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은 백인 소유의 목화 농장에서 태어난 흑인 노예의 아들입니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를 겁탈한 백인에게 단 한 마디의 말과 함께 반감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버지가 사살당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후로 백인의 집에서 '검둥이 하인(House Nigger)'으로 살았지만 머지않아 세실은 고향을 떠나 타지로 향합니다. 먹을 것도 없고 잘 곳도 없이 방랑했던 그는 우연히 한 레스토랑에서 근무를 시작합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세실은 백악관에서 일하는 버틀러로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30년 이상을 근무하면서 무려 8명의 대통령이 미국의 역사와 함께 흘러가는 것을 옆에서 바라봤습니다.

8명의 미국 대통령과 1명의 흑인 버틀러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는 실존 인물인 유진 앨런의 삶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이전에는 버락 오바마가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을 무렵에 워싱턴 포스트에서 다뤘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보고 영화로 옮기기로 결심하였으나 제작비 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다가 이제서야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습니다.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가 늘 그렇듯이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도 픽션을 상당수 가미했습니다. 영화에서 세실은 아이젠하워부터 시작하지만 유진 앨런은 트루먼 재임시절에 백악관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도입부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완전히 허구입니다. 태어난 지역도 다르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백인에게 당했던 치욕도 유진 앨런과는 무관하다고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에는 유진 앨런과 거리가 먼 이야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는 '백악관에서 장기 근무한 흑인 버틀러'라는 소재에 주목한 것 같거든요. 그를 중심으로 미국에서 흑인 인권이 변화하는 역사의 흐름을 담고자 했던 것이 기획 의도겠죠. 북미에선 이를 두고 논란이 있는 모양인데, 저는 그것이 영화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진 앨런의 삶과 다르다는 걸로 비판할 거리는 아니란 얘깁니다.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픽션에 필요한 창작력입니다. 더군다나 <캡틴 필립스>처럼 실존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특정 사실을 왜곡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관용을 베풀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상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에 등장하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실제로도 그렇듯이 영화에서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각 대통령마다 흑인 인권에 반응하는 모습을 통해서 미국이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 옆에는 흑인을 대표하는 세실이 빠짐없이 자리해 현실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실제로 일어났던 굵직한 사건을 보태자 영화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에 그럴 듯한 설득력이 생깁니다. 에밋 틸이라는 소년이 백인들에 의해 죽었다거나, 흑인 인권 운동을 위한 '자유 버스'가 KKK에게 습격을 당했고, 식당에서 백인 전용 좌석에 앉았다고 해서 경찰에 체포되는 등의 일화는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의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도록 하는 역할입니다.

House Negro와 Field Negro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는 여러 명의 대통령을 등장시키면서 짧고 간결한 에피소드를 나열합니다. 이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각 시기마다 있었던 중요한 쟁점을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당대에 흑인들이 처했던 현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요약하는 데 유용하게 쓰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으며,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각기 또 어떤지를 보는 것도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를 흥미롭게 합니다. 이처럼 미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인물을 그린다는 것에서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는 <포레스트 검프>와 유사합니다. 차이점은 이 영화의 경우에는 세실과 아들의 관계에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흑인인권운동과도 직결되고 있습니다.

중반부를 보면 아들인 루이스가 인종차별에 대한 비폭력 항거를 하는 가운데, 세실은 백악관에서 정중하게 백인 정치인들의 시중을 드는 것을 교차편집으로 나란히 붙이고 있습니다. 이는 같은 사회에서 같은 인종으로 살아가지만 사뭇 다르게 적응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해당 장면은 말콤 엑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하며 참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마틴 루터 킹과 달리 극단적인 투쟁을 선포했던 말콤 엑스는 한 연설에서 'House Negro'와 'Field Negro'의 차이를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후자가 들판에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온갖 괄시와 모멸을 겪는 동안에, 전자는 백인 옆에 붙어서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현실에 만족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면서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에서 세실과 루이스가 각각 뭘 상징하고 있는지는 아실 겁니다. 하지만 흑인인 리 다니엘스 감독은 'House Negro'를 일방적으로 비난하진 않습니다. 그는 말콤 엑스와 함께 흑인인권운동의 한 축을 세웠던 마틴 루터 킹의 입을 통해서 그들 또한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옹호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큰 상실을 겪고도 정작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왜 참전했는지조차 모르던 세실도 끝내 변합니다. 백악관 만찬에 게스트로 참석하고서야 실상과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와 각성이 모여 마침내 미국은 버락 오바마라는 흑인 최초의 대통령을 탄생시켰다고 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는 날카로운 비판 대신에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선택했습니다. 결말부에 다다르면 감상주의에 젖어서 감정 과잉에 빠지는 것이 아쉬웠으나, 아마 제가 흑인이었다면 어쨌든 미국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Fact)' 하나만으로도 현실을 재상기하면서 감격 그 이상의 감정에 사로잡혔을 것 같습니다.

★★★★

덧 1) 포레스트 휘태커는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로 또 한번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노려볼 수 있겠습니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최상급이었습니다. 특히 오프라 윈프리는 모처럼의 영화 나들이에도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덧 2) 세실의 시점에서 진행하는 영화인 탓인지 존 F 케네디의 죽음에 비해 마틴 루터 킹의 죽음은 정말 짤막하게 다뤄서 의아했습니다. 말콤 엑스에 대해서는 언급도 극히 적었고 그의 죽음은 아예 영화에서 다루지도 않았습니다.

덧 3) 미국의 대통령 중에 인종차별주의자 혹은 위선자가 있다는 것도 까발리고 있습니다. 가장 노골적이었던 게 닉슨과 레이건인데, 닉슨이야 워낙 미움을 산 대통령이니 넘어가는 모양이지만 레이건의 묘사를 두고는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에게 강한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흑인과 백인을 차등 대우하지도 않았고,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대응도 영화에서 슬그머니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중적인 면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건 좀 조심했어야 할 부분이네요.

덧 4) 반대로 흑인에게 호의적이었던 대통령으로는 린든 B 존슨과 존 F 케네디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흑인만이 아니라 인권신장에 힘을 썼기도 했죠. 마지막에 세실은 존슨의 넥타이 핀과 케네디의 넥타이를 매고 백악관에 갑니다.

덧 5) 세실은 우리나라의 기성세대 다수와 기가 막히게 닮았습니다. 그는 어릴 적에 보았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백인에게 저항하지 않는 법을 체득했습니다. 백인을 모시는 버틀러로서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법을 배웠고, 그 일환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때문에 아들 루이스가 흑인을 위해 나서려고 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나름의 사연은 있지만 말콤 엑스가 비판한 'House Negro'의 전형에 가깝죠. 세실과 우리나라 기성세대 다수의 차이점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궁금하고 통탄할 노릇입니다.

덧 6) 알렉스 페티퍼는 천하의 개X놈으로 출연했습니다. 아이돌 스타인데 이렇게 악역인 데다가 비중도 적은 캐릭터를 마다하지 않은 게 놀랍네요. 하긴 저 많은 스타들이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에 총출동했다는 것만큼 놀랍진 않습니다. 이래서 미국을 마냥 비판할 수만은 없습니다. 자국의 그릇된 역사를 비판하는 데 동참하는 걸 전혀 머뭇거리지 않으니까요. 더군다나 이 배우들이야말로 'House Negro'처럼 수수방관해도 개인의 안위에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덧 7) 우리나라에서는 연일 정치적 이슈가 터지는 마당에도 젊은이 대다수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요즘 대학생들이 어디 대학생이냐고 비판하는 의견도 적지 않습니다. 저도 일부 동의하지만 무작정 덮어놓고 비판만 할 수는 없는 것도 암담한 현실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남의 나라 언어나 배우라고 선동하고 강요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좋은 대학에 가고 대기업에 취직하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라고 폭압적으로 가르치는 사회에서 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와중에도 '캣니스'가 나타나길 바라는 건 기성세대의 허황된 바람이자 욕심이죠. 젊은 세대가 변하려면 기성세대부터 먼저 나서야 한다는 걸 깨달아야 하는데, 정작 도전이 필요한 건 자신들이란 걸 모른 채로 'House Negro'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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