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딕>의 이야기는 전편인 <리딕: 헬리온 최후의 빛>으로부터 일부 이어집니다. 흉폭한 종족인 네크로몬거로부터 헬리온 행성을 구한 리딕은 의도치 않게 통치자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늘 그를 제거하려고 했던 사령관의 음모에 빠져 이름 모를 행성에 홀로 남는 신세가 됩니다. 한쪽 다리마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던 리딕은 자신이 현상수배범이라는 것을 이용해 탈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구조신호를 보내자 그를 잡으려고 현상금 사냥꾼 무리들이 행성에 찾아온 것입니다. 이들과 싸움을 벌이면서 비행선을 탈취해 떠나려고 하지만 뜻밖의 위기가 찾아오고 맙니다. 이제 현상금 사냥꾼들과 리딕은 적과의 동침을 해서라도 함께 행성을 탈출하려고 합니다.

The Chronicles of Riddick

<리딕>은 <에이리언 2020>과 <리딕: 헬리온 최후의 빛>에 이은 시리즈 3편입니다. 본디 이 영화는 속편으로 제작될 의도를 갖고 탄생했던 건 아닙니다. 감독인 데이빗 트워히는 미리 계획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제작 당시부터 확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첫 편인 <에이리언 2020>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2000년에 개봉했던 이 영화는 당시 영화광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리딕이라는 안티 히어로 캐릭터와 빈 디젤의 연기, 이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짜임새를 갖췄던 이야기, 폐소공포증을 유발하는 배경과 크리처, 그리고 SF지만 턱없이 부족했던 예산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 모든 것을 조화시켰던 데이빗 트워히의 연출 덕에 거의 컬트 영화에 가까운 인기를 얻었습니다.

빈 디젤이 결정적으로 주목받았던 계기도 <에이리언 2020>이었고, 덕분에 제작사였던 유니버설은 리딕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속편을 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04년에 <리딕: 헬리온 최후의 빛>이 나오기 전에는 게임과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하여 리딕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심지어 '리딕 연대기(The Chronicles of Riddick)'라는 거창한 제목까지 달아줬습니다. 그러나 정작 속편으로 제작됐던 <리딕: 헬리온 최후의 빛>은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실패했습니다. 일전에 한번 얘기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전편이 왜 인기를 얻었었는지를 철저하게 망각했던 것이 화를 자초했습니다. 할리우드답게 장르까지 현란한 SF 판타지로 변경하면서 갑작스레 잔뜩 스케일만 키우고는 정수를 외면했었죠.

그로부터 10년 가량이 흘러 돌아올 <리딕>의 예고편을 보고 기대했던 건, 데이빗 트워히가 이번에는 <리딕: 헬리온 최후의 빛>이 실패한 요인을 분석하고 반영했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예고편만 봐도 <리딕>은 <리딕: 헬리온 최후의 빛>의 영향은 거의 사라진 대신에 <에이리언 2020>을 절로 떠올리게 합니다. 본편은 뭐 말할 것도 없습니다. <리딕>의 도입부는 전편에 등장했던 네크로몬거 종족의 사령관인 바코와 리딕의 사연을 흘리면서 연계성을 슬그머니 드러냅니다. 이것은 리딕이 홀로 황폐화된 행성에 버려지게 된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윽고 데이빗 트워히는 리딕의 입을 빌려 자신의 의지를 천명합니다. "세상에 물들어있었던 내가 문제였다. 이젠 본래의 나로 돌아가겠다"

태초로 돌아간 리딕

결연한 각오를 내보인 <리딕>은 실제로도 2편이 아닌 1편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돌아갔습니다. 일단 배경부터가 그렇습니다. 리딕이 남은 행성은 <에이리언 2020>의 그것처럼 온통 돌과 바람, 먼지만이 가득해 사람이 살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설상가상 온통 사납고 치명적인 괴생물체마저 가세한 이 행성은 흡사 지옥에 가깝습니다. 이런 폐허에서 리딕은 예의 살벌한 생존본능을 발휘하면서 용케 생명을 유지합니다. <리딕>의 도입부는 그와 같은 상황을 묘사하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화가 <리딕: 헬리온 최후의 빛>처럼 방대하고 화려한 이야기나 특수효과가 아니라, 태초로 돌아가서 <에이리언 2020>처럼 소박하지만 독창적인 캐릭터에게 집중하겠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리딕>은 <에이리언 2020>이 그랬듯이 처절한 생존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리딕은 언제나 냉혈한에 가까웠지만 이 또한 자신 외에는 그 누구의 안위에도 관심이 없는 인물로 돌아갔습니다. 그나마 그가 가지고 있던 인정은 죽어가는 현상수배범과 의도치 않게 애완용으로 기르게 된 개(?)로 인해 조금 보여지고 있습니다. 데이빗 트워히는 <에이리언 2020>으로 돌아가 중심에 서야 할 캐릭터를 탄탄히 정비하고 남은 이야기를 펼칩니다. 그 사이에는 2편에 살짝 발을 담근 것처럼 1편과도 연관이 있는 설정을 더하면서 시리즈의 혈통을 간신히 지키려고도 합니다. 다른 무엇에 기대기보다는 자신의 손으로 빚은 캐릭터와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란 걸 깨달은 걸까요?

이건 마치 헝그리 복서가 챔피언에 오르면서 부와 명예에 빠져 흥청망청 살다가 처절한 패배를 당하자 그제야 각성하는 것만 같습니다. 약 10년이 흘러 제작하긴 했으나 메이저 영화가 아닌 독립영화로라도 명맥을 유지하려 했고, 빈 디젤 또한 제작자로 나서 사비를 보탰을 정도니 두 사람 다 리딕에 대한 애착은 큰 것 같습니다. 덕분에 <리딕>은 기본에 충실하면서 복귀에 나름 성공했습니다. 다만 수차례 언급했듯이 <에이리언 2020>이 보여줬던 것을 재차 답습하고 있다는 인상만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자승자박을 피하려고 그런 것인지 밤이 아닌 낮을 주로 택하고는 있으나, 이것은 오히려 리딕이 가진 특성 중 하나를 죽이면서 스릴을 반감시키는 역효과를 불렀습니다. 계속해서 시리즈를 이어가려고 한다면 데이빗 트워히에게는 연출 이상으로 지금보다 더 참신한 이야기와 캐릭터의 변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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