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쏟아지는 졸음과 처절한 싸움을 하며 출근했다. 자동차가 밀려서 신경써야 할 때는 졸릴 틈도 없는데 병목 구간을 통과하고 자동차 전용도로로 접어들어 회사에 도착하는 20여분간 쏟아지는 졸음으로 인해 몸부림을 친다. 라디오 볼륨을 크게 높이기도 하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허벅지를 두들겨보기도 하지만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다.

이 바쁜 아침에 '내가 졸려서 그러니 전화로 잠시 노닥거리자'고 청할 사람도 없고 방송 시간에 도착하기도 빠듯하니 길가에 세워놓고 잠시 눈 붙일 시간도 없다. 이와 반대로 출장을 가야 한다거나 다른 용무로 가끔 내 차를 두고 다른 사람의 차를 얻어 타고 가야할 때는 전날 다소 무리한 작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한숨 눈 붙이면 되겠지' 싶은 여유로움 때문이다. 내가 운전을 하지 못했을 때는 다른 사람의 차를 얻어 타는 것이 그렇게 고마운 일인지 별로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자동차가 가는 건데 뭐 어때?" 이런 뻔뻔함에 목적지에 못미처 내려주면 섭섭해 하기도 했다.

전주의 집에서 익산의 방송국까지 시 경계를 지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통근이라는 걸 하면서 운전하는 분들의 고마움을 깊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생명을 하루하루 연장해주는 버스 운전자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분들도 가끔 졸려서 눈을 부릅뜨거나 라디오 볼륨을 올리거나 허벅지를 두들겼을지도 모르겠다. 크게 소리치지는 못했겠지만….

초보운전 시절 감히 졸음이 몰려올 틈이 있었던가? 제 차선을 속도 유지하며 오롯하게 지키기도 힘들었을 터,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에서 능숙한 운전자들의 솜씨를 우러러보며 그들의 황홀한 끼어들기의 곡예에 감탄하며 나는 언제나 저렇게 운전을 할 수 있을까 부럽기만 했다.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준 분은 거듭 강조했었다. "초보시절에는 서툴기는 해도 오히려 조심하니까 사고가 없는 편인데요, 운전 시작하고 3년이 제일 위험해요. 조금 능숙해지면 방심하다 사고가 많이 나거든요."

보호자 없이 혼자서 집에서 회사까지 처음으로 자동차를 운전해서 출근 하던 날, 남편은 '자동차는 망가져도 사람만 다치지 않으면 되니까 마음 놓고 운전하라'며 격려해주었다. 그 말 한마디가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시속 90킬로미터의 자동차 전용도로 규정 속도 표지판을 보면서 겁이나서 시속 90킬로미터도 밟을 수 없었던 나는 인생에서도 시속 80킬로미터의 겸손한 운전 자세를 지향하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초보운전 1>이라는 수필을 쓰기도 했었다. 그 후 초보운전에 대해 몇 편의 연작 수필을 쓰려고 계획했지만 마음같지 않게 <초보운전 2>는 쓰지 못한 셈이니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 글이 <초보운전 2>의 성격을 띄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겨울철 눈길 운전은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어쨌든 그 3년이 지나고 내가 제법 운전에 익숙해졌을 때, 어느 덧 바쁜 출근길 흐름을 가로막는 운전 연습생이나 초보 운전자를 무시하고 짜증을 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물론 나 역시 한 때 초보였음을 상기하며 마음을 추스르곤 하지만 인내가 줄어든 것 만큼은 확실하다.

▲ 김사은 PD가 제작하는 전북원음방송 라디오프로그램 '아침의 향기' 홈페이지
지역에 위치한 우리 방송은 도청 소재지에 있는 방송사보다 훨씬 불리한 여건이다. 프리랜서들은 좀 더 안정적인 직장을 선호하고, 같은 조건이면 익산보다는 전주를 선호한다. 게다가 요즘같이 고유가 시대에는 출연료에 비해 기름 값도 만만치 않다. 타 방송과의 교류, 출연의 기회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전주 쪽이 기회가 훨씬 많을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전주 쪽으로 이동이 많다. 한 4~5년 전에는 한꺼번에 두어 군데 방송사가 전주에 생겨서 이쪽 프리랜서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현상도 생겼다. 방송사가 늘어나면 프리랜서들에게는 기회가 되겠지만 약소 방송국은 그만큼 불리하다.

그런가하면 도청소재지에 있는 방송사에서는 그 나름대로 '키워서 쓸만하면' 수도권으로 진출하는 바람에 '여기가 무슨 아카데미냐'는 자조섞인 푸념도 섞여 나온다. 하물며 우리처럼 지역에 위치한 종교방송은 외부에서 모셔오기 보다는 자체 발굴, 생산해야 하는 과정이 되풀이된다.

PD에게 있어 가능성있는 사람을 발굴해서 꽃피우는 것만큼 보람된 일도 없을 것이다. 순전히 '감' 하나로 '방송'의 '방'자도 모르는 생짜를 훈련시켜서 완제품을 만들어내는 일, 분명 보람이 있긴 하다. 그러나 어찌하다 보니 매번 초보와의 호흡을 맞추는데 기력을 쏟는 일이 다반사여서 슬슬 지쳐갈 때도 있다. 열심히 뛰어주던 리포터가 수도권의 교통방송 리포터로 옮겨갔고 (그 친구는 집이 서울이다) 그 전 리포터는 케이블 TV의 아나운서로 이동했다. 공석이던 리포터 자리를 대학생 두명이 메워주고 있다. 이들은 방송에 처음 입문한 초보이다.

지난 가을 개편부터 호흡을 맞춰온 아침방송 MC가 갑자기 방송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미리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당황스러웠다. 개편도 아닌데 중간에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겠다는 것은 그로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방송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그만큼 많이 고민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잡지 않았다.

좋은 진행자를 잡아놓을 수 없는 여건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전공을 살려 전문 계약직 공무원으로 당당히 합격한 것은 백번 축하할 노릇인데 이 와중에 다른 사람처럼 "그래도 개편은 채워야 되는거 아냐?"와 같은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절대 절명의 기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기회를 '개편'의 책임을 물어 묶어두기에는 우리의 여건이 너무 열악하다. 그래서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친구가 그토록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었다.

다른 후임 진행자를 물색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몇 번의 경험을 거쳐 소위 '잘한다'는 진행자는 반드시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몇 명의 후보자를 대상으로 오디션을 하면서 다소 부족해도 천천히 오래 갈 수 있는 진행자를 찾기로 했다.

데일리 방송은 처음이라는 새로운 남자 진행자와 방송을 한지 3주째 되어간다. 방송을 통해 어진 벗이 되라는 뜻을 담은 현우(賢友)라는 법명도 받았다. 품성 좋아 보이는 그는 그야말로 방송의 생짜다. 두배 세배 더 챙기고 신경써야 한다. 어쩌면 좀 더 넉넉한 준비 기간이 있었으면 훨씬 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닥친 현실에 본인도 부담이 클 것이다. 그래도 '방송은 보람되고 재밌다'며 환하게 웃으니 그 환한 웃음에 내가 웃고 만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 역시 언제나 일을 시작할 때는 초보였다. 초보 운전때는 말할 것도 없고 방송에서도 실수를 많이 했을 것이다. 큐시트 쓰는 법을 몰라 당황한 일, 녹음하러 갈 때 테입을 놓고 간 일, 마이크 건전지 확인한 것을 빠뜨려 녹음이 위태로웠던 일, 방송 마치는 시간 계산을 못해서 블랭크 생겨 당황한 일 등…. 다행히 노련한 동료들이 있었기에 크고 작은 실수들을 만회하며 초보의 딱지를 벗게 되었다. 아니, 초보여서가 아니라 능숙해서 생기는 실수들도 많을 것이기에 영원히 '초보'의 틀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초보들이 방송국을 거쳐갈 지 모른다. 그때 마다 '이것도 몰라?'라고 절대 다그치지 않기로 다짐한다. 나도 한때는 남들이 다 아는 '그것'을 몰라 당황한 때가 있었을 터이니 내가 아는 것 만큼은 기초부터 전해주자고 마음먹는다. 솔직히 그런 기회가 자주 없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초보였을 때도 누군가는 분명 초보인 나에게 '기회'를 주고 기다려 주었을테니, 나 역시 그 기회와 기다림의 미덕을 초보인 누군가를 위해 제공해야 한다.

설령 그들이 초보딱지만 떼고 갈지라도 그것 또한 보람으로 삼아야겠다. 빠른 템포로 숨가쁘게 돌아가는 방송 환경속에서 유난히 '쉼표'를 강조하는 기다림의 미학에 익숙한 우리 청취자들도 참 대단한 품성의 소유자들이다. 다그치지 않고 넉넉하게 지켜보고 품어주는 청취자들이 있기에 용기를 갖고 더 많은 초보들과 교류할 수 있을 것 같다.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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