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상속자(이하 상속자들)>의 단 두 회를 남긴 지난 한 주 동안 과연 마지막 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와 관련된 많은 기사들이 등장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들은 썰렁했다. 그 누구도 <상속자들>의 마지막 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역시나 김은숙’이라는 찬사를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상속자들>의 현실이다. 누구나 다 알았다. 김탄과 차은상의 해피엔딩으로 드라마가 끝날 거라는 걸. 그건,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상속자들>과 같은 로맨틱 멜로드라마의 해피엔딩은 진리에 가깝다. 물론 다른 경우도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저녁 7시15분에 찾아드는 <오로라 공주>의 경우는 애초 시청자들이 예상했던 남자 주인공 황마마를 제치고 설설희가 남자 주인공으로 등극했으며, 심지어 황마마는 작가의 '데스토스'에 기록되는 기상천외한 결말로 시청자들을 놀래킨다. <상속자들>과 같은 드라마가 뻔한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서 두 남녀의 애정의 롤러코스터에 시청자들이 기꺼이 합류할 자세가 되어 있다면, <오로라 공주>는 스토리부터 말 그대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롤러코스터 그 자체다.

하지만 전혀 다른 재미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2013년의 마지막 팡파레를 화려하게 울리고 있는 두 드라마는 매우 다른 듯하지만, 결국은 비슷한 정서로 우리 곁에 자리잡는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옛말이 있다. 우리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 세대들의 인생을 관통했던 이 말이 2013년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드라마에서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오로라 공주>의 여주인공 오로라는 잘 나가던 사업가 집안의 금지옥엽 막내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은 가업의 몰락으로 하루아침에 식구들과 함께 길거리에 나앉는 처지에 이른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오빠들 대신에 밥벌이를 하겠다며 연기자의 길로 나서던 그때가지만 해도 오로라의 행보는 주도적이었다. 자기 엄마뻘 어른에게도 결코 말상대를 해서지지 않는, 심지어 가정사와 관련한 식견에서는 그에 앞서기도 하는 오로라는 그 당당한(?) 품성을 앞세워 어떤 험난한 세상사도 헤쳐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후 그녀의 모든 일들은 그녀의 매니저로 등장한 설설희의 보살핌이요, 그녀와 다시 조우한 황마마의 어루만짐이다. 언제 배우를 했냐 싶게 황마마와 결혼을 하게 된 그녀는 혹독한 시집살이에 이혼을 하고, 결국 설설희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애정 행보에 거추장스런 어른들은 슬그머니 드라마에서 사라져간다. 드라마 속 그녀는 늘 고난에 시달리지만, 결국 모든 것이 그녀의 행복을 향해 움직인다.

<상속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재벌집 가사를 돌보는 어머니의 딸 차은상은 어린 나이에도 갖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사회성과 말 못하는 어머니가 하지 못하는 일마저 감당하는 가장으로서의 면모까지 지녔다. 하지만 미국에서 운명적으로 마주쳤던 김탄을 사회적 배려 대상자로 간 제국고에서 다시 조우하고, 최영도와 얽히며 20부작 내내 거의 한 회도 거르지 않고 그녀의 눈엔 눈물 마를 날이 없다. 물론 그 서러운 눈물의 대가는 값지다. 김탄은 서자의 아픔을 지녔지만 그 가족사의 극복은 곧 두 사람의 사랑의 성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차은상은 김탄의 고독을 낳은 가족사에 휘둘리거나, 김탄과 최영도의 신경전으로 인해 상처받는다. 애초 어린 나이부터 야무지게 자기 앞가림을 하던 차은상은 가련한 여주인공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불행한 운명에 휩쓸린 가련한 여주인공과 그녀를 보살펴주는 멋진 남자 주인공. 심지어 때로는 남자 주인공보다도 더 여주인공의 맘을 잘 살펴 남자 주인공의 자리인 그녀의 옆자리를 넘보는 또 다른 남자 캐릭터로 연명하는 드라마의 전략은 여전히 드라마 채널의 결정권이 여자인 세상에서 유효하다. 어릴 적 보던 순정만화의 클리셰는 그저 주된 연령층이 누구인가에 따라 버전만 달리할 뿐, 여전히 설레며 만화책을 집어들던 소녀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제 아무리 김은숙 드라마가 매번 빠른 전개와 보다 맛깔 나는 대사로 시청자의 관심을 받았다 한들 그리고 임성한의 마력이 무시무시하다 한들, 결국은 변주요, 본질에 있어서는 달라지지 않는다. 대한민국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며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스타 작가들의 드라마 운용 방식이다.

최근 관심을 얻고 있는 '브로맨스' 열풍은 더더욱 여주인공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오로라 공주>에서 불치병을 앓게 된 설설희는 오로라와 결혼을 한 후, 그의 집에 쳐들어온 마마에 대해 형제애라 하기엔 도를 넘은 감정에 빠진다. 설희의 병이 나은 후 누나들의 성화에 못 이겨 집을 나간 마마를 그리워하다 못해, 오로라와 함께 누운 자리에서도 그를 그리워한다. 마치 허용된다면 셋이 손잡고 사이좋게 살고 싶다는 식이다. <상속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은상을 얻기 위해 혈투를 마다하지 않던 최영도는 어느 순간부터 사랑의 조력자로 변모한다. 차은상은 그가 사랑의 이름으로 가하던 정신적 폭력을 감내하다가, 이제 그의 무뚝뚝한 도움에 눈물을 흘리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남자 주인공들이 여주인공을 둘러싼 사랑의 쟁투도, 혹은 이제 화해의 국면에서 빚어내는 감정도, 여주인공은 그저 바라보고 감당할 뿐이다.

그러기에 <오로라 공주>와 <상속자들>의 인기가 좋다고는 할 수 있어도, 좋은 드라마라고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식의 드라마가 양산될 가능성이 우려되기까지 한다. 어린 시절 한때 보고 지났어야 할 '순정 만화'를 평생 즐기는 건, '취미'나 '오락'이라고 합리화시키기엔 정신적 정체의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그녀들의 텔레비전 세상에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런 남자들은 없다. 제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발버둥을 친다 한들 현실은 그녀 자신들의 몫이다. 그런 현실을 외면하고 텔레비전 속 환타지에 위로를 받는 건 순간의 위로라기엔, 일일 드라마에 미니시리즈까지 너무 길다. 리모컨을 끈 현실조차 퇴행의 마인드로 헤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오로라 공주>의 거듭된 작가의 연장 요청에 대해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인 방송사의 태도는 그를 증명한다. 게다가 임성한 작가는 일찌감치 차기작이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비밀>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던 김은숙 작가 역시 내용이 없다는 한편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기세등등하게 차기작을 준비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잘나가는 스타작가들 때문에 양질의 드라마가 설 자리를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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