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주: “중2병이라는 병이 너의 지역에서 유행한다고 들었다. 이 병은 무엇인가?” 행성 <파흐레느헤이트451>의 외계인들은 물었다. “이 병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병에 휩쓸리는 지구인은 도대체 무슨 존재인가? 자유의지의 주인인가, 신경회로의 노예인가?”

나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들의 신체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지구인의 특징-그들에게는 ‘뇌’ 라는 기관도 이 기관 때문에 벌어지는 ‘자아’라는 특이한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을 이해시키면 지구인을 멸시하는 그들의 태도와 활자박멸에 대한 생각도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나는 이를 고찰한 책을 선택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들이 지구인의 뇌, 지구인의 자아, 그리고 이 책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지만, “중2병”이라는 현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이 책의 존재 자체를 말살하는 ‘망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제 이 보고서는 파흐레느헤이트451 성인이 아니라 내가 사는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이 지구인이 지구인 자신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에이전트 S009

---(이하 보고서)---

범은하활자박멸운동위원회 정기 보고서

작 성 자: 9급 에이전트 S009

문서번호: 20131119SMCHS402-17GNM00002

시행일자: 201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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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의식의 재발견 ~현대 뇌과학과 철학의 대화

저 자: 마르틴 후베르트

출 판 사: 프로네시스

보고내용:

1. 당신들은 ‘중2병(中二病)’에 걸리는 지구인은 ‘비정상’이라며 자유의지가 없는 기계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2병은 병이 아니다. 지구의 일본이라는 나라의 코미디언 이쥬인 히카루(伊集院光)가 라디오 방송에서 “나중에 떠올리면 부끄러워지는, 사춘기 때 나는 특별하다는 생각에 벌이는 행동”을 일종의 열병에 비유해 붙인 농담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농담은 점차 의미가 변질되어 “유아적인 티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붙이는 별칭이 되었다.

본래의 중2병, 혹은 사춘기나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는 이 현상은 지구인이라면 누구에게나 겪는 특정한 뇌의 생리적 성장과정이다. 이 과정 중 자아, 자유의지, 그리고 사회라는 당신들은 이해할 수 없는 지구인 특유의 현상이 일어난다.

2. 당신들에게는 ‘자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는 지구인의 뇌가 가진 세 가지 기능인 육체적 본능, 감정, 합리적 이성이 하나로 통일된 상태로, 언제나 변화하는 기억을 동일한 형태로 안정시키며, 자신을 우주와 분리된 독립된 존재로 느끼게 하는 지구인 특유의 (신체) 자아와 외부세계 사이에 근본적인 유기체적 경계다. 당신들은 이러한 필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 지구인들은 사회를 이루고 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뇌라는 유기적 기계에 조종당하는 노예일 뿐 이라고 비난한다.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 책은 당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지구인의 뇌와 의식을 철학과 뇌과학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뇌가 정신의 전부인가, 감정, 합리성, 감정은 신체에서 나오는가, 무의식은 무엇인가, 꿈, 정체성, 기억, 사회성, 자유의지…….

3. 나는 그 중에서도 당신들이 궁금해 한 “중2병”이라는 현상에 대해서만 보고하고자 한다. 당신들이 가장 궁금해 한 점이기 때문이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실제 이 책에서 “중2병”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독일이라는 다른 문화권에서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2병”의 생리적 근거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키워드는 중앙 전전두피질이다.

지구인의 뇌에는 중앙 전전두피질이라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이 활동하면 지구인의 언어가 가진 특징 중 하나인 1인칭-나와 연관된 것이라는 관점이 발생하며, 인식·경험·기억 등을 자신과 관계된 것이라 판단한다.

책은 말한다.

“이제 막 자신들의 동일성을 발전시켜나가는 열여섯 살의 아이들의 경우, 그들이 지난 마지막 해를 기억했을 때, 중앙 전전두피질의 활동은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실에 대한 지식을 기억했을 때에도 그것이 활동했다. 열여섯 살 먹은 아이들의 경우, 신경과학적으로 볼 때 개인적인 기억과 사실기억은 그리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분명히 이 시기에는 세계에 대한 지식의 습득과 저장은 인간 동일성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인간 의식의 재발견, 187-188p. 밑줄 필자 표기)

4. 지구인은 “중2병”이라 불리는 사춘기에 사회와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자신과 관련된 주관적인 지식이라 판단하고 받아들인다. 당신들이 육체적으로 융합되어 거대한 몸을 이루면서도 개별적인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듯, 지구인도 각각 개인의 육체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중앙 전전두피질의 과정을 통해 사회라는 흐름으로 연결되어있다. 소용돌이가 강물의 흐름 없이 존재할 수 없듯.

지구인은 당신들에게 말한다. 지구인은 육체라는 기계에 지배되는 노예도 아니고, 제멋대로인 자유의지의 폭군도 아니다. 이 책을 통해 당신들이 지구인을 이해하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그러니 제발, 이 책을 ‘망각’시키지 말아달라.

끝.

범은하활자박멸운동위원회 지구지부 서울파출소

손지상

소설가이면서 번역가이다. 미디어스에서는 범은하활자박멸운동위원회에 정기 보고서를 제출하는 '9급 에이전트 S009'를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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