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4> 13화, 먼저 고백하고 마음 졸이던 나정(고아라 분)에게 쓰레기(정우 분)가 드디어 답을 했다. 자신을 밀어낼까 두려워 쓰레기 곁에 다가가지 못했던 나정에게 달려가 키스를 한 것이다.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줄곧 쓰레기만을 바라보던 나정이의 일편단심이 보답을 받았는데, 그래서 이 둘의 키스씬을 보는 마음이 행복하고 설레야 하는데 어딘가 모르게 찜찜하다. 심지어 불안하기까지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응답하라 1997>에서 남녀 주인공 두 사람이 사랑을 확인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한참 후, 드라마가 거의 끝날 때쯤이었다.

그런데 1회를 연장한다는 <응답하라 1994>는 이제 겨우 중반을 넘어 13회다. 그런데 남녀 주인공의 교감이라니? 불안하다. 이러다 결국 헤어지는 거 아냐?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인터뷰를 하는 칠봉이가 텔레비전 화면에서 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이제까지 쓰레기가 남편이라고 철석같이 믿던 마음이 흔들린다. 그럼 칠봉인가?

<응답하라 1994>의 시청자들은 매회 자신들이 낚시 바늘 앞에서 무기력하게 입질하는 물고기가 된 기분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난 쓰레기가 좋다. 난 칠봉이가 좋다’ 우겨봐야, 매회 제작진이 던져주는 떡밥에 따라 이리 휘돌리고 저리 휘돌리는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에는 철칙이란 게 없으니까. 우리는 첫사랑을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한다. '첫사랑은 다 안 이루어지는 거라야'라고. 하지만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의 뇌리에 첫사랑이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사는 커플이 떠오르는 건 어쩐담.

지난 회 뜬금없이 해태가 나정 남편감의 다크호스로 등장했을 때도 그렇다. 그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이해해 주던 친구가 남편이 될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 지금까지는 쓰레기와 엮이던 빙그레가 마음을 돌이켜 나정이가 좋다는 설정으로 바뀌어 등장하면, 시청자들은 아마 욕을 하면서도 또 혹시나 빙그레야? 할 수도 있겠다. 천 쌍의 커플에 천 개의 사연이 있듯이, 사랑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기에 그 누구라도 나정이의 인연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파닥파닥 그저 제작진의 처분에 따라 낚이게 되는 것이고.

1994년 청년들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는 <응답하라 1994>를 추동하는 동인은 바로 나정이의 남편 찾기이다. 이것은 이미 <응답하라 1997>에서 주효했던 전략이기에, 보다 능수능란하게 시청자들에게 다양한 떡밥을 던지며 유인해내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응답하라 1994>가 여느 멜로드라마처럼 주인공의 심리에 천착하고 있지는 않다. 회차마다 한 계절을 건너뛰며 주인공들의 감정선도 함께 건너뛴다.

지난겨울 한 해의 마지막 날, 버스 터미널에서 나정이에게 입 맞추며 사랑을 고백했던 칠봉이의 외사랑은 아직 대답이 없다. 나정이의 방문을 수시로 열어 제끼며 들락거리는 칠봉이에게 나정이는 그저 덤덤하다. 기껏해야 반응이란 게 너랑 둘이서 뭐 먹으러 가지 않겠단 말로 친구 사이 이상을 넘어가지 않겠단 답을 13회에 이르러서야 시청자들은 겨우 얻어낼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욱 답답했던 것은 나정이가 그렇게 애태워하던 쓰레기의 반응이었다. 칠봉이가 신촌 하숙에 등장하고 나정이를 좋아하게 되기까지, 쓰레기는 나정이의 감정에 묵묵부답이었다. 오죽하면 쓰레기를 연기하는 정우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부러 그의 감정을 누른다는 음모론이 퍼질 만큼.

계절을 건너뛰듯 감정선을 잘라먹는 <응답하라 1994>임에도 불구하고 놓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13회에 이르러 정우가 자신의 감정을 한껏 내보이고 그걸 다시 칠봉이가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라고' 맞받는 것처럼, 제작진이 던진 떡밥을 언젠가는 회수하는 <응답하라 1994>의 묘미 때문이다. 어쩌면 쓰레기와 나정이는 저렇게 달콤한 키스를 하고도, 다음 회에서 여전히 개와 고양이처럼 아웅다웅하는 남매로 그려질지 모른다. 그러다 또 성큼 곤충이 변태하듯 관계가 진전되고.

그렇게 언제 어디서 어떤 관계의 진전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기에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응답하라 1994>에 낚인다. 마치 청춘의 열병은 교통사고와도 같다는 문구를 되새기게 만들듯이 말이다. 사고처럼 맞닥뜨리는 주인공들의 연애 사건에 우리는 당황해 하면서도, 거기서 빚어지는 뜻밖의 '낭만성'에 또 환호하며 드라마를 열렬히 시청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매회 낚이고 낚이다 보니 <응답하라 1994>가 끝나면 허무해지는 경우가 점점 빈번해 진다. 그렇다고 별 다른 이야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새삼 1994년의 청춘이 이랬는가 돌아보게 된다. 우스개로 80년대의 대학 생활을 한 나는 아들에게 엄마의 시대는 결코 <응답하라 1994>와 같은 드라마로 만들어질 수 없을 거란 말을 했었다. 처음 대학에서 만난 것이 강의실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형사들이요, 매캐한 최류탄에 선배를 만난 곳은 그가 유인물을 뿌리던 건물 옥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응답하라 1994>를 보면 어쩌면 이 제작진이 80년대의 시대를 드라마로 만든다면, 저런 이야기가 아니라 음악을 신청하면 들려주는 DJ가 있는 음악다방, 고고장, 민속 주점, 그리고 거기에서 흐르던 이선희 'J에게', 정수라의 '바람이었나'에, 퀸과 스팅, 에어서플라이의 팝송이 흐르는 또 다른 청춘 연가가 될 듯싶다. <응답하라 1994>의 연세대 학생들이 다니던 바로 그 연세대 캠퍼스에서 1996년 '등록금 인상 반대와 김영삼 정권 대선자금 공개' 데모를 하던 중에 노수석 학생이 죽었다. 그 시대에도 대학가엔 매캐한 최류탄 연기가 떠날 날이 없었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응답하라 1994>의 캠퍼스에 그런 자욱은 없다.

물론 추억을 담은 드라마가 당시의 모든 것을 그려내야 할 의무는 없다. 더더구나 대학을 다녔다 해도 모두가 똑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제작진의 눈으로 본 90년대의 대학 생활은 드라마와 같을 수도 있다. 90년대는 운동을 했던 학생들조차, 자신들의 세대는 80년대처럼 운동권이 주류도 아니었으며 끼인 세대라고 자조적으로 평가하는데, 굳이 그걸 다 그려야 한다고 강권할 이유도 없다.

누군가의 대학 시절에는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투쟁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가장 대표적인 사건일 수 있으니까. 아니 꼭 그 시대 화두를 다루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사랑만큼이나 중요했을, 어쩌면 더 중요했을 그들의 젊은 시절의 고민은 정작 드라마에서는 쉽게 넘어간다. 드라마의 중반을 넘긴 지금까지, 사랑을 빼놓고 <응답하라> 젊은이들의 젊은 날은 순탄하다.

하지만 드라마에 등장하는 세세한 물품 하나가 그 시대의 것이 맞느냐 아니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나정이의 남편 찾기에 골몰하다 허무해지면 문득, 우리가 보는 1994년이 정말 1994년이 맞는가 싶은가 돌이키게 되는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건 '젋은 날의 치열했던 고민의 흔적'이 아니라 '첫사랑의 희미한 그림자'뿐인가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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