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한국> 이원우 기자의 칼럼(링크) 에 대한 기자의 반박(링크)에 대해 이원우 기자가 재반박의 글을 게재했다(링크). 이원우 기자님의 응대에 감사드린다. 연휴엔 되도록 회사업무를 멀리 하려는 개인적 기조 때문에 성탄인사를 건네받지 못한 점이 아쉽다.

그러나 재반론이 무엇을 반박했는지는 의문이다. 이원우 기자의 글의 재반박의 핵심은 ‘너의 글은 길다’‘우리는 생각이 다르다’ 정도다. 그도 기자의 긴 글의 핵심을 ‘나는 (너의 글이 아닌) 너라는 인간이 싫어’‘나의 세계가 너의 세계보다 우월해’로 정리했으니 기자가 특별히 악의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 미래한국 칼럼 화면 캡쳐
기자의 글이 다소 긴 편이란 건 사실이다. 그리고 메시지가 동일할 경우 요약된 글이 그렇지 않은 글 보다 미덕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경우엔 글이 길어진 것이 글쓴이의 탓이 아닌 것 같다. 이원우 기자의 애초의 칼럼에 드러난 주장들을 굳이 내용을 말이 되게 정리하여 열거하자면 이렇다.
첫째, 사실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는 안녕하다.
둘째, 북한 사회를 보면 우리는 안녕하단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셋째, 특히 제 손으로 돈 벌어본 적도 없는 이들이 사회의 안부를 묻는 것은 웃기다.
넷째, 현재는 ‘통일이 되지 않은 때’, ‘건국이 완성되지 않은 때’다. 그래서 우리는 ‘안녕’할 수 없다. 청년들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북한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첫째와 넷째는 일종의 모순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재반박에서 이원우 기자가 마지막이 본심이라 해명하셨으니 그렇게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주장들이 있을 때, 그것을 반대하려면 그 근거들을 논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원우 기자의 애초의 글에는 첫 번째 주장에 대해서만 근거 비슷한 것이 나열될 뿐 나머지 주장은 일방적으로 제시되면서 ‘안녕’ 대자보를 쓰는 이들을 비난하고 있다. 그는 재반박에서 기자가 ‘허수아비’를 때렸다고 비판한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주장만 있고 근거가 없을 때는, 읽는 이가 그 주장을 하는 이들이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근거들을 집어넣어 그 주장의 내용을 보충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그가 해야 할 말은 “오해가 있다. 저번엔 생략해서 알 수 없었겠으나, 내 견해는 이러저러하다”가 되어야 한다.
기자는 이원우 기자가 첫째 주장을 하기 위해 끌어다 쓴 논거들을 구체적으로 반박했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맥락에 대해 재반박을 하거나, 논의가 무용하다 여기고 침묵했어야 했다. 이원우 기자의 재반박의 글에는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쓰나마나한 글이 된 셈이다.
또 기자는 나머지 세 개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원우 기자가 그렇게 생각해서는 곤란한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적었다.
특히 이원우 기자가 자보를 쓰는 이들에 대해 “왼손에는 휴대폰 오른손엔 마우스를 들고 태어나서 입혀주고 먹여주는 삶만 살아본 먹물 주제에 무슨 ‘세상에 안부를 물을 자격’ 따위를 탐낸단 말인가. 몰염치도 그 정도면 병”이라는 대단히 부적절한 조소를 했기 때문에, 이원우 기자가 처한 물적 조건을 자세히 분석해보았다.
그는 “나름 열심히 읽었는데 ‘그런 식으로 논쟁을 한다면 너무나도 소모적이지 않을까?’라고 말해서 한순간 허탈해졌다. 반론은 한윤형 선생님이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기자가 말한 바 핵심은, 이원우 기자처럼 조소하면 이원우 기자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말해볼 수밖에 없는데, 그런 논쟁이 너무나도 소모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너의 글이 아닌) 너라는 인간이 싫어’로 요약한다면 기자는 이렇게 대꾸할 수밖에 없다. ”조소는 이원우 기자님이 먼저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라고.
운 좋게 형편이 비교적 나은 집에서 태어나 제 손으로 노동해본 적이 없는 대학생이라 하더라도 ‘안녕’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현재만 사는 게 아니라 미래를 걱정하는 동물이고, 아직 노동한 적 없는 대학생이라 하더라도 ‘예비노동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예비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안녕’이 아닌 사회의 ‘안녕’을 물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무엇보다, 현재 한국 사회의 구조를 생각해 볼 때 ‘안녕’ 대자보를 쓴 이들 중 노동하는 이가 한 명도 없을 확률은 장래에 이원우 기자가 통일한국의 총통이 될 확률보다도 희박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조소에 대해 기자가 이해하는 바 보수언론의 물적 조건을 말하며 이원우 기자가 그런 말 할 처지는 안 된다고 말한 게 지난 기자수첩의 일부의 내용이다. 그리고 여전히 기자는 그런 식으로 얘기를 전개하면 소모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그의 한 문장의 부적절한 조소 때문에 기자는 A4 6장 분량을 썼다. 얼마나 소모적인가?
하지만 이원우 기자는 자신의 조소가 어떤 문맥에서 정당하거나 타당한지는 설명하지 않고 그 내용을 ‘나는 (너의 글이 아닌) 너라는 인간이 싫어’라고 요약한다. 이런 반응을 보면 그가 애초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거나, 남들이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전혀 관심이 없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있는데 우리가 ‘안녕’을 말하는가”란 말이 무리한 거라는 것은 그도 잘 알 것이다. 이런 주장은 너무 근본적으로 잘못 되어 있어서 반박하기도 애매하다. 우리 중 누구도 우리가 북한보다 수십배는 잘 살기 때문에 더 이상 잘 살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사실이라면, ‘안녕’에 대해선 다른 잣대가 적용되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우리가 북한보다 더 민주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민주주의를 원해선 안 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저 문장에 ‘민주주의’ 대신 ‘경제성장’을 집어넣을 경우, 이원우 기자는 동의할 수 있는가. 경제성장이든 민주화든 한국 사회가 계속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야 북한 주민들이 남한과 같은 체제에서 살기를 원할 거란 점에서, 남한 사회의 진보를 희망하는 것은 남북통일이란 열망에 배치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남는 것은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북한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훈계 뿐이다. 그 훈계를 선의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나 그는 북한 문제에 대한 논의가 어떠한 전선에서 일어나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그들만이 북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다. 재반박 기사에서 이 부분을 보자.
- <북한의 위협이 있고 통일의 필요성이 있는데, 그래서 어쩌잔 말인가? 북한에 관심을 어떤 방식으로 가지란 말인가?>
- 나와 동갑이신 한윤형 선생님의 이 두 문장은 중요하다. 사실은 이 문장이야말로 북한에 대한 2030의 입장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힘든데 뭐 어쩌라고.
- 어쩌긴. 1년에 6000만원 넘는 소득을 올리는 철도노조원들을 무려 대학생들이 걱정해 주는 남한의 휴머니즘을 10분의 1만이라도 쪼개서 북쪽에 투사하면 된다. 관심이 많은 걸 바꾼다. 대자보도 결국엔 그 얘길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 이후부턴 가상 시나리오에 기초한 훈화 말씀이 다시 이어진다. 내가 하지 않은 얘기들이 대부분이다. 다시 한 번 허수아비의 오류. 이 많은 허수아비들은 어디서 왔을까. 하지만 뭐, 그래도 다 좋은 얘기들 같다.
기자는 ‘북한이 힘든데 뭐 어쩌라고’라고 반응한 것이 아니다. 북한 문제를 대면하는 두 가지 길이 있고, 이 두 가지는 방법론적인 대립일 뿐 상대방더러 ‘관심이 없다’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그 긴 ‘훈화 말씀’을 읊은 것이다.
이원우 기자가 선택한 노선에서는 북한 인권을 위해 북한 김정은 정권의 붕괴를 진력으로 기원해야 한다고 믿는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도 정권이나 체제를 보장해주는 결말을 낳게 되므로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 체제를 하루라도 빨리 붕괴시키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므로 그동안엔 북한 주민이 굶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와 다른 노선은 북한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자는 노선이 아니다. 북한에 인권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그것은 남한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원우 기자 등의 글쓰기에선 북한 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매도당한다.
물론 기자가 생각하기에도 수많은 남한 시민들은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하든 북한 문제를 외면하고 싶어 한다. 햇볕정책의 지지자들이 쌀을 보내놓고 북한을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면, 강경책의 지지자들은 김정은을 비난하는 애드벌룬을 보내놓고 북한을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의 차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관심을 가지고 북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방법론이 다른 사람들이 그런 걸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한다. 그저 그들의 삶이 힘들다는 걸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경우,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이들에게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라. 관심이 변화를 가져온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자보 붙이기 전에 너네 부모님에게 먼저 관심을 가져라”와 비슷한 수준의 얘기라면 너무 하나마나한 ‘꼰대질’이다. “햇볕정책이 아닌 강경책만이 유일한 해법이란 것인가?”라고 반문하면 이원우 기자는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 허수아비 때리지 마라”고 반응할 게다. 정성스런 반론까지 보내줬는데도 자신의 견해를 뚜렷하게 개진하지 못하고 발뺌이나 해서는 더 이상 논의가 불가능하다.
이원우 기자는 자보를 붙이는 청년들의 삶을 염려하여 “청년들은 조금만 더 영리해졌으면 좋겠다. 언젠가 무너질 북한에 대해서 미리부터 관심을 가져두는 건 본인의 비전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평소에 안 그러는 편이나, 그 박애정신에 감탄하여 마지막으로 기자 역시 오지랖을 좀 부리기로 한다.
모름지기 주장을 담은 글은 아무도 그것을 읽지 않을 때라도 ‘반론’을 고려해야 한다.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이 그것을 읽고 반박할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원우 기자의 최초의 글은 자보쓰는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자신의 험난한 비정규 노동의 경험을 줄줄이 읊기 시작하면 ‘잘못했습니다. 오해했습니다’ 이외에 할 말이 없는 글이다. 아니면 대꾸 없이 숨어야 할 글이다. 이런 글을 쓴다는 건 이원우 기자가 애초 자보 쓴 이들 중 누구도 자기 글을 읽지 않는다고 기대했거나, 읽더라도 반응이 없을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기자의 박애정신은 그 치명적인 나태함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이원우 기자가 속한 매체의 광고주들이나 이원우 기자의 선배들은 그러고도 ‘안녕’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원우 기자가 그럴 수 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러니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살든, 기자는 이원우 기자가 자신이 비판하는 이들과의 정치적 관점의 대화를 끊임없이 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며 글을 쓰기를 권고한다. 아무도 읽지 않거나 반응이 없을 지라도 그렇게 해야 내적인 대화가 아니라 외적인 대화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지 않는다면 평생 ‘허수아비 때리기’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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