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그 토니 원숭이가 결혼하자카면 할끼가." 바나나 우유를 뺏어 물며 무심코 던진 윤윤제의 질문에 성시원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아니. 안 할낀데." 안승부인이라더니, 결혼 거부 의사의 이유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내보다 더 좋은 여자 만나야지." 이 제작진들 뭘 좀 안다 싶어서 손뼉을 쳤다. 그게 바로 성시원이 말하는 아가페적 사랑인기라. 신이 인류를 사랑하는 것처럼. 기브앤 테이크가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 그게 바로 팬순이의 기본 마인드가 아니겠나.

하지만 1994의 성나정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으로 이상민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내는 그래도 가능성 있는 장사다. 오빠야랑 결혼할 가능성." 마치 서태지 팬 윤진이가 아닌 1997의 성시원을 반박하듯이. "아 솔직히 가수랑 탤런트는 우리 같은 일반인이 만나가 연애하고 그런 관계는 쪼매 힘들 수가 있거든. 근데 이상민 오빠는 한 번씩 숙소 가재, 얼굴도 비주고, 얘기도 해보고, 운 좋으면 전화 통화도 안 하나." 오로지 오빠와 같은 대학을 다니고 싶다는 일념으로 명문대 합격의 신화를 이룬 최강 근성녀 성나정. 현실과 판타지를 명확히 구분했던 성시원과 달리 성나정의 캐치프레이즈는 꿈은 이루어진다였다.

그런 성나정이 더 이상 이상민 오빠와의 결혼을 꿈꾸지 않게 된 것은 판타지의 대리만족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날 밤, 그 병실의 침대 위에서, 40초만 데웠을 따뜻한 우유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 눈이 부실까 커튼을 쳐주고 내가 아픈 것보다 더 아픈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쓰레기 오빠. 멋도 맛도 몰라 금수라고 불리는 그가 내 기호만큼은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요구했던 서태지 2집을 싫은 얼굴 하나 없이 꺼내놓는 이 사람. 아마 나정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참, 이 오빠는 그런 사람이었지. 투덜거리면서도 잠이 올 때까지 머리를 쓸어주고 커튼 대신 손으로 눈가리개를 해주던 사람. 투박하게 데워온 우유를 태워 먹는 날도 있었지만 언제나 내 부탁만큼은 들어줬던 오빠. 내가 울먹이면 결국 뭐든 양보해준 쓰레기 오빠. "나에겐 오빠가 하나 있다. 어릴 적 나의 꿈은 오빠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나정이는 마치 각인된 감정을 각성하듯 눈을 뜨며 읊조렸다. "내 머릴 쓰다듬던 오빠의 손. 오빠의 숨소리. 오빠의 냄새. 오빤 분명 그대로였는데 그날 난 오빠가 낯설어졌다."

판타지에 짓눌린 현실을 뒤늦게야 바라본 성시원의 사랑이 파랑새를 찾아서였다면 나정은 현실에 파묻힌 판타지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래서 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만이었던 성시원과 달리 나정의 사랑은 더욱 끈덕진 집요함이 필요했다. 노력과 기적, 전자는 그녀의 인생 모토였지만 꼼수를 요원하지 않은 그녀에게 기적은 낯선 바람이었다.

나정에게 그가 꿈이었던 것처럼 그에게 있어 나정은 상상조차 금기되는 판타지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나정을 곁에 두고도 결핍되어 있었다. 언젠가 신촌 하숙의 식사 후 풍경이 내겐 꽤 이질적인 그림으로 다가왔는데 설거지를 나누는 칠봉과 나정. 그리고 분주한 가족들 틈바구니에서 홀로 웅크리고 앉아 상실의 시대를 읽는 쓰레기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정은 오빠가 떠난 날 그가 남겨두고 간 상실을 되새겨 본다. 나정을 곁에 두고도 상실의 시대를 살았던 쓰레기와 그를 잃은 이후 상실의 시대를 헤매는 나정.

다시는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했다. 만남을 거부하는 나정을 쓰레기는 예전처럼 그러마하고 넘겨주지 않았다. 건널목 앞에 서있는 그녀를 향해 그는 외쳤다. "안 뛰어오나."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흰 선을 넘어와선 멈춰서는 나정. 최악의 경우엔 이별 통보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고 싶었던 그녀는 얄궂은 기마 자세까지 하며 그의 마음을 다독여봤다. "알겠다. 줄게. 빨리 온나. 빨리." 멈춰 서서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며 나정은 깨닫는다. 아, 너무나 많은 길을 나 혼자서만 걸어오고 있었구나.

오빠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그간 일방통행만이라 해도 충분했다. 날 사랑해주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내가 가끔 이러면 그만 안아만 줘. 대답을 듣지 않는 것이 차라리 편했던 지난날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도 다름 아닌 쓰레기 오빠가 나를 사랑해주는 일 따윈 기적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나는 기적의 요행 따윈 어울리지 않는 성나정이니까. 하지만 멈춰 서있는 오빠를 보며 깨달았다. 이 순간 내가 달려가면 이건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 꿈에 불과하다고. 이제는 두렵더라도 그의 마음을 받아들어야 할 시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멈춰 섰다.

건널목을 뒤로하고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는 나정이를 보니 문득 국내에서도 리메이크되었던 일본 드라마, 101번째 프러포즈가 떠올랐다. 연인을 잃은 트라우마로 사랑을 거부하는 그녀를 위해 횡단보도 위에 서서 똑같은 포즈로 다가오는 트럭을 응시했던 주인공. 그리고 그가 외쳤던 한마디. "나는 죽지 않습니다." 내가 던진 승부가 최악의 결과로 돌아오진 않을까.

초조한 얼굴로 서 있던 나정은 그 무엇보다 안심되는 오빠의 미소에 눈물 젖은 눈으로 확신을 가졌다. 기적의 가능성을. 그래서 그녀는 아예 눈을 감고 보다 확고한 포즈로 팔을 벌리고 섰다. 저런 미소를 짓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먼저 다가와 나를 안아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어떻게 이런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다는 얼굴의 쓰레기인지라 그가 나정을 안아줄 것임은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하지만 목마른 듯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키스라니. 그야말로 시청자의 허를 찌른 전개였다.

어디까지나 ‘너에게’는 오리지널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성시경의 ‘너에게’가 그렇게 감미로울 수 없었다. 저돌적으로 다가섰다가 나정의 볼을 잡곤 부드러워지는 키스가. 아직 키스에 서툰 스물한 살이 그를 받아들여 주고 나서야 보다 확고해진 입맞춤의 농도. 두 사람의 주위를 둘러싼 꿈결 같은 안갯속의 배경마저도. 그건 바로 꿈같은 키스였지만 용기를 내고 다가섰기에 현실이 될 수 있었다. 어느 멜로드라마나 키스신이란 화룡점정이겠지만 이 커플의 키스만큼 애틋할 순 없었으리라.

울먹이는 소녀를 위해 오빠가 되어준 어린 날의 그가, 그렇게 그의 보호를 받고 성장한 스물한 살의 나정이가, 이루어질 수 없는 판타지라며 밀어냈던 이 아이를 받아들이는 순간이, 어쩌면 십 년은 더 넘었을지도 모를 그들의 오래된 러브스토리가. 치유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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