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6일, 딱 하루 동안이다. KBS는 스스로 지금 수신료 인상이 왜 안 되는 것이고 논의 자체가 몰염치한 짓인지를 적나라하게 ‘과시’했다. 이 거대한 집단이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일그러진 ‘생얼’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오전 11시 20분 KBS의 청원경찰들은 대표적 언론단체의 여성회원들을 ‘폭행’했다. 수신료 인상에 반대하는 피케팅을 위해 KBS 본관 시청자 광장에 들어선 언론연대, 민언련, 여성민우회, 언론인권센터 등 언론·시청자단체 여성 네트워크는 채 피켓을 펼치기도 전에 청원경찰들에 의해 밀쳐졌다. 청경들은 취재를 위해 있던 기자들의 카메라도 빼앗으려 했다. 이 몸싸움이 불가피한 것인가? 절대, 아니다. KBS의 참혹한 자화상을 드러낼 뿐이다.

우선, 최상위 공론장 공영방송의 오늘을 지키는 것은 공론장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경외심이 아닌 고작 청경들의 ‘무력’이다. 과거에도 우려가 됐던 이 ‘무력’은 어느새 KBS의 구조로 굳어져, 이제 그 ‘무력’이 없으면 KBS가 운영이 안 될 정도로 폐해가 깊어졌다. 무력으로 운영되는 공론장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에 대한 ‘희롱’이다. 이 ‘무력’을 용인하는 그 언론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은 ‘표현의 자유’나 ‘취재의 권한’과 같은 공론의 원리들보다 자사의 이해관계가 당연히 중요하다. 그래서 언제든 자사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이들은 두들겨 팰 수 있다.

이는 그 자체로 현재의 KBS가 수신료 인상을 논할 기본 자격조차 없단 점을 웅변하다. 무력에 의해 보호되는 공영방송, 언론의 기본적 가치들을 존중하지 않는 공영방송을 위해 인상해주어야 할 수신료가 있다면, 차라리 민주주의는 독재를 위해 개발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공영의 원리들이 관철되지 않는 공영방송을 위한 수신료 인상은 국민의 조세를 털어 가장 힘 쎈 이익집단의 이윤을 보존해주잔 것 이상의 설득력이 없다.

▲ 언론·시청자단체 여성 네트워크(언론개혁시민연대·민주언론시민연합·매체비평우리스스로·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언론인권센터·언론소비자주권모임)는 16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시청자광장에서 수신료 인상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으나, KBS 청경들이 이를 저지해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 (미디어스)

밤 9시, KBS 뉴스9는 첫 번째 꼭지부터 11번째 꼭지까지를 ‘북한’관련 소식으로 도배했다. 이어 6꼭지는 철도노조의 파업이 ‘불법’이며, 정부는 ‘부당’하다 말하고 있으며, 우리는 ‘불편’하다는 것을 확산하는데 할애했다. 전체 뉴스 가운데 2/3가 이 두 사안으로 채워졌고, 그 밖의 뉴스들은 ‘몽골 초원에 눈 덮인 지역이 늘어 한파와 눈이 심하다’는 것과 ‘실내 디스코 팡팡이 위험천만하다’는 우려 그리고 ‘암 치료용 박테리아 로봇이 세계 최초 개발됐다’는 것을 고하는 정도였다.

엇비슷한 시간 JTBC 뉴스9은 군 사이버사령부의 ‘심리전단 활동’이 청와대에까지 보고됐다는 것을 ‘단독’ 보도하며, 채동욱 전 검찰총장 정보 열람 문제, 기독교 거리 집회 등을 두루 보도했다. 그리곤 앵커 클로징 멘트 배경음악으로 영화 ‘러브레터’의 OST 'A Winter Story'를 깔았다. ’러브레터‘의 명대사 ’오겡끼데스까‘는 우리말로 ’안녕들하십니까‘로 의역될 수 있다. 시국에 대한 예리한 ’센스‘, 묵직한 선택이었다. 손 앵커는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멘트 “내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고 인사했다.

JTBC 뉴스9에 비해 KBS 뉴스9의 품질이 이렇다 저렇다를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6일자 KBS 뉴스9은 TV조선, 채널A와 경쟁하는 수준이었고 MBN이나 YTN과 경합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지상파 메인 뉴스가 파파라치마냥 리설주의 동정을 따지고, 김경희의 신변에 대해선 ‘찌라시’ 수준의 북한 이혼 문제로 흥미를 돋우는 걸 보는 건 참담했다. 단언컨대, KBS 보도국의 데스크들은 종편에 영혼이 완전히 잠식당했고 정부의 영혼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공영방송이 뉴스의 기능과 저널리즘의 역할에 대해 최소한의 양심을 이렇게 오래 상실하고 있음은 크나큰 사회적 슬픔이다.

그리고 밤 11시 10분,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는 공영방송의 예능 프로그램 수준이 몇 년 전 케이블 방송이 자극적 소재와 선정적 아이템으로 틈새시장을 개척하던 시절로 퇴행했음을 뻔뻔하게 고했다. 자신의 아내가 ‘야동’ 주인공과 닮았다는 사연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낄낄거리며 유희의 소재로 삼은 16일자 ‘안녕하세요’는 대국민을 상대로 한 성희롱이고, 그 야동에 등장하는 누군가를 향해서는 돌이킬 수 없는 명예훼손과 인격살인을 저지른 사회적 흉기였다.

▲ 지난 16일 방송된 KBS '안녕하세요' 방송화면 캡쳐
공영방송의 전파를 통해 불법적인 영상물이 소환되는 이 희귀한 상황은 공영방송의 보편적 윤리성이 완전히 박살났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KBS가 스스로 사회적 위상과 책임은 완전히 시궁창에 처박고 시쳇말로 ‘뒷골목에서 놀고 싶어 한다’는 걸 드러냈다. 이제 남은 건 KBS가 이 방송을 두고 ‘소재의 자유’나 ‘창작의 자율성’을 운운하는 논리를 동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행여 그렇다면 KBS는 소재 선택의 제한이 없으며, 성적 표현의 자유가 최대치로 허용되는 성인용 PP방송국을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방송에 수신료를 주는 사회는 없다.

공영방송이 스스로를 드러낸 하루였다. 그들은 반대자는 언제든 폭행할 수 있는 집단이며 ‘사회적 흉기’라고 불리는 종편과 저널리즘의 수준을 경합하다 이제는 아예 종편의 보도를 쫓아가는 하류 언론이며, 오락의 품격은 사회적 정화 기능이 아닌 세상의 하수구를 클로즈업하는 그래서 보편타당한 상식으로 살아가는 시청자들에게 수치심을 주는 단계까지 떨어졌다.

그래서 주장이 아니다. KBS의 하루를 보고 냉정하게 든 생각이다. 정말 단언하는데 수신료 인상은 안 된다. KBS 스스로 그것을 요구할, 감당할 그리고 집행할 능력도 처지도 안 된다는 점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고했는데 더 고민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지금 적실한 고민은 사실상을 붙일 것도 없이 위력적 흉기로 기능하고 있는 이 거대한 위악의 공영방송을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KBS가 원하는 건 더 폐쇄적인, 더 편파적인, 더 자극적인 방송인데 이를 굳이 외면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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