의 혼합 정책을 꾸준히 사용할 때에만 무역은 그 나라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 물론 장하준의 논지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개발도상국의 신속한 성장을 유도하는 '이단적인' 정책들을 용인하는 것이 지극히 이기적인, 나쁜 사마리아인 국가들에게도 이득이 된다." 이런 탄탄한 논리와 정연한 분석, 역사에 대한 건강한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씌어진 이 책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시각을 여지없이 깨버린다. 그 도저한 설득력 때문이었을까. 이런 책이 널리 읽히는 것이 그토록 두려웠을까. 그래서 규제 철폐다 민영화다 해서 새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는 데 이 책이 장애가 될 거라고 여긴 것일까.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반정부·반미로 분류할 요량이면, 개인적으로 비슷한 책을 국방부에 몇 권 더 추천하고 싶다. 장하준 교수의 또 다른 저작인 <사다리 걷어차기>를 읽어보라. 아울러 국내 출판계 시장에서만큼은 장 교수와 가히 쌍벽을 이룬다 할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세계화와 그 불만>과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과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강추해 드리니 다음번에 꼭 '불온서적' 목록에 넣으시라(스티글리츠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추천사까지 썼으니 말이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매체는 책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천기를 누설(?)한 커트 보네거트의 책도 부디 빼놓지 마시길…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쉬의 저서 <밀라이 학살과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 준비 중이고, 현재 KBS 사회팀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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