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동화, 어른을 위한 그림책을 만날 때면 비판적 태도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아마도 ‘동심’이라 부를 만한 공간이 마음 어딘가에 남아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읽고 나면 엄밀한 개념과 촘촘한 논리로 세상을 분석하는 책보다 훨씬 큰 울림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아마도 ‘반성’이라 부를 만한 공간이 마음 어딘가에 남아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번 주에 마주한 두 권의 그림책이 그렇습니다. 서평보다는 독후감이 어울릴 책이라, 저 역시 두 이야기를 짧게 소개하고 이야기 바깥에서 잠시 생각해볼 시간을 가져봅니다.
'미어캣의 스카프' 이야기
아프리카 사막에서 평화롭게 살던 미어캣 무리. 어느 날, 멀리 여행을 떠났던 미어캣이 목에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돌아왔습니다. 똑똑하고 사냥을 잘하는 미어캣만이 스카프를 두를 수 있다며, 먹이를 많이 가져오는 미어캣에게만 스카프를 주겠다고 합니다. 모든 미어캣이 스카프를 얻기 위해 사냥에 힘을 쏟았고, 이내 모든 미어캣이 빨간 스카프를 목에 두르게 됩니다. 그런데 몇몇 미어캣이 하늘빛 스카프를 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빨간 스카프를 목에 두른 다른 미어캣들은 다시 하늘빛 스카프를 얻기 위해 사냥에 매달렸습니다. 계속 새로운 스카프가 나타나고, 스카프를 얻기 위한 사냥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내 먹이가 줄어들었고,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미어캣들은 정든 땅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남은 미어캣들은 힘겹게 먹이를 찾다가 여기저기 버려진 스카프를 한데 모아 실타래를 감기 시작합니다. 색색별로 감긴 실타래는 장난감이 되기도 하고, 여러 빛깔 스카프가 되기도 합니다. 이제 미어캣들은 서로의 스카프가 아니라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미어캣의 스카프' 이야기 바깥의 이야기
유행, 과도한 소비, 자원 부족의 악순환이라는, ‘미어캣’이 아닌 ‘인간’ 세상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스카프 실을 풀어 실타래를 만드는 모습에서 재활용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꼭 필요한 게 아닌데도 갖춰야만 한다고 이야기되는 사회의 여러 기준은 어떤가요.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삶을 전하는 이야기는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삶의 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미난 건 작가가 본문 앞뒤에 붙인 그림입니다. 여기에 세계지도가 등장하는데, 앞에는 대륙이 하나로 붙어 있는 모양을 색 없이 하얗게 남겨두었고, 뒤에는 지금처럼 흩어진 대륙에 알록달록 색을 입혀두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겠지요. 정보와 통신의 발달로 물리적 거리가 상당 부분 극복된 요즘,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유행으로 각각의 빛깔이 비슷해져 가는 오늘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도 남은 미어캣처럼 다른 삶을 꾸릴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야기 바깥으로 사라진 미어캣처럼 미지의 세계 혹은 세계의 끝을 향해 떠나야만 하는 걸까요.
'갈색 아침' 이야기
어느 날, 정부가 갈색이 아닌 고양이는 모두 없애라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도시에 고양이가 너무 많아져 이런 법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갈색 고양이가 도시에서 살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실험 결과도 함께 발표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고양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을 따릅니다. 한 달이 지나자, 이번에는 갈색이 아닌 개를 모두 없애라는 법이 만들어졌고, 이 법을 비판한 신문은 문을 닫게 됩니다. 이제 신문도 <갈색 신문>만 남았습니다. ‘갈색 개’와 ‘갈색 고양이’라 표현하지 않고 ‘개’와 ‘고양이’라고만 쓴 책은 도서관에서 더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원래 갈색인 커피도 ‘갈색 커피’라 부르기 시작했고, 갈색이 아니면 말할 수도 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갈색 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 갈색 개나 갈색 고양이를 기른다고 해도, 이전에 갈색이 아닌 개나 고양이를 길렀다면 처벌한다는 법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건지 고민하기 시작했지만, 해가 밝기도 전에 이미 세상은 갈색으로 가득 찼습니다.
'갈색 아침' 이야기 바깥의 이야기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지금, 한국의 이야기라 복잡한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이해가 갈 법한 내용입니다. 물론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이 책은 지난 2002년 프랑스 대선에서 화제를 모았는데, 당시 극우파 후보 장 마리 르펜이 결선투표에까지 진출하자, 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가 이 책을 방송에서 읽어줬고, 많은 시민이 이에 반응하며 ‘갈색 아침 현상’이란 사회적 이슈를 만들며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몇 년 전 한국에도 소개되어 화제를 모은 <분노하라>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불과 1년 사이에 짙은 갈색이 한반도를 뒤덮었고, 몇몇 사람이 갈색을 벗겨내고 새로운 색을 칠해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수백, 수천의 갈색 페인트가 하늘에서 쏟아져 말문을 막히게 하지 않았나요. 이러다가는 갈색이 아닌 색을 마음속에 그려봤다는 이유만으로도 <갈색 아침> 이야기처럼 잡혀가는 건 아닐까요. 새로운 도화지를 꺼내야 하는 건 아닌지 갈색으로 덮을 수 없는 물감을 발명해야 하는 건 아닌지, 갈색으로 가득 차 보이지 않는 출구를 억지로라도 찾아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우화, 풍자는 현실을 빗대 웃음과 깨달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현실을 빗댄 게 아니라 현실 자체로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반대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가 우화와 풍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른을 위한 동화,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 애초 어른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건 아니지만, 저는 어쩐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어른이 만들어놓은 세계의 진실이 너무 참혹하고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을까요. 이야기를 전해줄 때까지 무얼 해야만 할까요. 앞서 말한 ‘동심’을 조금 더 오래 간직하길, 이어 말한 ‘반성’은 더욱 깊이 새기길 바라고 다짐해봅니다.
박태근
온라인 책방 알라딘에서 인문, 사회, 역사, 과학 분야를 맡습니다. 편집자란 언제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사람이라 믿으며, 언젠가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을 짓고 책과 출판을 연구하는 꿈을 꾸며 삽니다. 공식 애칭은 서경식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바갈라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