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송미경(김지수 분)은 남편 유재학(지진희 분)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말한다. '사랑해'라고. 하지만 그런 아내의 애달픈 사랑 고백에 대한 유재학의 반응은 '부담스러워'이다.

유재학과 밀어를 나누었던 나은진(한혜진 분)은 비를 맞으며 유재학에게 말한다. 어떻게 당신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남편에 대한 연민이 깊어지냐고. 아내에게 단 한마디 따뜻한 말을 건네지 않던 남편 김성수(이상우 분)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울음을 쏟아놓고서는 내가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너라고 고백한다.

단 2회 방영됐지만 이미 이혼을 들먹이고 있는 성수-은진 부부와 달리, 오히려 ‘저 부부는 어떻게 살까’라는 생각이 드는 건 재학-미경 부부이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성수-은진 부부에게는 연민이나마 서로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는데, 결코 이혼을 하지 않을 거라는 재학-미경 부부 사이에는 온기가 없어 보이니까. 여기서 드는 질문은 ‘부부는 무엇으로 살까?’이다.

이제는 학자들에 따라 지금과 같은 부부와 아이 중심의 소가족 형태가 인류가 처음부터 가지고 왔던 모양새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형태와 상관없이, 이른바 '사랑'이라는 이념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족의 탄생은 근대 이후 자본주의 체제의 탄생과 맞물리는 것으로 학자들은 정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거개가 집안에서 정해준 정혼자가 싫어 도피하거나 자유연애를 하는 이야기를 다룬 것은 그저 서양의 영향 때문이 아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경제제도의 변화만이 아니라, 그 경제제도를 담당하는 인간들의 모양새조차 그에 맞게 변화시켰다. 근대 이전의 농업 중심 사회가 그것을 효율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대가족 중심의 가부장적 관계를 추동시켰다면, 근대 이후의 핵가족 관계는 산업노동자로 재편된 근대적 인간형에 맞는 가족 구도인 것이다. 대가족을 등지고 도시로 흘러들어온 개별의 인간 군상들을 맺어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우리가 지상 최고의 이념으로 간주하는 '사랑'이다. 자아에 대한 각성이 공동체 속에서 함몰되어 살아가던 집단의 일부인 개인을 일깨운 근대의 자명종이었다면, '사랑'은 그 개인을 근대사회의 근간으로 묶어놓는 '팡파레'였다.

그래서 우리는 부부관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사랑'이라고 믿으며,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사랑 없이 집안의 강권으로 결혼한 재학과 그를 목숨을 다해 사랑할 것 같은 미경 부부를 '불행'의 편에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네 이웃의 아내>에서 일찍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을 한 상식(정준호 분)과 경주(신은경 분) 부부가 원초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간주하게 된다. 경주의 선물을 낚아채 자신의 사랑의 증표로 만들어 버린 채송하(염정아 분)에 이르면 뒤틀린 관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속설에 '사랑'의 유효기간은 3년이라는데, 그렇다면 그 나머지 장구한 기간 부부의 삶을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흔히 우리 부모 세대들은 그 나머지를 채워가는 것을 '정'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우리 세대에겐 익숙하지 않다. 예전 같으면 소닭 보듯 하는 게 당연한, 일찍 결혼했으면 손주 볼 나이가 된 부부조차도 자신들의 사랑에 대해 고민하는 시대가 되었다. 왜?

'사랑'이라는 지상 최고의 이념으로 뭉쳤다지만 근대 이후에 탄생된 가족은 우월한 노동력을 과시하며 돈을 벌어오는 남편과, 그 남편 아래 복무하는 아내라는 가부장적 구조를 가져왔다. 이는 당신이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하자면 '홧병'이라는 대한민국 여성만이 가진 고뇌의 시간을 넣지 않고서는 구성되지 않는 인고의 시간을 줄줄이 읊어야 하는 우리 어머니 세대만 보아도 당장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대신 어머니들은 밖으로 도는 아버지 대신 가정을 장악하며 늘그막에 실권자로 등극하는 궁극의 권위를 얻는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 이후의 자식들은 더 철저하게 '사랑'으로 뭉친다. 이제 월급봉투를 가지고 위세를 떨 남편은 없으며, 남편과 아내는 동등하게 '사랑'으로 만나고 가정 내 관계도 동등하다. 동등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랑'이 문제다. 남편과 아내로 만나 사랑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 세계 최장의 노동 시간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직장을 가진 남편과 아내들에게 집은 그저 머물 뿐, 대부분의 삶이 직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오피스 와이프라는 단어가 탄생된 것이다.

<네 이웃의 아내>의 상식과 경주처럼, 직장 내에서 만난 이들이 정작 '사랑'으로 형성된 부부보다 더 알뜰하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아끼게 된다. 그런가 하면 빈 둥지 같은 집은 완벽한 아내 경주를 흠모하는 선규와 같은 증상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꼭 필요해서만이 아니다. 감기처럼 불현듯 찾아오는 사랑은, 우연히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은진의 밝은 모습에 마음이 활짝 열리는 재학처럼 어쩔 수 없는 열병에 빠지게 만든다. 이런 시대에 부부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까?

3일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이혼을 결심한 은진을 흔들어놓는 건 '불행한 아이가 되고 싶지 않다'는 딸의 애절한 말 한마디였다. <세 번 결혼한 여자>에서처럼 이 시대의 부부들을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건, 개인의 행복과 개인을 희생한 가족에 복무하는 집단 구성원 사이의 갈등이다. 은수(이지아 분)는 자신의 행복을 짓밟는 시댁을 떨치고 이혼까지 감행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발목을 잡는 건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이다.

대부분의 부모 세대들이 이럴 때 시댁과의 갈등을 인고하며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세월을 살았다면,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다른 선택을 한다.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미경의 배경이 되는 것은 완벽한 주부로서의 모습이지만, 이제 그것은 우리에게 공허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시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아이들을 품고 기르며 온기를 나눠가질 공동체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해 우리는 고민을 한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대 월화드라마로 방영되는 <네 이웃의 아내>와 <따뜻한 말 한마디>는 표류하고 있는 이 시대 부부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이는 그저 남의 집 부부 바람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시대 부부의 속살이자 바로미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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