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남자가 주위에서 보이지 않는다면 덜 나쁜 남자를 선택하라는 연애 격언이 있다. 최악의 남자를 택하는 악수 중의 악수를 두기보다는 최악의 남자에서 한두 걸음 벗어난, 덜 나쁜 남자와 연애하는 게 남자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을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또한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속 구세군 선교사 아가씨 사라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당대의 톱클래스 도박꾼 스카이를 도박에서 손 떼게 만드는 것처럼, 덜 나쁜 남자가 여자에 의해 교화될 확률도 높다.

스페인 히혼국제영화제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애니메이션 <사이비>는 위의 연애 격언과 맞아떨어지는 영화다. 이야기를 이끄는 두 주인공 김민철과 최경석은 악당이다. 단지 급이 다를 뿐이다. 최경석은 신실한 교회 장로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실은 경찰에 수배 중인 사기꾼이다. 양의 가면을 쓴 늑대다.

반면 김민철은 바른 소리를 내는 악당이다. 평소 아내와 딸의 등골을 빼먹는 노름꾼에 주정뱅이에 불과하지만 최경석의 실체를 아는 단 한 명의 악당이다. 최경석의 정체를 안 김민철이 바른 소리를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김민철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악당 김민철이 바른 말을 해도 듣지 않는 건 김민철의 평소 행실이 양치기 소년처럼 굳어진 탓이 크다. 확증 편향, 그러니까 지기가 믿고 싶은 것만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외의 다른 건 한 귀로 흘려버리는 심리학적 확증 편향이 마을 사람들에게 자리잡은 건 김민철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 나쁜 인간인 탓이 크다.

악당 김민철이 바른 소리를 내면서부터 관객의 딜레마는 시작된다. 양의 탈을 쓴 사기꾼 최경석을 옹호할 것인가, 아니면 평소 행실이 불량한 김민철의 바른 말에 감정이입해야 하는가 하는 딜레마이다.

앞에서 언급한 덜 나쁜 남자에 손을 들어주고자 한다면 당연히 김민철에게 감정이입해야 하는 게 옳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뼛속까지 악당이 되는 이 남자에게 감정이입하는 것도 쉽지 않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마냥 최경석과 김민철 그 어느 캐릭터에게도 감정이입하지 않고 두 악당의 대립을 초월자적인 시점으로 관찰하는 게 제일 속편한 관람법일 듯하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건 악당 김민철의 바른 소리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의 행보다. 평소 김민철의 행동거지가 반듯하기만 했더라도 최경석의 거짓 가면은 김민철에 의해 벗겨지고 비극은 일찌감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악당의 바른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로 말미암아 비극이 초래된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사이비>는 선한 사람들의 고난을 종지부 찍을 수 있는 시발점은 악당 김민철로부터 기인한다는 역설을 내포한다. 즉 선한 사람들이 악당 김민철로부터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악당이 선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하지만 김민철의 목소리가 바른 목소리로 들리지 못하는 까닭은 김민철의 평소 행동거지 때문이다. 가족을 후려치고 착취하는 갈등 구조의 촉발자이기에 김민철의 바른 목소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한다.

최경석의 거짓이 설파라는 사이비의 아우라가 김민철이 주장하는 진실의 목소리를 압도하기에, 김민철의 행동이 마을 사람들과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무뢰배이기에, 김민철의 목소리는 선지자의 목소리로 승화하지 못하고 소귀의 경 읽기로 추락하고 만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 편향의 비극, 바른 말하는 악당의 목소리가 선지자의 경고로 들리지 못하는 비극을 그린 영화가 <사이비>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