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에 실릴 서평에서 다룰 책을 고르는 일은 나름 쉽지 않다. 일단 원고가 평일 마감인 관계로 미리 사두지 못했다면 손에 잡히는 책 중에 적당한 걸 골라 들어야 한다. 비교적 신간일 것, 각 전문분야가 있는 다른 필진들이 ‘더 잘 쓸만한 책’은 뺄 것. 약았게도 못 써도 말이 덜 나올 책을 고른다. 사실 철학 전문서나 훌륭한 인문 교양서 서평도 함부로 쓰면 안 되는데, 이미 다른 지면도 넘쳐나게 존재하는 데다가 정말 전문분야 서평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눈을 돌리다가, 핑크색 책을 집어든다. 아주 조잡하다. 뭔 책을 이리 만들었나 싶다. (미리 밝히자면) 어떤 사연으로 받은 책이다. 원래 다루려던 책이 하필 온라인 서점 당일 배송이 불가능한 도서였고, 교보문고 바로드림으로 책을 주문할까 고민했으나, 나는 술 약속이 잡혀 있으니 서점에 들릴 시간도 없다. 마침 궁금하기도 해서 이 책을 들고 나왔다. 이럴 때는 도박이다. 책이 별로일 경우, 서평 쓸 책을 다시 찾기 위해 예전에 읽은 책을 찾아 머릿속을 뒤져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의 초반부를 읽을 때는 ‘아.. 실패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수는 공사중》은 ‘스탠드업 코디미’의 제왕 로드니 데인저필드가 쓴 책인데, 자서전이라고 보기에는 좀 애매하고 차라리 에세이라고 볼 수 있다. 18세부터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당시에는 코미디언으로 잘 안팔 렸다. 생계가 해결이 안 되니 28세에 연예계를 떠났고, 주택 외장재 외판원으로 10년 넘게 일하며 가끔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겸업했다. 이런 식이다. 외장재를 팔다가 스트레스가 뻗쳐, 마침 들어간 클럽에의 무대가 비어있으면 ‘내가 조금 하는데 무대 세워달라’고 하는 식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전까지는 아무도 웃지 않았던 긴 무명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풍운아답게, 안 팔리던 그 시절에도 여자들과 자려고 참 무던히 노력했다. 코메디가 실패하면, 여자라도! 그런 정신으로 들이대는게 1장부터 등장한다. 심지어 이 책의 헌사에는 ‘아내, 그리고 저를 재워준 모든 여성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고 써있을 정도다.
이 책은 내용 뿐 아니라, 군데 군데 웃긴 요소가 참 많다. 본문과 상관없이 저자의 스탠드업 코메디용 멘트들이 본문 사이 사이에 마구 등장한다.
“우리 아버지는 멍청했어요. 아버지는 비행기에서 승객 호주머니를 터시고는 튀셨죠. 튀셔 봤자 벼룩인데”

“전 어렸을 때 여자애랑 사귀어보지 못했어요. 한 여자애가 ‘우리 집에 놀러 와. 집에 아무도 없어.’ 그래요. 전 신나서 여자애 집에 갔죠. 정말 집에 아무도 없네요”
굉장히 저질스럽고 성적인 농담이 가득한데, 그런 시시껄렁한 걸 책으로 읽다보면 소위 책 자체를 먹물적인 물성으로 인지하는 자신에게 다소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이 촌스러운 표지의 책을 읽고 지하철을 타고 있으면 만원 지하철로 부대끼는 어깨 너머의 눈길이 느껴지는 식이다.
저자가 얼마나 어리버리 했냐면 16세 때 브로드웨이를 걷다가 ‘춤추는데 10센트’라는 광고판을 보고 ‘나도 나이치곤 건강하잖아. 구경해보자’며 가게로 들어갔다. 여자 한 명과 테이블을 잡고 대화를 했고,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눈치라 여긴다. 심지어 여자가 손도 잡아 준다. 저자는 생각한다 ‘나도 잘하네!’ 사랑에 빠졌나. 연인처럼 붙어 10분 정도 이야기를 했을 때 매니저가 테이블로 다가와 “계산할 시간인데요. 6달러네요”라 말한다. 저자 왈, “뭘 했는데요? 춤도 안 췄고, 돈도 한 푼 없는데” 눈 앞의 ‘미스 내사랑’이 말한다. “등신 새끼야, 돈 내놔! 딴 남자랑 춤도 못 추고 이게 뭐야!” 끌려나가는 저자는 말한다. “제가 가게를 내면 춤 한 번에 8센트를 부를 거에요. 할리우드 스타 보러 오세요”
실제로 저자는 방송 코미디언으로 크게 성공한 뒤 코미디 클럽 ‘데인저필드’를 세워 자기 클럽에서 HBO 코미디 스페셜을 제작했다. 순회공연 바람잡이를 2년이나 하던 짐 캐리가 바로 로드니 데인저필드가 키워낸 코미디언이다. 아무리 짐 캐리라도 운수가 사나운 날은 발악을 해도 태반을 못 웃겼다. 잘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서 들었고, 겨뤘고, 될 것 같으면 방송에 같이 출연하자고 꼬드꼈다.
로드니는 직접 대본을 썼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는 방법에 대해 쓴 부분을 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려면 무대에 올라 관중을 웃겨봐야 한다. 경력이 없어도 무대에 설 방법은 있다. 동네 코미디 클럽에 일자리를 얻으면 된다. 웨이터 자리를 알아보고 자리가 없으면 걸레를 빨건 뭐건 가리지 말고 일을 맡아라.

다음은 나만의 대본을 쓴다. 대본을 못 쓰면 딴 직업 알아보라. 처음 시작할 땐 쓸만한 5분짜리 대본을 만든다. 계속 연습하고 수정해서 완성한다. 이때쯤이면 클럽 사장이나 지배인하고 친하고도 남는다. 그러다가 준비가 되면 5분만 무대에 세워달라고 부탁한다. 사장한테 밉보이지만 않았으면 기회를 준다. 돈은 안 줘도 무대에는 올려준다. 새벽 3시 정도로 시간대를 잡으면 군소리할 사장 없다. 취객이 많아야 한두 명 있겠지. 이제 웃겨주는 일만 남았다. 무대에 발을 올리는 순간부터 관객의 호감을 사야 한다.”
여기서 무릎을 쳤다. 세상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정말 많다. 그런데 왜 누군가는 연재 지면을 얻고, 누구는 계속해서 글을 쓰거나, 이름을 알리고 책을 낼 수 있을까? 로드니 데인저필드, 김병만, 그리고 어떤 필자들은, 그리고 모든 직업인들은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자가 되려면 일단 글을 써 사람들에게 읽혀야 한다. 경력이 없어도 글을 쓸 방법은 있다. 블로그와 무가지에 글을 쓰면 된다. 이름만 써줘도 감사하고, 자리가 없으면, 기회를 얻을 수 일이라면 공짜거나 일자리에 알바 자리라도 구해야한다.

다음은 나만의 글을 쓴다. 나만의 글을 쓸 자신이 없으면 다른 직업을 알아보라. 처음 시작할 땐 금방 읽을 만한 글을 쓴다. 계속 연습하고 수정해서 많은 글을 써나간다. 이때쯤이면 아는 사람들이 글에 관해 코멘트를 해주거나 글을 잘 읽었다며 친한 척 하는 사람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갑자기 펑크난 원고에 글을 써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해온다. 처음 온 청탁이라면 일단 무조건 마감을 지켜라, 그리고 절실함을 담아 끝내주게 써라. 아무도 당신 글을 기대하지 않겠지. 이제 갈아온 실력으로 인지되는 일만 남았다. 청탁을 수락한 순간부터 담당자의 호감을 얻어야 한다.”
적어도 나는 이 과정으로 필자가 됐다.
로드니는 호감을 뿜으면 뭘 팔아도 잘 판다고 말하며 “결국은 난 나를 파는 장사했다”고 말했다. 코미디언이란 직업을 스스로를 파는 것이라 정의하는 것이다. 그는 생계 때문에 28세에 코미디언을 관두며, 트럭 운전을 하거나 일을 하며 웃기는 걸 들으면 무조건 적었다. 다 적고 나면 군용 배낭에 넣었는데, 12년 주택 외장재 사업을 하는 동안 군용 배낭을 가득 채웠다. 40세에 나이트클럽에 복귀해 미친놈 취급을 당할 때도 강박증 환자처럼 농담거리를 억척스럽게 적고 다녔다. 스탠드업 코미디의 제왕도 그랬다니까?
그가 사람들에게 빚을 내 클럽의 문을 열자, 모두가 말렸고, 그렇지만 클럽은 30년 넘게 영업했다. 로드니는 꽤 많은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영화 수익을 떠나 자기 돈을 들여서라도 기꺼이 출연했다. 왜냐면 덕분에 유명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그걸 남는 장사라고 말했다. +,-는 눈 앞에 있는 숫자만이 아니다. 진짜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어떤 걸 계산해야겠나?
“수년 전만 해도 25달러만 내면 스타를 볼 수 있었다. 요즘에는 50달러를 내고도 스타 흉내 꾼밖에 못 본다.” (153쪽)
가끔 어떤 스킬들은 인류의 진화와 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퇴화된다. 마당에서 시장에서 관객을 웃겨야 했던 시절의 예능인들은 오늘의 예능인들과 기질 자체가 달랐다. 개콘이 떳던 이유도 대학로에서 단련된 즉흥 개그의 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규격화된 스펙과 계량화된 스킬로는 정리되지 않는 일상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건 바닥에서 구르고, 만들고, 많은 시간에 의한 마모로 이루어진다. 그게 저질 농담이든, 여자를 후리는 기술이든, 마찬가지다.
그렇게 나이가 든 코미디언이 되어서도 방송에 나가 코미디를 하기 위해서는 소재를 30토막이나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그걸 위해 100토막을 써야 한다. 어떤 놈이 터질 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그래서 동네 코미디 클럽에 가서 실험을 한다. 순서정돈도 잘해야 한다. 연속성을 만들고, 올바른 순서를 만들고 단독 스탠드업에 10토막을 쓰고 진행자와 소파에 앉아 진행할 20토막을 남겨놓는다. 한 번의 방송을 위해 몇 시간을 써제껴 몇 밤을 동네 무대에서 실험해야 <투나잇 쇼>에 선보일 놈이 나온다는 거다.
“인생은 영화가 아니다. 인생은 공포와 긴장, 근심, 실망이다. 비유하면 ‘빨아주는 장모와 안 빨아주는 마누라랑 같은 세상에 사는 것’ 그게 인생이다” (216쪽)
로드니 할아버지, 재밌는 사람이다. 책 뒤에 붙은 그의 소개를 빌자면, ‘나만 속고 살지 않았구나, 나만 당하지 않았구나, 주위에서 내가 제일 조무라기구나 하는 느낌을 나만 경험하지 않았구나’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그의 코미디의 매력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타인에게 베푸는 공감, 인내, 연민을 시험했던 거란다. 빌 게이츠와 같은 쇼에 출연하며 빌 게이츠가 떨린다고 말하자 그가 했던 조언이다. “빌, 뭐가 걱정이야? 자네 정도면 그냥 말만 하면 되잖아. 난 웃겨야 한다고.”
이런 일도 있었다.
로드니가 운전 중 신호 대기를 하며 나란히 차를 세운 매력적인 여자가 그를 보더니 “빨아드리고 싶어요”라고 소리친다. 로드니는 영감을 놀래키며 놀리는 여자에게 “돈 내라!”고 외친다. 그가 먼저 출발하자 여자의 신난 웃는 소리와 함께 “로드니!”라는 외침이 따라온다. 로드니, 당신은 죽었지만, 이 책으로 충분히 RESPECT 해요! 전 그렇게 외칠 깡은 없지만요!

미스김

블로그를 운영했던 흑역사를 지닌 미혼의 직장인. 현재 글밥을 먹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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