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를 만났습니다. <머드>의 주인공인 엘리스는 미시시피 강을 끼고 있는 한적한 마을의 외딴 지역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아버지를 도와서 생선을 내다파는 걸 제외하고 무료하게 지내던 그에게 머드라는 남자와의 만남이 찾아왔습니다. 머드는 엘리스가 친구와 함께 높은 나무에 걸린 보트를 보러 갔던 섬에서 부랑자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만난 머드로부터 엘리스는 그가 원래 이 마을에 살았었다는 것을 듣습니다. 지금은 어떤 일로 인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섬에 머물고 있으나 곧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리스와 그의 친구인 넥본은 머드를 도와서 그가 보트를 완성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머지않아 숨겨진 기구한 사연까지 접하게 됩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요즘 단연 화제는 <응답하라 1994>입니다. 대체 이 촌스러운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크게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요?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향수에 젖는 것이 첫 번째 요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하의 세대가 <응답하라 1994>에 열광하는 건 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경? 세 인물의 삼각관계를 다룬 로맨스? 어쩌면 두 부류 모두 지금은 사라진 무언가에 매료된 것은 아닐까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철이 든다는 건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라고. 성장하면서 점차 시야와 식견을 넓히고, 그걸 발판으로 성숙한 사고와 판단을 갖추면서 자기만의 가치관을 이룩하는 게 어른이 된다는 것일까요? 지적인 면에서의 성숙을 제외하더라도 이걸 틀린 말이라곤 할 수 없습니다. 저만 하더라도 세월이 아닌 그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과거를 회상하며 부끄러워했던 경험이 종종 있습니다. 당시에는 굳건한 믿음이나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여겼던 것을 나중에야 어리석은 만용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이 붉어지는 거죠. 그렇게 우리는 크고 작은 실수와 착오를 거치면서 조금씩 성장하여 어른이 됩니다. 보잘것없는 줄로만 알았던 경험은 하나하나 모일수록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지침이 되고, 삶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혜안을 얻게 하곤 합니다.

그런데 정말 어른이 된다는 것은 긍정적인 결과물만으로 이뤄질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오"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모두가 그 말처럼 어른이 된다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은 아닐 것이 틀림없으나 현실은 시궁창이니까요. 성인(聖人)이 아닌 성인(成人)에 불과한 우리는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잃어버리고 포기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순수, 열정, 꿈, 이상, 희망, 끈기, 도전, 노력, 목표, 용기 등등, 이 많은 의지와 각오는 젊은이를 위한 특권이라고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정작 자신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책임을 전가하기 바쁜데도 말입니다. 임상수 감독의 영화 <눈물>에서 봉태규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점점 치졸해지는 것"이라고 하는 대사가 설득력을 얻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철이 든다는 것 역시 세상을 지배하는 불의와의 싸움을 멈추고 그것을 수용하며 굴복한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우리나라로 치면 벽지에서 사는 <머드>의 엘리스는 온전치 못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학교는 제대로 다니고 있는지 모를 형편이고 부모님은 툭하면 다퉈서 이혼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친구인 넥본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누군지조차도 모른 채로 삼촌과 함께 자란 게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스는 예의가 바르고 착한 소년입니다. 단 한 가지,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를 위해 다른 소년에게 무턱대고 주먹부터 날리는 것만 제외하면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엘리스가 절대 막돼먹은 아이라서가 아닙니다. 항상 부모님을 포함한 어른들과 얘기할 때 'Sir'나 'Ma'am'을 붙이는 걸 잊지 않는 이 소년은, 단지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당연한 행동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치기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엘리스가 머드와 만나면서 금세 가까워지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을 이 마을에서 보낸 머드는 '주니퍼'라는 소녀를 사랑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운명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면서 머드는 늘 주니퍼를 따라다녔습니다. 그가 다시 마을로 돌아와 섬에 숨은 것도 주니퍼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머드의 바람과는 달리 주니퍼는 다른 남자와 어울렸지만 그로부터 폭행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이것을 보다가 참다못한 머드는 남자에게 총으로 응징을 가하고 천생연분(이라고 믿은) 여인을 구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주니퍼를 기다렸고, 그 와중에 나무에 걸린 보트를 찾아서 수리한 후에 둘이 함께 떠날 계획이었습니다. 엘리스가 머드에게 호감을 가지고 더 나아가 동경하면서 적극적으로 도와줬던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머드처럼 여자를 보호해주고 때론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순진무구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죠.

머드를 대신해서 주니퍼와 만났을 때도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니까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스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사랑을 현실에서 몸소 실천하고 있는 이 커플에게 동질감과 동정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머드와 주니퍼를 어렸을 때부터 지켜봤던 톰 아저씨가 둘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을 때도, 엘리스는 그저 그가 나이를 먹어 순수하지 못해서 비난하는 것이라고 치부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엘리스의 크나큰 착각이었습니다. 주니퍼는 엘리스로부터 "머드를 사랑하지 않냐?"는 질문에 답하는 걸 머뭇거렸고, 급기야 떠나기로 했던 날에는 술집에 가서 다른 남자와 어울리고 있었습니다. 엘리스는 머드 또한 감언이설을 일삼아 자신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했습니다. 이 순간은 자신의 사랑까지도 바람과 달랐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찾아왔습니다.

이상을 버리고 현실을 택하는 어른

결국 <머드>는 지나치게 맑고 깨끗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석었던 두 소년의 심상이 깨지는 과정에 애정을 담아서 보여주고 있는 영화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 소년은 엘리스와 넥본이 아니라 엘리스와 머드를 뜻합니다. 머드는 육체적으로 어른이 됐지만 여전히 주니퍼를 향한 집착 어린 사랑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습니다. 몇 번이나 같은 일을 겪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과 주니퍼는 운명이라는 믿음을 벗어던지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주니퍼에게 이용당한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니퍼와 톰 아저씨가 머드를 가리켜 '거짓말쟁이'라고 한 이유입니다. 그는 총과 낡은 셔츠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것처럼 맹목적인 광신과 오해와 착각에 사로잡혀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스 역시 스스로 믿고 있었으며 실천하고 있었던 사랑이 현실의 그것과 괴리가 있다는 것을 머드와 한 소녀를 통해서 깨닫게 됐습니다.

<머드>의 두 소년은 비로소 결말에 이르러 공히 사랑했던 여자로부터 주어진 상처를 극복하고 일어섭니다. 머드는 뒤늦게나마 자신과 주니퍼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가까스로 받아들였습니다. 엘리스는 누군가와의 사랑을 쟁취하는 데 있어서 단 한번의 데이트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두 소년은 나무에 걸린 채로 멈춰 있었던 보트가 마침내 강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했고, 태초부터 신이 인간에게 주었다고 하는 두려움(뱀)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세상(섬)에서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익히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마침내 머드는 스스로 갇혀있던 섬을 떠나서 광활한 세상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과거의 자신을 탈피했을 것입니다. 엘리스는 일찍이 머드가 그랬던 것처럼 뱀에 한번 물리는 성장통을 대가로 지불하고서야 현실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두 소년은 어른이 되었지만 <머드>는 단순히 사랑에 국한된 인물의 변화만을 시사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특히 엘리스에게 있어서 사랑을 빌미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가르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소년은 마냥 일방적이었다고만도 볼 수 없는 관계가 어떤 이유에서든 상대에 의해 짓밟히는 것마저 사랑의 한 종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엘리스는 순수하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성숙한 인간이 위한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겠으나, 또 다르게 보면 점차 계산적으로 변해가면서 이상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거나 적응하는 요령을 습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철이 든다는 것, 현실을 안다는 것의 이면은 그런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머드>의 뱀은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를 유혹했던 그것을 넘어 여러 가지를 상징합니다. 엘리스가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미시시피 강가를 정부가 모조리 철거하는 것처럼, 인간이 간직한 순수성도 뱀과 함께 성장을 거듭하면서 지속적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프 니콜스 감독은 이것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머드가 톰 아저씨와 함께 넓은 강을 따라간 것처럼 마을로 옮겨 어머니와 살게 된 엘리스에게는 또 다른 소녀가 기다리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어른이 된 두 소년이 관계에 의한 상처와 치유를 모두 받은 희망적인 결말이 현실에도 통용되길 기대합니다.

★★★★☆

덧) 영화를 보면 금세 떠오르는 작품이 몇 있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리버 피닉스의 성장영화인 <스탠 바이 미>와 마크 트웨인의 소설인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입니다. 마크 트웨인의 두 소설은 <머드>와 같이 미시시피 강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에서 상당히 닮았습니다. 마치 21세기 영화의 마크 트웨인을 꿈꾼 것 같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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