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심연, 죽음, 그리고 여성. 그들은 하나이다” -Wolfgang Lederer -

2013년 7월 26일, ‘남성 인권’ 보장과 ‘역차별’ 철폐를 주장하던 시민단체 대표가, ‘단돈’ 1억을 위해 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허망한 죽음은 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다. 강물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칠흑 같은 물길을 일으켜, 다만 고요히 흘러간다. 그때, 나는 수면에 뜬 그림자를 보았다. 우리 사회에 드리운 불길하고 위험한 얼룩을. 저 기이한 파문을 자아내는 심연 속에서, 지금 떠오르고 있는 하나의 유령을. 무엇을? 바로 여성혐오(Misogyny), 반여성주의(Antifeminism)라는 망령을!

인터넷의 여항을 거니노라면, 문득 아득해지곤 한다. 사치와 낭비로 치장하는 ‘된장녀’, 남친에게 감사할 줄 모르고 삿된 요구를 퍼붓는 ‘보슬아치’, 이 남자 저 남자 등쳐먹으며 팔자 고칠 궁리에 골몰하는 ‘김치녀’. 깜냥도 없이 어깃장을 일삼는 여성가족부 ‘꼴페미’들. 그곳은 염치없고 상식없고 ‘더치페이’ 없는 ‘무개념녀’의 군상이 성토당하는 소굴이다. 나는 지금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숱한 남초 사이트에서 여성혐오는 기승을 부린다. 놀라운 것은, 출처를 확인할 길 없는 허황된 풍문들이 별다른 의심도 없이 승인돼 버린다는 사실이다.

여성혐오(Misogyny)는 뿌리 깊고 유구하지만, 2013년 한국에선 젊은 남성들이 대오를 이룬 채 전에 없던 노성을 터트리고 있다.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이들은 오프라인에선 실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 여론은 산개된 채 아우성을 토한다. 반여성주의, 여성혐오의 둥치가 뻗어나감에도, 그를 진단할 척도는 충분치 않다. 근래 방영된 일군의 드라마는 의미심장한 징후를 품고 있다. 거기서 남성과 여성의 위상은 도치돼 있으며, 남근적 환상이 이지러져 있다. 지금 문화비평의 소명은 문화를 정치로 읽어내며, 공동체를 사유할 경로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제 여성혐오의 지반과 장르의 계보를 아우르며 텍스트 비판을 수행할 것이다. SBS 드라마 <야왕>은 명명백백한 여성혐오 텍스트이다. 앞으로의 글은 이것을 증명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주다해는 사람 잡는 마녀야. 마녀는 사냥을 해야 해!” (SBS 드라마 <야왕> 18회)

변주되는 장한몽 서사, 그리고 남성 포르노그라피

1913년, 소설 <장한몽>이 발표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수일과 심순애’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었다. 둘은 사랑하였지만, 여자는 부를 가진 남자의 품으로 떠난다. 애정과 재물이 밀고 당기는 트라이앵글 안에서, 홀로 남겨진 남자는 배신의 아픔에 사무친다.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리도 좋더냐?”

1978년, MBC 주말 드라마 <청춘의 덫>이 전파를 탔다. 역시 남자와 여자가 있었고, 둘은 사랑하였지만, 이번엔 남자가 여자를 떠난다. 다이몬드에 눈이 멀었던 심순애는, 스스로 뉘우치고 성공한 정인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70년 대 한국에서 윤희(<청춘의 덫> 여주인공)가 자수성가할 방도는 없다. 그녀는 이수일처럼 일확천금을 상속받을 수 있는 적자도 아니다. 여자는 의연하게 삶을 건사하는 대신 복수를 택한다. 똑같이 사랑으로 권세의 동아줄을 엮고, 천벌이 아닌 사람의 벌을 집행한다. 안타깝게도 시대는 윤희의 징벌을 허락지 않았다. 반인륜적이며 사회 정서를 해한다는 이유로 드라마는 강판되었다. 1995년엔 KBS 주말드라마 <젊은이의 양지>가 방영되었다. 또 다시 남자가 배신하였고, 버려진 여인은 그저 무능하고 가련하였다. 야비한 과거를 꼬리 밟힌 남자는 죄값을 치르고 추락한다. 1999년엔, <청춘의 덫>이 돌아왔다. 못다 한 이야기의 끝에서, 남자는 회개하고 여자는 확고한 신분상승을 이룬다. 둘은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고, 갈등과 미움을 봉합한다.

<장한몽>은 한국 근대 초기 신파극의 원조다. <장한몽> 서사는 면면하게 되풀이되며, 변주되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안정적 이행을 거치지 않은, '압축 근대' 사회의 여전한 반反근대성의 방증이라 볼 수 있을까. 서사의 전승 속에 이뤄졌던 남-녀 역할의 맞바꿈이나, 상이한 결말은 젠더(Gender)와 섹슈얼리티(Sexuality)의 변천을 반영할 게다. 1999년 <청춘의 덫>이 제출한 나름의 진보적인 결론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청춘의 덫>이 <장한몽>의 남녀 체위를 뒤집고 신파극을 복수극으로 이끌었다면, 2000년대 들어선 또 다시 반전이 발생한다. 나는 그 시발점이 2010년의 SBS 드라마 <나쁜 남자>라 말하고 싶다. 뒤이어 2012년 KBS <착한남자>, 2013년의 SBS <야왕>, KBS <상어>가 등장했다. 이 드라마들은 공히 복수극이며, ‘나쁜 남자’(또는 ‘착한남자’)들은 복수를 위한 사다리 삼아 상류층 여성의 아랫도리에 올라탄다. 연인의 배신이냐, 가부장제도에서 버림받은 원한이냐, 동기가 다를 뿐이다. <장한몽> 서사는 또 다른 원형을 받아들여 포섭한다. 배신당한 남자가 신분을 숨긴 채 밑바닥에서 귀환하는 복수극이란 점에선,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닮았다. 남근적 마력으로 여성들을 농락한단 점에선 ‘카사노바’의 자식이다. 특히 <야왕>은 이러한 세 가지 원형에 충실하게 복무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 드라마들의 기제가 대리만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는 점이다.

남성 쾌락의 원천은 페니스(penis)다. 남성들의 관념 속에서 여성의 쾌락은 페니스, 남근에 종속된다. 포르노그라피(pornography)의 정의는 다기하지만,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포르노그라피의 정석이 ‘쾌락에 의한 지배’라고 규정한다. 폭력도 권력도 재력도 아닌, 쾌락. 남근에 의한 지배. 이것이야말로 “지배를 받는 쪽의 자발적인 굴복”을 이끌어내는 궁극의 지배다. 포르노그라피는 근육질 배우들의 '근원적 탁월함'을 전시하며 여성을 정복하는 남성판타지다. 돈도 스펙도 학벌도 없는 남성이 수컷들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모든 사회적 자원의 가치를 단숨에 제압하고 여성을 차지하는 ‘남근’이다.

남성 복수극의 주인공들은 유능하고 매력적이다. 그들은 매혹적인 아우라와 능란한 연애 테크닉을 겸비하고 있다. 부도 지위도 없이 (또는 그에 의지하지 않고) 남근적 힘으로 상류층 여성을 유혹한다. 여기서 남근은 합목적성의 삽과 괭이이거나, 부와 지위를 끌어오는 갈고리다. 남자는 여자의 쾌락 뿐 아니라 인격과 정서, 때론 사회적 자원까지 지배한다. 이런 관점에서, <야왕>과 그 형제들은 유사-포르노그라피이다. (게다가 <야왕>의 주인공 하류의 직업은 호스트, ‘남창’이다.) 포르노그라피 서사는 복수극의 플롯과 만나 카타르시스에 종착한다. <야왕>에선 복수의 대상이 자신을 버린 여성이며, 명확한 응징에 성공한다. 이것이 가부장제도의 균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여성혐오, 그리고 가부장제

가부장제도는 권위에 의해 작동한다. 그 핵심은 혈연단위 집단과 부계 전승의 권력, 재산의 상속이다. 가부장제는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제도이다. 한편 근대적 의미에서 가부장 제도는 결혼 계약의 산물이다. 회의적으로 말하면, ‘내 여자’에 대한 권리 보장일 것이며, 한편으론 자발적 만남과 이별의 가능성을 지닌 결합일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관점 모두를 활용하여 <야왕>을 가늠할 수 있다.

치정 복수극 <야왕>에는 가난한 남자 하류와 더 가난한 여자 주다해가 있다. 여자는 아름답고 총명하지만, 표독한 성정과 위험한 야망을 품고 있다. 남자는 ‘남창’이 되길 불사하며 헌신하지만 여자는 떠나간다. 자신의 꿈을 이뤄줄 다른 남자의 품으로. 하류와 주다해는 각각 전근대와 근대의 시공을 겹쌓아 가부장제를 전유한다. 주다해는 가부장 제도를 위협하되, 해체를 도모하는 인물이 결코 아니다. 더 크고, 더 많은, 더 강한 가부장의 권력을 원하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사랑은 삶을 도모하는 계약이며 거래이다. (물론 계약 자체를 거부할 권력이 그녀에게 없다는 것, 남성의 사회경제적 자원에 의지해야 계층 간 이동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 근본적 문제겠지만) 반면, 하류에게 결혼은 법과 합리가 아닌 인륜이며 천륜이다. 두 사람이 혼인신고 없는 사실혼 관계라는 설정을 보아도 명약하다. 드라마 <야왕>의 결혼은 계약이 아니다. 사랑이며 의리이다.

전근대적 중매결혼은 도덕과 관습이었다. 거래 자유가 낮은 대신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익 분배가 보장되었다. 자본주의 시대의 가부장제는 물질적 토대에 기초한다. 성과 사랑은 자유 시장 경제의 상품이다. 결혼 시장의 성세는 번창하고 있다. 가부장이 제공하는 급부가 클수록 권위는 굳건해지며, 가족의 결속도 단단해진다. 문제는, 사회 구성원의 경제적 여건이 점점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녀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똑같이 척박해지는데, 가족 부양의 고정점은 여전히 남성 가장에게 부착돼 있다. 전근대의 관념과 근대의 개념은 혼종 되어 있고, 결혼의 효과는 비대칭적으로 작동한다. 예컨대 ‘취집’(시집이 취직)은 있어도, 장가가 취직일 순 없다. 가난한 남자, 하류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과 헌신, 가치와 당위이다. <야왕>은 불황의 질곡 속에서, 가부장제도 재생산 대열에서 낙오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토해내고 있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이브 세지윅(Eve Sedgwick)의 ‘호모 소셜’(homo social)이란 개념을 소개한다. 호모 소셜은 성적 주체로 승인받은 남성들 간의 연대이다. 남성의 성적 주체화의 지렛대는 여성의 성적 객체화다. 성적 주체로 승인받기 위한 조건은 ‘자기 여자를 소유하는 것’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를 ‘여성 혐오’라 정의한다. 히코사카 다이는 <남성 신화>에서 전시 집단강간의 목적이 남성 간 연대감 고양이라 주장한다. 남성 집단의 연대는 여성이란 ‘공통의 희생자’에 의지해 성립한다. 그렇다면, 치정 복수극 <야왕> 역시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주다해는 자유롭게 남성을 간택하고 헌신짝 취급하며 성적 주체화를 어지럽히는 ‘마녀’다. 주다해가 거쳐 간 세 (네) 명의 남자가 있다. (주다해가 살해한 양부)-하류-백도훈-석태일. 남자들은 연적과 우정을 느끼거나, 결국엔 주다해에게 등을 돌리고, 범죄의 증거물, 사체로서 돌아오며, 파멸의 포위망을 구축한다. 이것은 모든 남성들이 ‘공통의 희생자’를 처벌하며, 정체성을 승인받는 집단 제의가 아닌가.

한편, 의미심장한 것은 하류의 복수가 개시되는 어떤 임계점이다. 경제적 착취와 외도, 별거, 살인죄의 전가. 주다해의 숱한 패악에도 묵묵히 인내하던 하류는, 그들의 딸 은별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드디어 심판을 집행한다. “주다해, 내가 널 죽일 거야” 극의 정황상, 은별이 숨진 책임을 온전히 주다해에게 물을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가부장제도가 여성에게 마련한 자리, 어떤 상황에서도 방기해선 안 되는 최후의 보루는, 가족성원을 생산하고 양육하는 어머니의 역할, 모성이다. 주다해는 가부장제의 역린을 거슬렀다. 그것이 주대해의 죄목이다. <야왕>은 가족 단위 시청자들이 딛고 있는 근본적인 합의 위에 복수극의 무대를 설치한다. 이것은 상징적 질서를 일탈한 ‘괴물’을 처단하는 전근대적 가부장의 단죄이다.

여성-괴물 주다해 : 남근선망과 이빨달린 질

<야왕>의 주다해는 군중의 공분을 들쑤시는 악녀다. 지금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자. “혹시 드라마 <야왕>을 보셨습니까?” 백이면 백, 이렇게 답할지 모른다. “아, 주다해. 그 나쁜 년?” <야왕>은 굉장히 작위적인 시추에이션으로 주다해를 몰아넣고, 극단적 선택을 강요한다. <야왕>은 이성 파트너를 교체하는 주다해의 배신에 맞추어 ‘리셋’(reset)의 구조로 설계돼 있다. 처음 설정된 원점으로 크게 세 번 회귀하며 서사를 반복한다.

세 번의 리셋을 따라, 서사의 구간은 분절된다. 재미있는 것은 하류의 복수가 주다해를 막다른 구석으로 몰아넣으며 실린더처럼 악행을 추동한다는 점이다. 주다해는 점점 더 악업의 수위를 높여가고, 그에 따라 죄책감도 희미해진다. 다해-양부가 일방적인 피해자 관계였다면, 다해-하류는 애정으로 묶여 있되 반자발적으로 배신하는 관계이다. 다해-백도훈은 입신을 위한 정략과 애련한 고마움이 뒤얽힌 관계이다. 다해-석태일에 이르러선, ‘퍼스트레이디’를 쟁취하기 위한 완벽하게 도구적인 거래관계가 성사된다. 그녀는 기둥서방을 갈아치우며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남자 잡아먹을 년'(man-eater)이다. 총 24회를 틀어, 드라마는 거듭된 회귀를 통해 악행을 재개하고, 그 총합은 무시무시한 수준으로 누적된다. 탐욕을 위해 순정을 배신하는, 허영으로 가득 찬 타락한 존재. 그러므로 “주다해 그 나쁜 년”이란 말을, 이렇게 바꾸어도 별 다른 문제가 없다. “아, 주다해, 그 ‘김치 년’”

전통적인 프로이트 이론에서, 거세하는 자는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거세된 자이다. 논문 <메두사의 머리>에서 프로이트는 말한다. “…메두사의 잘린 머리의 경우에 해석은 쉽게 그 자신을 드러낸다. …이는 거세되었기 때문에 위협하고 쫓아내는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재현이다.” 남성을 향한 여성의 적개심을 야기하는 것은 ‘페니스 선망’이다. 이것은 성별 관계 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바바라 크리드(Barbara Creed)는 <여성괴물>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에 도전하며, ‘거세하는 질’, 바기나 덴타타(Vagina Dentata)를 내세운다. 바바라 크리드에 따르면, 여성이 두려운 이유는 그녀처럼 거세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거세하기 때문이다. 바바라 크리드는 공포 영화가 ‘거세당한 존재로서의 여성’과 ‘거세하는 자로서의 여성’ 모두를 재현하는 경향이 있다 말한다. 전자는 “상징적으로 거세되었기 때문에 사이코 괴물”로 변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정당한 운명을 부당하게 박탈”당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괴물이 된다. 이들은 기어코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대가를 치른다. 후자는 여성 정신병자이거나, 자신을 강간한 자들에게 복수하는 여성이다. 이들은 대부분 처벌받지 않는다.

이런 도식을 따를 때, 주다해는 남근 선망과 바기나 덴타타를 공히 답습하고 있다. 고아원에서 자랐으며 지독한 가난에 시달린 성장배경은, 상징적으로 거세당한 여성 괴물의 관습적인 재현과 닮았다. 주다해의 결핍은 권력을 추구하는 강력한 동인이다. 그녀는 어떤 여성성이라 공인되는 것과 거리가 먼, 남성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자신이 거세되었다는 것을 인정치 않으며, 가부장제의 ‘호명’(Interpellation)을 거부한다. <야왕>에는 통속적인 남근의 기호가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하류가 처음 몸담고 일하는 곳은 커다란 ‘마구간’이다. 주다해는 거기서 양부를 살해하고 암매장한다. 그 기억은 악몽처럼 귀환하고, 그녀는 도망친다. 남근에게 대항하며 그 지배력에서 벗어나려 한다. 백도경은 백학그룹의 장녀이자, 자신의 아들(이지만 동생이라 호적에 등재시킨) 백도훈에게 거의 동물적인 모성을 퍼붓는 인물이다. 그녀는 ‘승마클럽’ 사업에 빠져 있고, 승마를 낙으로 여기며, 자신의 ‘애마’를 신주단지 모시듯 아낀다. 말하자면 남근 숭배. 그녀는 투철한 모성의 담지자, 가부장의 충직한 하인이다. 주다해와 사사건건 대립하며 맞서는 인물이 백도경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한편, 주다해는 바기나 덴타타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거세하는 자로서 여성을 말하는 슬래셔 무비들은 대개 성적으로 학대받은 여성 사이코패스의 복수극을 다룬다. 주다해도 어린 시절 양부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했다. 극 후반으로 갈수록 이해 할 길 없는 정신병리적 악인으로 변해가는 일면 또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자의든 타의든, 그녀가 거듭해서 ‘남근’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는 점을 봐야 한다. 그녀의 마지막 종착지, 석태일은 전통적인 가부장의 언동을 재현하고 있는데, 주다해와 손잡은 후론 비굴한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수중에서 놀아난다. 거세당한 남근. 우리는 주다해가 무너진 가부장제도의 피해자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녀는 고아였다. 그녀의 양부는 올바른 가장의 역할을 저버린 비열한 남근이다. 가부장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주다해의 일그러진 욕망도 없었을 게다. <야왕>은 다른 의미에서 또한 복수극이다. 자신을 버린 가부장을 향한, 거세하는 여성-괴물, 주다해의 복수극이다.

 

 

배신과 욕망의 화신, 그녀‘들’을 쓰러트려라

드라마 <야왕>은 오늘날 가부장제도의 쇠락을 투사한다. <야왕>의 가족들은 모조리, 모성이 정상작동하지 않거나, 편부 가정이다. 여기서 괄호 쳐진 것은 여성, 아내, 모성의 자리다. <야왕>은 주다해를 부정적 여성상의 전형으로 묘사하는 한편, 그 대립항에 이상적 여성상을 붙박아둔다. <야왕>에서 유의미하게 관측되는 편집 기법을 꼽자면, 인물 간 숏의 전환이다. 주다해를 잡은 장면이 끝나면, 대개는 꼭 석수정의 숏이 따라 붙는다. 석수정은 순종적이고 다정하며 시아버지에게 싹싹하고 물욕 및 허영과는 거리가 먼 ‘개념’ 여성이다. 이 숏의 이행은 여성괴물에서 현모양처로의 이행이다. 반면, 백지미는 알콜 중독에, 도박 중독에, 사치와 낭비에, 나이를 먹고도 오빠의 호주머니만 털어먹는 게으르고 나약한 ‘보슬아치’다. 주다해와 암암리에 공모하여 가족을 무너트릴 궁리를 하는 가부장제의 트로이 목마다.

<야왕>의 결말은 여러모로 곱씹어 볼 의미가 있다. 하류의 복수는 드디어 성공한다. 드라마는 주다해를 죽여 버린다. <야왕>은 1회가 23회로 연결되는 플래시백-액자구조를 취한다. 드라마 1회가 시작하며 하류는 주다해와 청와대에서 대면한다. “주다해, 다 내려놓고 네가 있던 원래 자리, 달동네로 돌아가.” 악녀는 돌아가지 않는다.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질주하다 쓰러진 채 불귀의 객이 된다. 드라마는 이 흉흉한 결말을 무마하기 위해 애써 온기어린 후일담을 제시하려 든다. 아빠와 엄마, 은별이. 세 가족이 살던 달동네 집에서, 하류의 환상이 재생된다. 은별이가 엄마를 찾는 순간, 이미 죽어버린 주다해가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연다.

그리도 지키려 했지만 지킬 수 없었던 단란한 가족은 모든 것이 부서진 후에야 허락된다. 다소 어둡게 말하면, 떠나간 계집의 숨통을 끊어서라도 ‘원래 자리’로 끌고 올 만큼 이 원념은 지독하다. 이것은 가부장제의 대안 질서가 부재한 현실을 반영하는 분열적 결말이다. <야왕>은 현실의 도피처로서 이상화된 관념, 해피엔딩을 택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다. 전근대적 향수와 근대적 난관이 실키는 첩경 속에 가부장제는 위기를 맞았다. ‘무능한’ (예비) 가부장은 낙오의 위협에 처해있지만, 비루한 감투를 내려놓을 수도 없다. '남근'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숱한 (상상적인) ‘역차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경제력이, 사실은 남성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여권 신장이 이루어져 남녀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동등하다면, 권위를 이양하고 책임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가부장제의 재편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고용불안의 끝없는 터널 속에 남성은 한 발짝 앞서 갈 뿐이다. 이것은 과도기적 혼란이 아닌, 항구적인 불균형에 가깝다. 남근들은 부양의 고통과 열패감을 짊어진 채, 여성에게 추격당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녀들은 ‘간발’의 특권을 지목하며 헌신을 요구하고 평등을 주장한다. 또는 언제든지 더 큰 남근을 찾아 떠나간다. 나는 점점 시들어 가는데, 내가 고개 숙인 남자란 것은 인정할 수 없다. 이곳에 대안은 도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야왕, 하류의 목적은 재건이 될 수 없다. 심판이며 복수이며 처단이며 원한의 발출이다.

주다해는 근본을 버리고 각이한 계급의 남성을 착취하며 권력의 꼭대기를 향해 등반한다. 갈수록 추악해지는 욕망과 역치를 갱신해가는 악행 속에서, 어느 순간 여성-괴물이 된다. 그리하여 하류의 심판은 권선징악-사필귀정의 윤리적이고 자연적인 정의가 된다. 이 치정 복수극이 결과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신분상승을 향한 여성의 욕망이다. 남성연대의 발흥. 무너져 가는 가부장 질서. 불황과 '역차별'에 치이며 고개 숙인 남근. ‘능력남’에게 기생하는 ‘된장녀’를 향한 원한. SBS 드라마 <야왕>의 최종 시청률 25.8%. 그 한 움큼의 무의식이 귓가에 어른거린다. “주다해는 사람 잡는 마녀야. 마녀는 사냥을 해야 해!”

 

배신과 욕망의 화신, 그녀‘들’을 쓰러트려라. 야왕.

 

필자> 일상과 세상의 경계를 모로 걸으며, 조심스레 두리번대고 글을 쓴다. 사회, 문화, 정치의 단층을 채집하여 살펴본 이면의 수런거림들을 블로그(blog.naver.com/yke0123)에 편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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