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말 한마디>는 SBS에서 새로 시작한 월화 드라마이다. 방송사는 물론 출연진, 연출진은 더더욱 다르다. 그런데 <따뜻한 말 한마디> 첫 방송은 얼마 전 종영한 <비밀> 같다는 느낌을 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드라마도 <비밀> 같을까란 기대를 하게 된다.

아마도 그런 기대의 상당 부분은 <비밀>이라는 드라마가 차지했던 자리가 워낙 컸던 탓일 것이다. <비밀> 종영 이후에 밀려든 공허감, 그 드라마를 보고 느꼈던 맛을 도무지 다른 드라마에서 찾을 수 없었기에 이제 막 오프닝을 마친 새 드라마에 조급한 기대로 들이밀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다면 <비밀> 같다는, 혹은 <비밀> 같은 드라마라는 건 뭘까?

<비밀>의 시작은 그저 그런 통속극 같았다. 곧 검사 임용을 앞둔 전도양양한 사법연수원생과 미래를 약속한 조그만 빵집 딸내미. 그들이 결혼을 약속한 날 그들의 차에 숨져간, 재벌집 자제가 집안의 반대를 무릎 쓰고 사랑하던 여인. 한결 같은 사랑을 지닌 여주인공은 사랑하는 남자 대신 교통사고를 낸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행을 택한다. 한편 사랑하는 여인과 그 여인의 뱃속에 있던 자신의 아이를 비명횡사하게 만든 사람에 대해 끝없는 저주를 퍼붓던 재벌집 자제는 복수를 다짐하는데.

하지만 드라마는 제목으로 내세운 <비밀>처럼, 마치 끝없이 벗겨지는 양파껍질처럼, 통속극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성공에 눈이 먼 한 남자의 외면은 눈덩이처럼 사건을 키워가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마음의 본질과 상식적 관계의 뒷면, 심지어 우리 사회의 본질적 모순까지 짚는다. '비밀'이라는 드라마의 자막이 매회 화면 속에 출렁 떨어질 때마다, 생각지 못한 비밀을 파헤치는 탐험가의 심정이 되어 가슴이 조여 왔다.

<따뜻한 말 한마디> 역시 시작은 통속극의 모양새를 고스란히 보전한다. 은진(한혜진 분)과 성수(이상우 분), 그리고 재학(지진희 분)과 미경(김지수 분) 두 쌍의 부부가 등장해, 누군가의 외도로 또 다른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워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와 사귀고 있고. 하지만 통속극의 보편적 코드인 외도와 불륜은 <따뜻한 말 한마디>의 첫 회부터 색다른 변주의 모양새를 보인다. '외도'와 '불륜'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제목에서 제시하고 있는 부부 사이의 소통이 이 드라마의 핵심이 될 것임을 첫 회에 충분히 보여준 것이다.

첫 회 은진과 성수 부부는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많은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 은진은 말한다. ‘왜 서로 하나도 대화가 되지 않느냐고,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런 은진의 절규에 대한 남편의 대답은 '반사'였다. 두 사람은 자신의 속에 담겨있는 말을 쏟아내면 낼수록 외로워진다.

그런가 하면 재학과 미경 부부는 살얼음판 같다. 미경은 계속 재학을 눈빛으로 말로 사랑한다 하지만, 그런 미경에게 돌아온 대답은 결국 미안하다였다. 상황 상으로는 사랑한다는 대답을 추궁한 미경에 대한 미안함이지만 그 상황은 미경과 재학의 관계를 고스란히 상징한다.

이처럼 <따뜻한 말 한마디>는 통속극의 소재를 또 다른 의미를 지닌 그 무엇으로 확장할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웰메이드 드라마 <비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드라마 제목에서부터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보여주었던 <비밀>처럼, 첫 회부터 서신으로 협박을 당하는 은진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벌어진 은진 부부 차량사고처럼 미스터리의 영역을 장착함으로써 통속극 이상의 재미를 열어두고 있다.

뿐만 아니다. 드라마 <비밀>을 통해 조토커 등 수많은 별명을 지닌 매력적인 캐릭터로 등극하게 된 지성과 이제서야 연기파로 인정받게 된 황정음처럼, <따뜻한 말 한마디>에는 새롭게 혹은 본좌의 모습을 보이는 배우들의 연기가 있다. 그들이 새삼스럽게 연기를 하는 게 아님에도 드라마를 통해 그들의 진가를 인정받게 만든 캐릭터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따뜻한 말 한마디> 1회에서 선보인 은진 역의 한혜진의 연기는 왜 그녀가 결혼을 한 지 얼마 안 된 새색시 임에도 이 작품에 욕심을 냈는지를 충분히 확인시켜줬다. 한혜진은 빼어난 미모와 안정된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첫 히트작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하게 연기로 주목받은 적이 없어 안타까웠었다. 그런데 <따뜻한 말 한마디> 첫 회 한혜진은 마치 그녀가 <굳세어라 금순아>의 그때로 돌아간 듯 통통 살아 움직인다. 모처럼 제 몸에 맡는 역을 얻은 듯하다.

이상우도 마찬가지다. 항상 남의 아내와 바람이 나는 서브 불륜남으로 고착되는 듯한 그의 이미지가, 말이 안 통하는 아내를 향해 막말하는 성수 역을 만나니 시청자의 입장에서 속이 다 시원해진다.

이렇게 한혜진과 이상우가 그간 보여주던 연기와 다른 모습을 보이면서 활력을 불어넣는다면, 지진희와 김지수는 그들이 가장 잘하는 연기를 통해 극의 분위기를 잡고 안정감을 불어넣는다. 김지수의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띠며 인내하는 정갈한 연기와, 마지막에 홀로 스탠드를 켜고 남편의 불륜이 증명된 사진을 보며 오열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드라마에 온전히 몰입하게 만들었다. 이들 연기만으로도 <따뜻한 말 한마디>가 기대된다.

덧붙여 언제나 그렇듯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작가와 연출이겠다. 이미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를 통해 인정받은 하명희 작가는 <사랑과 전쟁>을 통해 갈고닦은 내공을 단 1회 만에 넉넉히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또한 <비밀>의 절묘했던 연출을 그리워했던 사람들은, 어찌 보면 뻔할 수 있는 은진과 재학의 밀회를 감성 넘치는 장면으로 연출하여 '불륜' 그 이상을 생각해 보게 만든 최영훈 피디의 연출력에 새삼 기대를 걸어보고 싶어질 것 같다.

<따뜻한 말 한마디>는 1회 만에 많은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부디 그저 그런 결말이 아닌,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 우리로 하여금 부부 관계를 넘어 인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웰메이드 드라마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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