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은 남편이 빚보증으로 추락시킨 가세를 세우려고 발버둥치다가 범법자로 몰린 주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원석이 담겨있다는 가방을 운반만 하면 400만 원의 거금이 들어온다는 제안에 혹해 운반하다가, 프랑스 오를리 공항에서 마약 운반으로 체포된 한국 주부의 비극은, 남편의 경제적인 무능력이 아내를 얼마만큼 수렁에 빠뜨릴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주부 잔혹사’에 다름 아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실제 사건의 모티브인 장미정을 연기하는 정연(전도연 분)을 극한으로 몰아넣는다. 코너에 몰린 권투선수를 내버려두지 않고 쉴 새 없이 연타를 퍼붓는 장면처럼 <집으로 가는 길>은 정연을 최대한 코너로 밀어붙인다.

프랑스 교도소에 수감된 정연에게서 흑인 죄수들이 먹을 걸 빼앗거나, 혹은 여간수가 정연을 성적 만족의 대상으로 착취하려 드는 설정은 타향인 프랑스 감옥에서 정연이 얼마나 처참한 지경에 다다랐는가를 보여준다. 여기서 프랑스인은 정연을 학대하는 공격적인 타자로 설정된다. 타자를 타자 그대로 놓아두지 않고 공격적인 타자로 설정할 때에야만 정연의 설움이 극대화할 수 있다는 연출적인 전략에서다.

헌데 영화는 외국인만 공격적인 타자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외교관 역시 정연에게 수난을 가하는 타자이다. 정연의 프랑스 재판에서 중요하게 작용할 한국 법원의 기록을 캐비닛 속에 처박았다가 결국에는 파쇄기로 갈아버리는 장면이나, TV 다큐멘터리로 궁지에 몰린 대사관 직원이 정연에게 온갖 협박을 퍼붓는 설정은 한국 대사 직원이 정연을 코너로 밀어붙이는 타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적극적인 범행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모르고 저지른 범죄도 국격을 떨어뜨린 범죄자로 간주하는 타자 말이다. 공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후순위로 미뤄두는 관료주의가 자국 외교관 직원을 심리적인 거리감을 두는 존재로 작용하게 만들어버린다. 영화는 대사관의 만행을 그리며 공권력의 부당함을 극대화하여 묘사한다.

공권력의 부당함을 그리는 영화는 <집으로 가는 길>이 다가 아니다. <변호인>에서 공안 경찰 곽병구(곽도원 분)는 영장도 소지하지 않고 대학생 진우(임시완 분)를 납치하고는 공안 사범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한다.

곽병구가 진우를 공안 사범으로 만든 건 물리적인 폭압인 고문에 의해 허위 자백을 하게 만들어 빨갱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곽병구가 강제로 덧씌우게 만든 메커니즘의 결과다. 이는 곽병구라는 공무원이, 대학생에게 빨갱이라는 거짓된 아이덴티티를 덧입히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고 착각하면서 비롯된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국가의 폭압이 곽병구라는 개인을 통해 진우에게 어떻게 끔찍하게 침투하는가를 영화는 김칫국물 고문이나 시퍼런 멍자국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두 영화의 공권력이 지향하는 방향은 다르다. 먼저 <집으로 가는 길>에서 보이는 공권력의 방향은 개인의 일신영달이다. 본국의 국회위원에게 잘 보이고자 접대하는 것이야말로 외교관의 일신영달의 첩경이라는 대사관 직원의 윤리관을 희화화하여 보여준다.

반면 <변호인>의 곽병구는 빨갱이 불순분자를 색출하는 것이야말로 공무원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곽병구의 엄연한 착각이다. 왜냐하면 곽병구의 빨갱이 색출 공안 수사는 빨갱이를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한 젊은이를 공안 사범으로 전락시키고야 마는 폭압의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곽병구 자신의 행동이 공안 정권에 기여하는 철저한 부속품이라는 걸 망각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전자가 일신영달의 방편으로 국민의 세금이나 축내고 자국민을 범죄자 취급하는 외교 공관의 추태를 보여준다면, 후자는 애국한답시고 행하는 고문과 거짓 자백이 실은 나라를 위하는 게 아니라 공안 정권을 위한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공권력의 부적절한 남용을 <변호인>과 <집으로 가는 길>은 보여주고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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