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재단(이사장 박래부)은 이른바 '언론유관단체'다. 임직원 138명의 이 작은 조직이 요즘 언론계로부터 거대 공영방송사인 KBS 못지않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두 조직의 단체장을 갈아치우려는 시도를 노골화하면서부터다. 이명박 정부로서는 KBS가 핵심목표였고, 언론재단은 어디까지나 '끼워넣기'였다. 그러나 역대 정권이 대선 전리품으로 쉽게 챙겨왔던 언론재단 이사장 자리가, 이번 만큼은 정연주 KBS 사장 퇴임 문제와 얽히면서 녹록치 않은 자리가 돼 버렸다. 정권 대 'KBS-언론재단-언론운동 진영'의 대결 구도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언론재단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영전'이었다.

언론재단 노조, 문화부의 '약한 고리 건드리기'에 즉자적 반응

▲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언론재단 ⓒ미디어스
난처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는 최근 회심의 카드를 내놓았다. '돈줄 죄기'다. 문화부는 지난달 29일 언론재단 쪽에 공문을 보내 '기타 공공기관의 일부 광고대행권'을 박탈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동안 언론재단은 나름대로 옹골차게 맞서왔다. 신재민 문화부 차관이 직접 박래부 이사장에게 퇴임을 다그쳐봤지만, 박 이사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 이사장이 작성해뒀던 '언론재단 외압 일지'가 국회를 통해 폭로돼 문화부를 난처하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한 고리'가 제대로 잡혔다.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언론재단지부(지부장 정용재)가 즉자적인 반응을 보였다. 임원진 사퇴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언론재단 지부의 사태 인식은 '임원들은 재단을 담보로 한 정치도박을 중단하고 즉각 사퇴하라'는 성명서 제목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임원들이 정권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임기를 채우겠다고 버티는 것을 '재단을 담보로 한 정치도박'이라고 규정한 것은 노조 처지에서는 매우 실존적인 재해석이다. 언론재단 지부는 "언론재단의 근간인 정부광고 대행을 박탈해 현 임원의 사퇴 수단으로 재단을 위협하고 있다"며 정부를 비판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조직의 태생적 생존조건을 확인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노조에게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정치적 투쟁은 '도박'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지부의 한 간부는 "이전부터 노조가 주장해왔던 것은 재단의 독립성과 공공성 확보"라면서 "문화부와 임원진 간에 벌어지고 있는 정치싸움은 우리의 목적에 반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런 양비론 역시, '독립'을 해치는 원인을 새로 집권한 식민주의 지배제국(문화부)과 본국에서 배척된 식민지 총독부(재단 임원진) 사이의 정치싸움에서 찾는, 기껏해야 '인식의 식민성'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한계는 "자리에 연연한 임원들의 정치도박으로 인해 정부광고의 한 축이 무너졌다"며 정권과 스크럼을 짜는 역설적인 결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더 힘센 놈에게 줄서면 안락함만 커지는 게 아니라 종속성도 함께 커진다.

▲ 문화부가 지난달 29일 한국언론재단에 발송한 공문. 정부광고대행 사업 일부를 중단하고 민간에 넘기라는 내용이다. ⓒ미디어스
"문화부 압력보다 노조 내부흔들기가 더 참담"

문화부의 압력에는 전의를 불사르던 임원진이 노조의 공격에는 곤혹스러워 하는 것도 정부가 이번만큼은 아킬레스건을 정확하게 건드렸음을 의미한다. 언론재단의 한 관계자는 "문화부의 압력에 굴복해 도중에 사퇴할 임원은 없다"며 "양심을 가지고 일할 권리를 침해한 것에 대해 국가인권위에 제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노조가 자기들 밥그릇 지키겠다고 내부를 흔들고 시민사회의 등에 칼을 꽂았다"며 "예측은 했지만 막상 현실화되고 보니 참담하다"고 말했다.

박래부 언론재단 이사장은 <미디어스>와의 통화에서 "안타깝지만 노조원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며 "대화로 풀어갈 여지가 많다고 본다"고 말했다.

외부 시민사회와 정치권도 곤혹스러워 하면서도 노조에 쓴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전국언론노조(위원장 최상재)는 언론재단 지부의 성명이 언론노조의 방침과 배치되는 데도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동안 언론노조는 이명박 정부에 대해 "언론장악 음모를 전면 중지하라"며 파업투쟁을 벌이는 등 강력히 맞서왔다. 지난달 29일에는 '언론재단을 접수하려는 조폭 짓거리를 집어치워라'는 성명을 내어 문화부의 정부광고대행 일부 민영화 통보계획 등 박래부 이사장의 사퇴 압박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언론재단 외압일지'를 공개했던 민주당 최문순 의원은 "노조가 정치권력과의 관계에 대해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양문석 언론연대 사무총장은 "언론재단 노조는 정권의 코드 인사에 투항했다. 조직이기주의가 혐오 수준"이라며 "언론의 정치적 독립성을 일관되게 외쳐온 언론노조는 언론재단지부의 일탈을 강력히 징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박래부 언론재단 이사장
정연우 민언련 공동대표는 "취임 반 년도 안 된 이사장에게 경영평가 운운하며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현 정권의 자기 사람 자리 만들어주기에 노조가 총대를 멘 것 아니냐"며 "독립적인 인사를 위한 장치도 마련해놓지도 않고 임원진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또 "바른 언론을 육성하고 지원해야 하는 언론재단의 설립 목적에도 반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안팎에서 높아지는 개혁 목소리…이번주가 고비

그러나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언론재단의 구조적 종속성과 일부 구성원의 기회주의적 태도가 드러난 만큼 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내부에서부터 나오고 있다. 언론재단의 한 직원은 "우리의 존재 이유는 미디어 진흥에 있지 우리 배불리는 데 있지 않다"며 "이참에 재단의 위상과 구조에 대해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른 직원은 "과연 이 정도 인원 이 정도 예산에 걸맞은 기능을 하고 있는지, 특히 전두환 때부터 정권에 빌붙어온 구악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열어놓고 사회적으로 논의를 해야 한다"며 내부 개혁을 강조하기도 했다.

▲ 신재민 문화부 차관
외부에서도 이번 기회에 언론재단의 위상과 기능을 재정립하기 위한 논의를 공론화해야 한다는 반응이 잇따르고 있다. 양문석 언론연대 사무총장은 "이번 기회에 언론재단의 기능과 존재에 대해서 사회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연우 민언련 공동대표는 "그동안 다급한 '공영방송 장악 저지'에 전력하느라 언론재단 문제에 상대적으로 신경을 못 썼다"며 "시민사회단체와 학계 등이 언론재단 문제를 포함해 이명박 정부의 인적 장악 및 제도 장악 등 언론장악 저지에 총력을 기울여 전방위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사태의 흐름은 이번 주가 큰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용재 언론재단 지부장은 "매일 점심시간에 대책회의를 진행하고, 노조 입장에 대해서는 가급적 성명을 통해서만 밝힐 것"이라며 "왜 우리가 이렇게 대응하는지 차차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래부 이사장은 "현재 문화부 장관 면담을 요청한 상태"라면서 "장관 면담이 불가능하다면 국가인권위에 제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임원들의 인권위 제소는 정치적 상징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임원들은 법률과 정관으로 임기가 보장된 자신들을 강제로 사퇴시킬 경우 헌법소원도 제기하기로 방침을 정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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