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그 사이에 워킹 타이틀이 제작한 몇 편의 영화는 늘 개봉하면서 <러브 액츄얼리>를 들먹였습니다. 홍보와 마케팅에 있어서 이처럼 손쉬운 방법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또한 늘 그랬듯이 <러브 액츄얼리>에 견줄 수 있기는커녕 그 이름을 갉아먹는 영화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바웃 타임>에 대해서도 리차드 커티스라는 이름에 호기심을 가질지언정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제아무리 리차드 커티스라고 해도 <러브 액츄얼리> 같은 영화를 또 만들 수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막상 <어바웃 타임>을 보고서야 그게 엄청난 오산이었다는 걸 아주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두 편의 영화로 인해서 저는 리차드 커티스를 진심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연출과 각본과 연기의 조화
분명 <어바웃 타임>은 새로울 건 없는 영화입니다. 시간여행을 통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마침내 이뤄지는 이야기는 수십 년도 더 전에 나왔던 <사랑의 블랙홀>의 변주에 다름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하게 되는 실수와 착오 등도 삶의 일부니 후회하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라는 조언도 크게 색다를 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바웃 타임>이 이토록 매력적인 건 당연하게도 리차드 커티스와 배우들의 힘이 절대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리차드 커티스의 각본과 연출에 맞춰 능숙하게 춤을 추는 레이첼 맥아담스에게 홀딱 반했습니다. 이전까지 거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배우였으나 <어바웃 타임>에서는 절로 빠져들게 하더군요. 단여코 근래 최고로 사랑스러운 배우입니다.
냉소와 염세? 넣어둬, 넣어둬!
<어바웃 타임>이 제 마음을 앗아간 딱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저는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의 리뷰에서 "가난한 자는 행복하고 로또 당첨자는 불행하다"는 말이 개소리라고 단언했습니다. <어바웃 타임>에서도 팀의 아버지를 연기한 빌 나이가 "돈이 행복을 주지는 않는다"는 의미의 말을 합니다. 그걸 듣자마자 "웃기고 있네!"라는 반발이 즉시 용솟음을 쳤는데, 머지않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제가 금세 미소를 지으면서 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어디 미소만 지었겠습니까? 나중에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어바웃 타임>에게 감동했습니다. <러브 액츄얼리>를 봤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까칠하고 날카로운 상태라는 걸 감안하면, <어바웃 타임>은 제게 있어 마법과도 같은 영화입니다.
★★★★★
덧 2)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아직까지 제가 이렇게 정서적으로 크게 흔들릴 수 있는 영화가 있고, 그걸 보면서 행복하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말입니다. 솔직히 <어바웃 타임>이 말하고자 하는 건 구구절절 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아주 간단합니다. 허점이나 구멍도 더러 보이고. 근데 영화를 보면서는 "그게 뭐 대수야?"라는 생각을 자발적으로 했습니다.
덧 3) 아르보 패르트의 <Spiegel im Spiegel>은 <그래비티>의 예고편에서도 그랬지만 <어바웃 타임>에서도 사람을 참 차분하고 숙연하게 만드는 음악입니다. 덕분에 무한반복 청취 중인데 괜스레 가슴이 뭉클하게 합니다.
덧 4) 팀의 가문에는 두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 다 아실 시간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부차적인 축복이자 저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바웃 타임>에서 정말 중요한 건 바로 이 후자에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여행을 이용해서 시간여행을 할 수 없는 현실 속의 관객에게 리차드 커티스가 건네는 확고한 주장입니다.
덧) 제목을 <어바웃 라이프>가 아닌 <어바웃 타임>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삶이라는 커다란 테두리를 보기 이전에, 먼저 그 삶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에게 항상 주어지고 있는 매 시간을 소중히 하자는 의미가 담긴 게 아닐까 합니다.
삶에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없다.
오직 이해해야 할 것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야 할 시간이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두려움을 점차 지울 수 있다.
- 퀴리 부인 -삶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가야 하는 미스터리다.
- 쇠렌 키르케고르 -만약 누군가가 현재의 순간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면
그에게는 더 이상 달리 해야 할 것도, 추구해야 할 것도 없다.
- 야마모토 츠네토모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