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에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청년들도 반박 대자보를 썼지만, ‘안녕하다’는 답변은 별로 없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 당당하게 “나는 안녕하다”고 선언한 한 청년이 있다. <미래한국> 기자이며 몇 권의 책을 저술한 ‘서른살의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이원우 기자가 그 주인공이다(링크).
이원우 기자는 서두에 장기하의 <별 일 없이 산다> 가사를 인용하며 시작한다. 우리는 결국 모두 ‘별 일 없이 살고’ 있는 거라 말한다. 추워도 스타벅스 커피가 있고, 새벽 4시에도 맥도날드에 주문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 죽여”가 유행인 북한을 바라보며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얘기가 나오냐고 말한다.
▲ '미래한국' 사이트 화면 캡쳐
이원우 기자가 생각한 한국 사회 ‘안녕’의 이유?
그는 우리가 ‘안녕’한 이유로 몇 가지 부적절한 예시를 든다.
“그 뿐인가? 우리는 대통령 더러 ‘몸이나 팔라’고 폭언한 여자 연예인의 초딩 같은 자필 반성문을 진지한 사과의 제스처로 받아들여주는 나라에 살고 있다. 장관을 지냈다는 사람이 장성택 처형과 이석기 사건을 동일선상에 놔도 그를 ‘자유주의자’로 치켜 세워주는 분위기에서 살고 있다. 후배에게 ‘여보 사랑해’라고 문자 보내다 걸린 국회의원이 민주당 원내대변인 자리에서 계속 점잖은 소리할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가?”
첫째, '초딩' 수준의 ‘폭언’을 한 여자 연예인이 '초딩' 같은 자필 반성문을 제출했는데 왜 그게 납득이 안 가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린 일이었다. 부적절한 발언, 치명적인 실수를 했지만 신속하게 모든 일자리에서 잘렸으니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면 국정원 직원의 이름으로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수준의 (이는 정치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내용의 댓글을 조직적으로 게재한 행위는 아직까지도 적절한 수준의 불이익을 받지 못하고 있다. 퍽이나 우리가 ‘안녕’할 이유가 되겠다.
둘째, '장성택'과 '이석기'를 비교한 유시민 전 장관의 발언이 적절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북한 사회와 남한 사회의 격차가 크기에, 애초에 비교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발언도 허용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다. 그런데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이나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 청구 등은 너무 무리한 논리로 그 자연스러운 자유를 탄압하려고 드니 문제다. 이도 퍽이나 우리가 ‘안녕’할 이유가 되겠다.
셋째, 기혼자의 연애나 혼외정사는 비윤리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공적인 차원에서 비판받아야 하는 일인지에 대해선 논의의 여지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당사자의 문제이며, 소송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검찰 수사에 불만을 가진 보수언론이 검찰총장의 혼외자녀 의혹을 터트려 그를 ‘찍어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편 새누리당 의원들은 시위대를 협박하든, 청소노동자의 노동권을 부정하든, 김종필의 5.16 쿠데타 추동을 예찬하든, 온갖 헌법정신에 어긋나는 정신을 저질러도 충분히 ‘안녕’한 시대를 산다. 이 역시 퍽이나 우리가 ‘안녕’할 이유가 되겠다.
북한 사회가 파탄이기 때문에 남한 사회의 ‘안녕’을 얘기하기 어렵다는 태도도 몰상식하다. 북한 사회는 경제상황에서나, 인권의 측면에서나 세계 최악의 수준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북한이 존재하기 때문에 지구별 사람들은 절대로 불평불만을 터트려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그게 <미래한국>의 광고주들에겐 좋은 세상일지 모르나, 이 세상 누가 남의 불평불만을 막을 권리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부적절한 ‘조소’를 굳이 해체해 보자면...
“왼손에는 휴대폰 오른손엔 마우스를 들고 태어나서 입혀주고 먹여주는 삶만 살아본 먹물 주제에 무슨 ‘세상에 안부를 물을 자격’ 따위를 탐낸단 말인가. 몰염치도 그 정도면 병”이라는 서술에서는 참으로 난감함을 느끼게 된다. 국어사전에서 먹물은 “배움이 많은 사람이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다. 물론 이는 생활인들의 고뇌를 모르는 책상물림들을 비웃는 폄하어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경우엔 이원우 기자나 본 기자처럼 매체에 속해 있거나 저술을 하는 이들이 ‘전형적인 먹물’에 포함된다. 하긴 이원우 기자가 배움이 많거나 글을 잘 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더라도 ‘전형적인 먹물’에 속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이가 기껏 대자보 쓰는 이들더러 ‘먹물’이라고 비판하면 ‘이건 뭥미?!?!’라는 반응 밖에 안 나온다.
▲ 288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정원시국회의와 민주노총 주최로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린동 청계광장에서 열린 '안녕들하십니까? 시대의 안부를 묻습니다 1221 대자보 번개'에서 참가자들이 손피켓과 대자보를 들고 행사에 참가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쩌면 이원우 기자는 대자보를 쓰는 이들에게 ‘룸펜’이라거나 ‘잉여’라는 비난을 하고 싶었는데 무언가 단어를 착각하여 ‘먹물’이란 표현을 사용했는지 모른다. 제 손으로 밥 벌어 먹어 보지 않은 이들을 비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웃긴다. 제 손으로 밥 벌어 먹어 보지 않은 이들에게도 사회적 발언권은 있다. 그 대상이 고등학생처럼, 아직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않은 것이 자연스러운 나이대의 이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성인이 된 이 시대의 많은 대학생들은 노동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대자보를 붙였는데, 그들 모두 일을 해본 적이 없을 거란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대자보는 이미 대학사회를 넘어서 확산되었고 노동자들도 붙이기도 한다. 그들이 보기에는 차라리 이원우 기자 쪽이 ‘룸펜’이나 ‘잉여’에 가깝지 않을까?
일의 귀천을 따지는 것은 아니나, 하는 일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는 확실히 그렇다. 이원우 기자가 속한 <미래한국>은 2004년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16면 판형으로 매주 1만5천부에서 2만부를 찍어내고 있다고 한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아직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만일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면 유지비가 제법 들 것이다. <오마이뉴스> 운영비까지는 안 들지 몰라도, <미디어오늘>이나 <프레시안>의 운영비는 넘어설 것이다.
하지만 <미래한국>의 담론적 영향력은 비슷한 돈을 소모하는 진보언론에 비해 희박한 편이다. 이는 담론시장에서의 매체경쟁력이 콘텐츠의 질은 물론 대중의 기호와도 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미래한국>은 개신교 기반의 극우 언론이며 창간사에 “북한동포 해방과 믿음의 공동체 실현”을 목표로 명시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 인권을 말하고 ‘종북 몰이’를 옹호하는 포지션이다. 존재감이 없고 비슷비슷한 글이 양산되더라도, 부자교회와 광고주 기업들을 만족시키면, 밥은 먹고 산다. ‘별 일 없이 산다’란 자기진술의 물질적 기반이 그것이다.
‘땅짚고 헤엄치는’ 언론사 기자가 한 말이라기엔...
허다한 자기계발도서 저자들이 개인의 책임만 강조하게 되는 이유도 비슷하다. 그들이 시야가 편협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책을 팔아서 먹고 살 수 있는 이는 극히 드물다. 자기계발도서를 냈다면 기업의 신입사원 대상 강연에라도 섭외되는 게 먹고 살기에 편한 길이다. 그렇다면 ‘고객’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상품을 제공해야 한다. 차라리 이지성처럼 베스트셀러를 거듭 낸 작가가 되면 “재벌도 비판할 수 있다”는 식으로 독립성을 획득하게 된다.
기자는 진보주의자의 의견이 모든 사회문제에 있어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기업가들의 주장 중에서도 건질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진보주의자들이 글을 쓰며 살아가는 방식과 보수주의자들이 글을 쓰며 살아가는 방식이 매우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다. 기자가 아는 맥락 안에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은 콘텐츠도 없고 문체적 매력도 없는 필자가 ‘밥은 먹고 살 수 있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확실한 길이다.
물론 진보주의자들의 물적 조건이 강퍅하기에 오는 폐해들이 있다.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을 지나치게 무시한다든지, ‘지사연’하면서 자신들의 도덕적 우위를 강조한다든지 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그런 단점들과는 별개로, 이원우 기자가 ‘별 일 없이 사는’ 것이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착각한다면 난감하다. 그의 ‘사상’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나, 적어도 ‘시장’이 돌아가는 원리에는 관심을 가지고 남을 조소하더라도 해야 할 것이다.
‘땅 짚고 헤엄치는’ 이가 수영선수를 참칭하면서, “왼손에는 휴대폰 오른손엔 마우스를 들고 태어나서 입혀주고 먹여주는 삶만 살아본 먹물 주제에 무슨 ‘세상에 안부를 물을 자격’ 따위를 탐낸단 말인가. 몰염치도 그 정도면 병”이라고 말한다면, 참으로 맞받아치기도 민망한 심정이 드니 말이다.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세상에 안부를 물을 자격’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내용에 대해 서로 비판하거나 조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이들을 별다른 근거도 없이 무위도식자 취급한다면, 본인의 삶에 대해서도 그러한 비판을 각오해야 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 식으로 논쟁을 한다면 너무나도 소모적이지 않을까? 그는 대자보를 쓰는 '세상에 안부를 물을 자격'을 박탈하기 위해, 너무나도 무례한 얘기를 한다. 마치 그들이 자기 글을 읽을 일은 없을 거라는 듯, 그들이 뭐라고 받아치든 간에 본인은 상처받지 않을 거란 듯이 말이다. 어째서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 걸까?
'천년 후의 역사책'이 쓰인다면...
이원우 기자는 ‘북한을 생각한다면 너희들 입닥쳐야 한다’는 자신의 논지가 지나치게 무리하단 걸 스스로 자각했는지 너절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그 변명이 이 글을 ‘더 먼 은하계’로 날려 보낸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에게 도리어 묻고 싶다.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아는가? ‘아직 통일이 되지 않은 때’다. 건국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때다.
100년 후, 1000년 후의 사람들은 2013년의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까. ‘반공 시대를 벗어나 완전히 달라진 한국을 살았던 사람들’로 기억할까? 천만에. 일단 우리부터도 과거 사람들을 그렇게 섬세하게 구분해 주지 않는다.
1000년 후의 국사책에서 우리는 결국 ‘대한민국 건국~통일 이전’ 카테고리에 분류될 거다. 삼성전자 영업이익이 아무리 올라가도 결국 우리 시대의 본질을 규정하는 건 북한의 존재라는 얘기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김정은은 ‘강남 스타일’ 없이도 국제적인 인지도를 획득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오직 우리 자신만 북한이 얼마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모른 척한다.
후세의 사람들은 북한의 핵과 장사정포를 머리에 이고 살았으면서도 말춤을 췄던 우리를 신기하게 여길 것이다. 마치 우리가 전쟁이 한창일 때 ‘경성에 딴스홀을 허하라’고 외쳤던 이들을 완전 신기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고작 해야 팩트도 아닌 민영화 루머에 낚여서 짐짓 점잖은 척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물었던 에피소드는 해프닝 축에도 못 낄 거다. 그러니 “때가 어느 땐데”는 내가 해야 할 말이다. 무식(無識)에도, 그리고 외면(外面)에도 정도가 있다.“
이쯤이면 당혹스럽다. ‘별 일 없이 산다’, ‘나는 안녕하다’로 시작된 글이,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통일이 되기 전엔 우리 중 누구도 안녕할 수 없다’로 치닫는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이해나 한다. 사실 우리는 모두 안녕하다고 우기면서 시작된 글이... 이러시면 곤란하다.
그리고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통일이 되기 위해선 남한 사회 누구도 안녕할 수 없으며 건국도 완료되지 않았다’는 견해는 사실 그네들이 ‘종북주의자’라고 칭하는 NL운동권들의 견해와 동일하다. 극우파가 북한 정권을 붕괴시켜야 통일이 가능하다 믿는다면, 그네들은 주한미군이 사라져야 통일이 가능하다 믿는단 차이가 있을 뿐이다. ‘뉴라이트 할아버지’들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한다고 혼날텐데, 저쪽 동네도 어지간히 의견통일 안 된다.
북한의 위협이 있고 통일의 필요성이 있는데, 그래서 어쩌잔 말인가? 북한에 관심을 어떤 방식으로 가지란 말인가? 남한 사회의 ‘종북 세력’ 척결에 협력하고, 북한 정권을 마구마구 비난하면서 증오의 시선을 던지면 정권이 자동적으로 붕괴할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만으로 '행복한 통일'에 이르게 될까? 남한만 지원을 끊는다고 북한이 붕괴할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만주에서 '항김유격대'라도 조직하면서 너희들은 왜 안 따라오느냐고 성질을 내야 그런갑다 하지, 따뜻한데서 편하게 키보드로 글 쓰면서 이게 뭐하자는 신경질인가?
가령 남한군이 북한군보다 월등히 강한 시대에, ‘군량미’ 운운하는 촌극으로 북한주민을 굶기는 걸 방치하다, 북한의 '공산왕조'가 붕괴한 후 중국에 편입되어 버리면 어쩔 참인가? 그럼 천년 후 역사책에서 무슨 평을 들을까? 하긴 천년 후 남한의 영역까지 중국사에 편입되는 결말로 간다면 굳이 악평을 들을 일은 없겠다. '중국 공산당'에 이로운 일을 하며, 적어도 한반도 반쪽을 넘겨줄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을 방치하는 이들이 어떻게 ‘애국자’를 참칭하는가?
▲ 남재준 국정원장(오른쪽)이 23일 오전 국회 정보위 전체회의에에 앞서 정보위 위원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국정원장 취임 이후 그의 일련의 행동들은 대체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는데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는 걸까?(연합뉴스)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남한의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박정희가 뭐가 문제냐. 밥이 인권이다”라고 했던 작자들이 북한 사회에 대해선 “너희들 밥 굶더라도 공산독재 체제가 무너져야 한다”라고 우기는 걸 어떻게 봐야 하나?
쌀이 남아돌아 창고비가 따로 드는 한국 사회가 만약 북한 주민 2천만의 생계를 지속적으로 책임졌다면, 김정일-김정은 체제가 뭐라 선전하든 북한 주민들도 대략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심정적으로 남한 체제에 ‘귀순’했을 거란 정도의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런 종류의 심리전엔 관심이 없고, 남한 시민들을 상대로 ‘댓글 심리전’이나 하는 것만을 '북한을 생각하는' 행위로 옹호할 수 있는 것일까?
현실에 어긋난 멍청한 소리나 늘어놓는 주사파들을, 야당을 탄압하는데 매개채로 쓸 게 아니라 만일 그들이 북한에 가고 싶다고 할 때 자유롭게 보내준다면, 예전에 임수경이 그랬던 것처럼 북한 주민들은 그들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피부 때깔'과 패션을 보고 남한 사회를 동경하게 될 거란 수준의 심리전도 짜지 못하는 걸까? 그런 종류의 사고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보수도 통일이나 안보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상대방을 ‘종북몰이’하고 제 정권을 지키길 원할 뿐이란 걸 국정원 공방이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왜 '종북몰이'에 반대하는 이가 이원우 기자와 같은 이들로부터 북한 문제나 '천년 후의 역사책'을 고민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이 시대 청춘, ‘별 일 없이 산다’와 ‘안녕들하십니까’이 결합하면...
'안녕들하십니까'란 말이 처음으로 범람하기 시작할 때, 기자 역시 장기하의 '별 일 없이 산다'를 그 말의 좋은 짝으로 떠올렸었다. 기자가 이해한 '별 일 없이 산다'의 화자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인 경로'를 향하지 않는 이다. 한국 사회는 제법 폭력적인 오지랖이 횡행하는 사회라, 그런 이들이 있으면 주변의 연장자들이 작정하고 나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충고질을 해댄다. '별 일 없이 산다'라는 대답은 그런 이들을 위한 응대라고 여겼다.
그러나 '별 일 없이 산다'라고 말하고 싶은 심경의 이들이 정말로 '안녕'한지는 또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다른 삶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애초에 사회가 인정하는 '정상적인 경로'가 선택지에서 거세된 상태였는지 모른다. '별 일 없이 산다'와 '안녕들하십니까'가 일견 모순적인 말인 것 같지만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 건 그래서다. 그리고 정말로 별 일 없이 사는 이라도, 그렇기 때문에 남과 세상의 안부를 물어볼 수도 있는 법이다.
이원우 기자의 삶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글에서 밝힌 바 삶에서 징병제 군대에서의 어떤 경험이 가장 고통스러운 어떤 것이었을지라도, 앞으로라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는 악담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 역시 한국 사회의 문제를 벗어나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무슨 사정인지 북녘을 쳐다보며 우리의 '안녕'을 물을 권리가 없다고 믿는 이도, 자신의 문제가 생겼을 때 기꺼이 '안녕'을 말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대자보를 붙이는 이들이 그런 것처럼, 그에게도 그럴 '권리'가 있다.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상식으로 포장하고 살지는 말기를 권고한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도 예의를 차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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