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에 이어 또 한번 두괄식으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에도 한번 이런 표현을 썼던 것 같은데, 여러분이 만약 12월 중에 단 한 편의 영화만 볼 수 있다면, 저는 고민하지 않고 <어바웃 타임>을 추천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이하는 연말과 맞물려서 참 시기적절한 영화입니다. 이 리뷰의 제목처럼 <어바웃 타임>을 보고 나오는 길에는 놀랍게도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매번 보는 건물과 매번 걷는 길과 매번 마시는 공기마저 전에 없던 것처럼 새로웠습니다. <러브 액츄얼리> 이후로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습니다. 제목으로 쓰고 싶은 말이 차고 넘쳐서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그만큼 <어바웃 타임>은 모든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입니다.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극장에서 혼자 <러브 액츄얼리>를 봤을 때는 상영이 끝나자마자 절로 이런 의문을 가졌습니다. "아니,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지!?" 이 말 그대로 <러브 액츄얼리>는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마력을 가진 영화였습니다. 도무지 제 머리로는 그 힘의 근원을 설명할 수가 없어서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이런 답을 얻었습니다. "리차드 커티스는 분명 스스로 아주 행복하거나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요지는 그렇지 않고서야 관객에게 이토록 행복한 기운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감독 이전에 각본가로 재능을 뽐냈던 사람인 것은 맞지만, <러브 액츄얼리>처럼 관객을 행복으로 물들이는 영화라면 그부터 행복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 사이에 워킹 타이틀이 제작한 몇 편의 영화는 늘 개봉하면서 <러브 액츄얼리>를 들먹였습니다. 홍보와 마케팅에 있어서 이처럼 손쉬운 방법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또한 늘 그랬듯이 <러브 액츄얼리>에 견줄 수 있기는커녕 그 이름을 갉아먹는 영화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바웃 타임>에 대해서도 리차드 커티스라는 이름에 호기심을 가질지언정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제아무리 리차드 커티스라고 해도 <러브 액츄얼리> 같은 영화를 또 만들 수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막상 <어바웃 타임>을 보고서야 그게 엄청난 오산이었다는 걸 아주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두 편의 영화로 인해서 저는 리차드 커티스를 진심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연출과 각본과 연기의 조화

좋은 영화는 시작하고 5분 안에 판가름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바웃 타임>은 이 조건에 부합하고 있는 영화였습니다. 솔직히 왜 그런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평소와 다르지만 이걸 어떻게 글로 명확하게 설명할 재간이 없습니다. 어쨌든 <어바웃 타임>은 딱히 잘난 것 없이 지극히 평범한 남자인 팀이, 아버지로부터 시간여행이 가능한 집안의 내력을 듣게 된다는 황당한 설정조차도 거부감 없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리차드 커티스는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보다는 그로부터 파생시키려고 하는 드라마에 집중하고자 이 대목을 굉장히 유연하게 묘사한 것 같습니다. 더욱이 팀이 처음으로 시간여행을 시도할 때는 그 흔한 클리셰도 없습니다. ("에이~ 역시 안 되잖아!"라고 했는데 성공하는 뻔한 전개)

분명 <어바웃 타임>은 새로울 건 없는 영화입니다. 시간여행을 통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마침내 이뤄지는 이야기는 수십 년도 더 전에 나왔던 <사랑의 블랙홀>의 변주에 다름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하게 되는 실수와 착오 등도 삶의 일부니 후회하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라는 조언도 크게 색다를 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바웃 타임>이 이토록 매력적인 건 당연하게도 리차드 커티스와 배우들의 힘이 절대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리차드 커티스의 각본과 연출에 맞춰 능숙하게 춤을 추는 레이첼 맥아담스에게 홀딱 반했습니다. 이전까지 거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배우였으나 <어바웃 타임>에서는 절로 빠져들게 하더군요. 단여코 근래 최고로 사랑스러운 배우입니다.

냉소와 염세? 넣어둬, 넣어둬!

<어바웃 타임>에 이리도 푹 빠진 건, 놀랍게도 이 영화가 저로 하여금 냉소와 염세 그리고 비판 따위는 완전히 잊고 몰입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리차드 커티스는 앞서 말한 두 가지 이야기를 교묘하게 이어붙이면서도 거기에 아주 일상적이면서 소소한 에피소드를 덧대어 <어바웃 타임>으로부터 상당한 호소력을 발산시키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연출은 그야말로 외유내강이나 유능제강과 같았습니다. 몹시 부드럽고 경쾌하여 가볍게 보일 수도 있지만 바로 그게 깔끔하게 굴복하도록 만들더군요. 그 때문에 평소의 관람태도를 당최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리차드 커티스의 연출과 완벽하게 부합하는 듯한 레이첼 맥아담스까지 가세하고 있으니 이 싸움(?)은 저의 완패였습니다.

<어바웃 타임>이 제 마음을 앗아간 딱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저는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의 리뷰에서 "가난한 자는 행복하고 로또 당첨자는 불행하다"는 말이 개소리라고 단언했습니다. <어바웃 타임>에서도 팀의 아버지를 연기한 빌 나이가 "돈이 행복을 주지는 않는다"는 의미의 말을 합니다. 그걸 듣자마자 "웃기고 있네!"라는 반발이 즉시 용솟음을 쳤는데, 머지않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제가 금세 미소를 지으면서 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어디 미소만 지었겠습니까? 나중에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어바웃 타임>에게 감동했습니다. <러브 액츄얼리>를 봤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까칠하고 날카로운 상태라는 걸 감안하면, <어바웃 타임>은 제게 있어 마법과도 같은 영화입니다.

★★★★★

덧 1) 리뷰를 읽는 분들은 제 호들갑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누구라도 좋으니 만나서 같이 밥을 먹으며 다정하게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싶다는 바람까지 가졌다니까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습니다.

덧 2)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아직까지 제가 이렇게 정서적으로 크게 흔들릴 수 있는 영화가 있고, 그걸 보면서 행복하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말입니다. 솔직히 <어바웃 타임>이 말하고자 하는 건 구구절절 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아주 간단합니다. 허점이나 구멍도 더러 보이고. 근데 영화를 보면서는 "그게 뭐 대수야?"라는 생각을 자발적으로 했습니다.

덧 3) 아르보 패르트의 <Spiegel im Spiegel>은 <그래비티>의 예고편에서도 그랬지만 <어바웃 타임>에서도 사람을 참 차분하고 숙연하게 만드는 음악입니다. 덕분에 무한반복 청취 중인데 괜스레 가슴이 뭉클하게 합니다.

덧 4) 팀의 가문에는 두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 다 아실 시간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부차적인 축복이자 저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바웃 타임>에서 정말 중요한 건 바로 이 후자에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여행을 이용해서 시간여행을 할 수 없는 현실 속의 관객에게 리차드 커티스가 건네는 확고한 주장입니다.

덧) 제목을 <어바웃 라이프>가 아닌 <어바웃 타임>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삶이라는 커다란 테두리를 보기 이전에, 먼저 그 삶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에게 항상 주어지고 있는 매 시간을 소중히 하자는 의미가 담긴 게 아닐까 합니다.


삶에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없다.
오직 이해해야 할 것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야 할 시간이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두려움을 점차 지울 수 있다.
- 퀴리 부인 -

삶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가야 하는 미스터리다.
- 쇠렌 키르케고르 -

만약 누군가가 현재의 순간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면
그에게는 더 이상 달리 해야 할 것도, 추구해야 할 것도 없다.
- 야마모토 츠네토모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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