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서 우여곡절을 거쳐 헝거게임의 우승을 거머쥔 캣니스는 고향으로 돌아와 잠시 연인과 재회합니다. 사랑하는 사이로 둔갑하여 공동으로 우승했던 피타와의 관계는 연기일 뿐이라고 그를 안심시키는 캣니스. 이것이 곧 판엠의 대통령에게 들키면서 사면초가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캣니스는 헝거게임의 우승으로 위기를 넘겼다고 안심했으나, 실상은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그를 보면서 판엠의 시민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자 대통령은 캣니스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제 75회 헝거게임은 이전 우승자를 모두 모아서 치르기로 합니다. 이제 캣니스는 피타와 함께 전보다 더 강력한 참가자들을 상대로 또 한번 처절한 생존 게임을 벌여야 할 운명에 놓입니다.

혁명의 싹을 자르려는 헝거게임

잘 아시다시피 전작인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은 개봉 전부터 말이 많았습니다. 누가 봐도 후카사쿠 긴지의 <배틀 로얄>과 동일한 소재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썼던 리뷰에서 말했듯이 두 영화는 청소년을 전장에 몰아넣고 서로 죽이게끔 한다는 것에서 유사성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물론 이 설정은 기성세대가 휘두르고 지배하는 세상에서 처절하게 경쟁해야만 하는 현실의 은유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배틀 로얄>과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사이에는 그 이상으로 극명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도 유념해야 합니다. 전자가 일본의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후자는 인류학적이며 정치적인 주제를 가지고 스펙트럼을 넓혀서 우리의 현실과 고스란히 맞닿아 있습니다.

헝거게임이라는 건 결국 판엠의 독재가 공고히 유지될 수 있도록 개최하는 연례행사이자 공포정치의 극단적인 예일 것입니다. 유래 자체가 과거에 일으킨 실패한 반란에 대한 연좌제적 성격의 처벌이지 않습니까. 그와 동시에 정부가 가진 무시무시한 권력의 과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면 헝거게임이 지속되는 이유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판엠의 시민들은 매년 벌어지는 살상을 지켜보면서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고, 그때마다 정부의 지시와 통제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 속 자신들의 운명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체념했을 것입니다. 판엠이 그토록 오랫동안 헝거게임을 계속해서 실시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부의 의도가 제대로 먹혀 패배의식을 심어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음에 다름 아닙니다.

남궁민수와 캣니스

캣니스는 그런 무소불위의 정부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따라서 시민들에게 혁명의 불꽃으로 자리잡아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70년 이상 이어진 전통과 규칙을 깨고 공동 우승이라는 이례적인 결과를 남겼으니, 판엠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시민들의 눈에는 캣니스가 비로소 일탈의 선두주자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즉 캣니스는 <설국열차>의 남궁민수처럼 패러다임을 깨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인물로 나타났습니다. <설국열차>에서 혁명을 이끈 커티스는 막바지에 다다라 대안 없이 무작정 끓어오르는 반감을 표출하여 이끈 무능한 지도자로 보여졌습니다. 설상가상 이것이 정부에 의해 조장된 혁명이라는 것까지 밝혀지면서 수많은 희생만을 남기고 만 결과로 전락했습니다.

반면 남궁민수는 과감하게 패러다임(기차)를 부수면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제가 <설국열차>를 본 바로는 썩어빠진 현실을 전복시키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커티스처럼 저돌적인 의지와 행동 이전에, 남궁민수처럼 기존의 가치관이 심은 사고에 안주하거나 답습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바로 이 역할을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에서 캣니스가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캣니스는 자신이 이것을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반항에서 시작된 것은 맞지만 혁명을 시도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 사부작 영화가 점점 더 흥미로워지고 있는 지점도 바로 이것인데,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는 그랬던 캣니스가 서서히 전면에 나서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는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

캣니스는 헝거게임에서 피타와 함께 최후의 생존자로 남으면서 각지를 돌며 우승자 행사를 가집니다. 이를테면 판엠의 시민들에게 정부가 어떤 환상을 심고자 마련한 것일 테죠. 특히 캣니스와 피타는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사랑'으로 미화하고 현실을 왜곡하는 데 유용한 선전(Propaganda)도구로 딱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캣니스에게 요구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절대 규칙에 반하는 의지가 아니라 진심으로 피타를 사랑해서 나온 공동 우승이라는 것을 시민들이 믿도록 설득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독재가 지배하고 있는 부당한 현실로부터 시민들의 눈을 돌릴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렸다는 건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현실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종종 음모론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더 많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 어김없이 터지는 연예인의 스캔들이나 범죄,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 로또 당첨자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따위의 개소리나 늘어놓는 것도 그런 예의 하나입니다.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는 전편으로 다진 세계관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습니다. 전편이 혁명의 잉태를 담았다면 이번에는 그것이 자궁에서 차츰차츰 자라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판엠은 뒤늦게라도 혁명의 싹을 잘라버리려고 하지만 그 바람과는 정반대로 혁명 이전의 단계에서 필요조건인 반항심을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에서 바야흐로 캣니스는 혁명을 상징하는 새인 '모킹제이'로 변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 이야기인 <헝거게임: 모킹 제이 1, 2>에서는 캣니스를 중심으로 한 반군이 판엠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을 암시해 호기심을 잔뜩 키웠습니다. 다만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가 그랬던 것처럼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도 서곡에 가까워 다소 지루했습니다. 시간이 부족해 헝거게임의 묘사와 비중이 현저하게 낮은 것도 흠입니다. 결말부에서 밝혀지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아쉬운 부분입니다. 유행을 따르며 책 한 권을 둘로 나눈 모킹제이가 우려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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