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아직 생소한 무언가를 소개하는 책을 읽는 것은 뿌듯하면서도 또 절망스럽다. 아직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무언가를 다른 사람들보다 미리 알게 된다는 것은 뿌듯하지만 그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무언가가 아직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되지 않았다는 것은 절망스럽다.
과학소설 출판기획자 박상준씨가 엮은 국내 최초의 SF 입문서 <멋진 신세계>에 언급된 수많은 작품들에 대한 아이디어와 설명을 보고 그 중 번역된 것에는 환호하고 번역되지 않은 것에 아쉬워 하던 기억. 내겐 그 때가 요즘 유명세를 얻은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시절이다. 이런 기억은 곧 다른 장르로, 다른 분야로 점점 넓어졌는데, 내 경우 시작이 SF였다. 이런 경험은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음악을 좋아하던, 영화를 좋아하던, 미술을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던 입문서에 소개된 작품들을 직접 접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절망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사정은 그 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나아졌다. 해외여행은 자유로워졌고 집 안에서 컴퓨터를 통해 해외의 책이나 문서, 음원, 영상들을 받아볼 수 있고 옷이나 잡화등도 직구매로 구매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출판물은 여전히 그 절망감이 해소되지 않고 떠돌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수익을 보장하기 어렵다고 분류되는 장르들이 특히 그렇다. 어학능력에 따라 원서를 수월하게 읽어낼 수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 다수의 독자들은 여전히 해외에선 해당 장르의 고전이자 걸작으로 추앙받지만 한국 출판계에서는 정식으로 번역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원활한 판매에 따른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책들은 여전히 번역 소개 되지 않는다. 불행히도 SF는 바로 그 장르에 해당한다. 하지만 SF가 아니더라도, 국내에서 그나마 좀 팔린다는 장르의 해외 베스트셀러라도 국내 독자들의 취향이나 시의성에 맞지 않는 작품이라면 역시 어림없다.
소개하려는 존 D. 맥도널드의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의 첫 작품 <푸른 작별>(The Deep Blue Good-by, 존 D. 맥도널드 지음, 송기철 옮김, 북스피어)이 딱 그런 작품이다. 1964년, <푸른 작별>을 시작으로 해결사 트래비스 맥기의 모험은 1984년까지 총 21권이 출간되었다. 집 대신 보트에서 살면서 미국 전역을 떠돌며 사람들을 도와주고 일정액의 보수를 받아 살아가는 풍운아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는 “이언 플레밍의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더불어 미국의 냉전 시대를 대표하는 시리즈물로 손꼽”히며 작가 존 D. 맥도널드는 “1962년 미국 추리작가협회MWA에서 그랜드마스터의 칭호를 받았고, 1984년에는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의 열여덟 번째 작품인 <녹색 살인광>(The Green Ripper)로 전미 도서상(U.S. National Book Awards) 추리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인용한 부분은 국내 번역된 <푸른 작별>의 책날개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추리소설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 인용 부분에 반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추리소설엔 관심이 없더라도 영화 애호가라면 특히 스릴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1991년에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을 맡고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한 영화 <케이프 피어>를 기억할 것이다. 그 <케이프 피어>가 존 D. 맥도널드가 1957년에 쓴 <사형집행인들>(The Executioners)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이렇게 존 D. 맥도널드는 미국에서 성공한 상업작가이고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 역시 20년 동안 21권이나 나올 정도로 매력적인 시리즈(상업적인 성공은 물론이고)였지만 한국에는 그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인 <푸른 작별>은 2012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마지막 작품이 출간된지 약 스무 해 가까이 지나서 비로소 출간된 것이다. 이 책이 국내에 출간되기까지엔 여러 변수들이 작동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단 추리와 스릴러 애호가들 중 해외 특히 영미쪽에 대한 정보에 밝은 이들이라면 이 작품이 영미권에서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국내에도 2012년 1월 번역 출간된 20세기 미국범죄소설사를 총망라한 <하드 보일드 센티멘털리티>(Hard-Boiled Sentimentality, 레너드 카수토 지음, 김재성 옮김, 뮤진트리)는 한국의 추리, 스릴러 독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준 책이다. 미국 사회의 변화와 그에 따른 범죄소설의 변천사를 다룬 이 책에서 존 D. 맥도널드와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는 6장 “가정적인 탐정”에서 로스 맥도널드의 루 아처 시리즈와 함께 상당한 비중으로 언급된다. 이런 위상을 갖춘 시리즈이기에 국내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을 고려했을 것이고 어쩌면 어느 정도 출간이 진행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어떤 이유에서 출간 결정이 중단되었을 것이다. 넘겨짚어보자. 영미권 베스트셀러라고 해도 너무 오래된 작품이라 요즘 한국 독자들의 정서에 맞지 않을 것 같은 것이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푸른 작별>은 어떻게 결국 출간되었을까? 출간을 결정한 출판사의 안목과 추진력이 가장 큰 원동력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아마도 2011년 해외에서 꽤 빈번히 오르내렸던 그 뉴스, 폴 그린그래스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이 <푸른 작별>을 영화화하고 디카프리오 자신이 트래비스 맥기를 맡는다는 뉴스도 출간에 추진력을 주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푸른 작별>은 작년 11월,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덕분에 어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무언가가 아직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느끼는 절망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 영화화된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 <다커 댄 앰버>(Darker than Amber, 1970) 포스터
<하드 보일드 센티멘털리티>는 “트래비스 맥기 연작은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유일한 연작으로, 오늘날까지도 절판되지 않고 계속 유통되고 있다.(274p)”고 소개한다. 1960년대부터 80년대를 아우르는 이 길고 긴 탐정시리즈는 당연히 60~80년대 미국사회의 궤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작가 존 D. 맥도널드는 1916년 생으로 2차세계 대전에 참전한 세대로 <푸른 작별>을 썼을 1964년에는 이미 48세의 중년이었는데 트래비스 맥기 연작은 1985년, 그의 나이 일흔이 다 되도록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 스무해동안 트래비스 맥기 연작은 대중들의 인기뿐 아니라 하드보일드 장르에 한 획을 긋고 한 번은 극장영화로 한 번은 TV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영상화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트래비스 맥기 연작의 장르적 가치와 시대적 의미에 대해서 <하드 보일드 센티멘털리티>는 미국인들이 갖고 있던 가족에 대한 이상이 급격히 붕괴되던 시절인 1960년대에 다시 가족의 가치를 역설하는 따뜻한 탐정을 제시했다고 설명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신을 고집하며 매 작품에서 애인을 갈아치우는 주인공을 통해서.
“트래비스 맥기는 처음부터 가정적이다. 연작 첫 권은 “집에서 조용한 저녁 시간”을 보내는 주인공을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맥기의 가정적 성향은 매우 독특하다. 그는 엉뚱하게도 롤스로이스를 픽업트럭으로 개조하여 몰고 다니고, 플리머스 진을 마시며, 여자들을 좋아한다. 모험이 끝날 때마다 맥기는 자신의 보트와 이웃에게 돌아오는데, 새로운 연인과 함께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맥기는 나무 울타리가 쳐진 집에서의 가정생활이라는 전형을 거부하고, 해마다 “나긋나긋하고 방조한” 젊은 여자들이 새로 나타나는 해변 공동체를 포용한다. 하지만 맥기가 인생 경륜이 있는 여자들에 주로 끌리면서 비키니들은 보통 뒷전으로 밀려난다. 한 번에 한 애인에게 충실하자는 그의 신조는 엄격한 전통주의와 킨지 박사에게서 영향을 받은 성적 개방성의 중간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76~277p)
다른 작품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아 단언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푸른 작별>에서 트래비스 맥기는 “한 번에 한 애인에게 충실”하다. 훤칠하다 못해 거구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에게 많은 여성들이 호감을 나타내지만 (게다가 1960년대 미국 아닌가.) 트래비스는 애인 외의 다른 여성들의 여러 제안을 신사적이지만 단호하게 거절한다. 하지만 한 번에 한 애인에게만 충실하다는 것만으로 가정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들에게 냉정하고 이해타산적인 척 굴지만 트래비스는 결국 그 약자들의 사건을 위험에 비해 너무나 약소한 대가에 맡는다. 그로 하여금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게 하는 원동력은 단순한 정의감을 넘어선, 파괴된 개인과 가정을 복원한다는 사명감이다.
“유랑 기질이 있는 맥기는 비록 자신은 회피하더라도 전통적 가정이라는 이상 자체는 높이 평가하는 것 같다. 일례로 <죽음의 황금빛 그림자>(A Deadly Shade of Gold, 1965)에서 맥기는 애인을 비롯한 주여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는 멕시코에서의 혈전 끝에 거액을 손에 쥐고, 그 돈을 죽은 애인의 동업자(잘 아는 사이도 아닌)에게 거의 다 준다. 그녀가 정치범으로 헝가리에 수감된 남편을 석방시킬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중략) 이러한 제스처를 통해 우리는 트래비스 맥기라는 인물이 타인을 보살피는 부드러운 성정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드러움이 시종 발산되면서 그 모든 고통, 고문, 위험에도 불구하고 존 D. 맥도날드의 비전을 궁극적으로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것으로 만든다.” (278p)
겉으로는 쌀쌀맞은 척 하면서도 안으로는 한 없이 따뜻한 남자. 자신의 그런 성질을 잘 알기에 귀찮고 위험한 일에 빠져들기 싫어 쌀쌀맞은 척 하면서도 결국에는 자신의 성정에 지고 마는 탐정. 이런 매력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청소년 대상 소설인 라이트노벨과 같은 서브컬쳐에서 츤데레(ツンデレ)라고 설명하는 그것과 비슷한 맥락의 매력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트래비스의 성격을 시리즈의 상업적 성공을 위해, 그저 캐릭터의 매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다. 트래비스의 사고와 행동은 작가가 당시 미국 사회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그대로 담고 있다.
“<깊고 푸른 작별>에서 학대받은 여인 로이스 앳킨슨을 보살펴 다시 건강을 되찾게 해 주는 맥기는 농담삼아 자신을 “엄마 맥기”라고 부른다. (중략) 로이스 앳킨슨은 맥기에게 “당신은 … … 친절과 공감이라는 재능을 갖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참으로 공감이야말로 트래비스 맥기를 정의하는 자질 중 하나인 것이다. 로스 맥도널드의 아처와 마찬가지로 트래비스를 움직이는 것은 금전적 이익이 아닌 공감이다. 맥기만의 개별화, 개인화된 공감은 기관화된 공감을 제공하는 정부의 역할이 다시금 전례 없는 차원으로 확대되던 당시의 실정과 대조하여 고려해 봐야 한다.

트래비스 맥기와 루 아처는 도움의 손길이 철저하게 관료주의화되고 있던 시대에 개인으로서 공감을 나누어 주는 인물들이다. 존 D. 맥도널드는 린든 존슨이 대통령에 위임하던 무렵 트래비스 맥기 연작을 시작했다. (그는 본래 주인공의 이름을 ‘댈러스 맥기’로 할 예정이었으나, 케네디 암살 사건으로 인해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케네디 암살 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댈러스다. -옮긴이) 맥기는 온 나라의 에너지가 베트남전쟁과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개혁에 집중되던 뉴딜 이후 시대의 미국 사회에서 공감과 폭력을 함께 행사한다. “위대한 사회”는 다양한 법률을 제정하여 공영 고속열차 사업 투자에서 고속도로 광고판 제거 작업, 깨끗한 공기와 수자원 보존 사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정부를 관여시켰다. 또한 민권 강화. 이민법 개혁, 자연환경 보호, ‘빈곤과의 전쟁’ 등과 같은 중대 사안들을 발의, 추진했다.” (279p)
이 쯤에서 짚고 넘어가야겠다. <푸른 작별>은 1960년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쓰여졌다. 하지만 당시 미국 사회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해서 그 재미가 떨어지는 작품은 결코 아니다. 앞서 언급한 매력을 갖춘 탐정이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스릴러물로서, 장르적 재미가 쏠쏠한 작품이다. 꼭 <하드 보일드 센티멘털리티>가 언급하는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의 의미와 가치를 숙지하거나 동의하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다만 당시에 대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 재미의 스펙트럼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기왕 번역 출간된 어떤 작품이 있고 그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이 있다면 함께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부디 이런 취지에 공감한다고 감히 생각하고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에 대한 <하드 보일드 센티멘털리티>의 평가를 계속 인용한다.
작가는 존슨 대통령이 주창하고 당시 정부가 추진한 “위대한 사회”의 그림자를 주목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이상적인 인물로서 트래비스 맥기를 창조했다.
“그러나 “위대한 사회”의 실패는 거기에 인간의 목소리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280p)

“트래비스 맥기는 20세기의 공공 관료주의와 이익만을 노리는 시장의 복잡하게 뒤얽힌 기업이라는 기계에 맞서 공감적 유대가 친구와 가족과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가정주의적 개인주의를 표방한다. 맥기는 그리하여 정부 후원의 관리가 지지를 잃어 가던 당시 구시대의 개인적 원조 제공자로 자리를 잡게 된다.” (284p)

“도어스(Doors)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강간하는 아들을 다룬 ‘The End(종말)’라는 대작 가요로 히트를 기록하던 시대에, 로스 맥도널드와 존 D. 맥도널드는 젊은이들의 신뢰를 받고 파괴된 가족을 복원하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면 가족적 지원의 대체물을 마련해 주고자 노력하는 사설탐정들을 창조했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전쟁의 당혹스러운 종말로 사회 기관에 대한 공공의 신뢰가 하락하던 그 시절, 아처와 맥기 연작은 기성세대 중 최소한 두 명(아처는 제2차 세계대전에, 맥기는 한국전쟁에 각각 참여한 참전 용사들이다.)은 정의란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것을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믿을 만하다는 주장을 계속했던 것이다.” (290p)
인간의 목소리가 결여되어 실패한 “위대한 사회”의 시대에 존 D. 맥도널드는 트래비스 맥기라는 인간의 목소리를 대중소설을 통해 불어넣었다. <푸른 소설>을 비롯한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는 일인칭으로 쓰여져 그 목소리는 독자의 귀에 더 가까이 지극히 사적으로 들려온다. 냉소적으로 보자면 1916년생의 중년 아저씨가 1960년대 세상 꼬락서니가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것일 수도 있겠는데 이것이 탐정의 이야기, 스릴러 장르와 함께 엮이니 우선 재미가 있다. 그리고 작가가 그저 꼰대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애정을 갖고 만들어낸 캐릭터를 통해 푸념에서 그치지 않고 어떤 대안(비록 매우 이상적이기는 하지만)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는 20년 동안 21권으로 미국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트래비스 맥기의 비범한 점은 그의 거구에서 오는 싸움 실력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항상 자신 안에 들어있다고 믿고 싶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취를 감추는 공감능력과 연민 그리고 그것을 관철하는 능력이다. 자신의 이해관계나 안위를 생각하고 냉정해지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는 그 모습이 그의 비범함이다. 그래서 일견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의 어떤 행동들도 이런 그의 매력 안에서 봉합이 된다. 이를테면 <푸른 작별>에서 단서를 얻기 위해 조지라는 남자를 기절시켜 납치하는 장면에서 트래비스는 이렇게 독백한다.
“새나 말, 개, 남자, 여자, 하다못해 고양이, 그 무엇을 두들겨 패든 마찬가지다. 때리는 놈은 결국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게 된다. 그러한 행동 자체가 자기 자신 또한 연약하단 걸 증명하기 때문이다. 조지의 모든 근심은 잠든 그의 두개골 속에 갇혔다. 신체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스스로 적응해 그의 생명을 지켰다. 그도 과거엔 젖을 빨고, 숙제를 하고, 기사 작위를 꿈꿨으며, 소녀에게 바칠 시를 썼으리라. 언젠가는 누군가 그를 그 자리에서 끌어 내릴 것이고 그가 든 보험은 현금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이방인에 불과한 내가 그를 꼭두각시처럼 다루는 건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 침을 뱉는 일이었다.” (120p)
단서를 얻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자신을 이렇게 혐오하면서도 트래비스는 결국 조지를 고문하겠다고 협박하여 원하는 단서를 얻어낸다. 그리고 단서를 얻자마자 고문 협박은 연기였다고 사과한다. 독자는 트래비스가 무엇때문에 단서를 원하고 있으며 그 단서 때문에 조지를 죽이거나 진짜 고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트래비스를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갑자기 해방된 조지도 분노보다는 안도감과 어리둥절함 속에서 트래비스를 용서한다. 트래비스가 자신의 돈을 뜯으러 온 것도 아니고 자신이 트래비스에게 제공한 단서가 자신에게 금전적인 면에서나 모든 면에서 손해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목표한 바를 능숙하게 처리해내는 것 역시 트래비스의 매력이다. 부자늙은이의 눈물 따위는 가난에 치여 훼손된 가정이나 학대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진 여성을 위해 과감히 감수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양심을 항상 직시하는 것. 한 없이 냉정하고 쿨하고 여러 여자들과 거리낌없이 어울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따뜻하고, 다정하며 한 여자에게 충실한 남자. 그래서 <하드 보일드 센티멘털리티>는 존 D. 맥도널드와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에 이런 평가를 헌사한다.
“두 사람(존 D. 맥도널드와 로스 맥도널드)은 함께 1950년대와 1960년대 하드보일드 소설이 채택한 가정으로의 회귀하는 방향을 상징하고 실행했으며, 그럼으로써 다음 세대에 등장한 수많은 가정적 하드보일드 탐정들, 다시 말해 예상을 뛰어넘는 범위의 감상주의적 미덕을 형상화한 일단의 신세대 탐정들의 앞길을 열어 주었다.” (295p)
내가 읽은 바로는 하드 보일드 소설은 통쾌함과는 거리가 멀다. 범죄로 인해 훼손되는 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그것을 다시 원상복구시키려는 노력이 담긴 장르다. 세월이 흐를 수록 하드 보일드 탐정들은 과거의 초인적인 탐정들의 비범함과는 거리를 두면서 인간적인 한계을 더욱 드러낸다. 그래서 훼손된 무언가를 복구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애처롭고 그래서 아름답다. 그 노력이 항상 성공하는 것도 심지어 좌절되기까지 한다. 그 좌절을 자신 안에서 녹여내는 사람들. 어쩌면 그래서 트래비스 맥기는 자신을 탐정이 아니라 “재난 구조 상담가”(salvage consultant)로 선을 긋는 것인지 모르겠다. 상담가 이상으로 개입하지만 일단 과거의 초인적인 탐정은 아니라는 것.
<푸른 작별>은 모험담이지만 슬픈 모험담이다.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남자의 모험담이다. 그의 통찰은 1960년대 미국에 대한 통찰이기도 하지만 국가와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 사회와 인간, 관계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이기도 하다. 오히려 모험보다는 그 통찰이 담긴 그의 끊임없는 독백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그 독백을 통찰을 더 엿보고 싶다. <푸른 작별>이 출간되었으니 이제 스무 권 남았다.

최원택

드라마 잡지 <드라마틱>과 장르소설 잡지 <판타스틱>의 기자를 거쳐 책 만드는 일을 하다가 곧 자유낙하가 멀지 않은 자유기고가가 되었다. 허영에 휘둘려 책장을 넘기고 마우스를 클릭하다가 깜냥을 확인하는 것도 우직하게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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