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도 많이 안 했건만 그럼에도 실망이 컸다. 박근혜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야당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박근혜 대통령 특유의 고저장단이 없는 연설은 일견 부드러운 듯 했으나 연설 내용을 살펴보면 야당의 요구에 대한 철저한 무대응 전략이었다.

시정연설 직후엔 민주당 강기정 의원과 청와대 경호실 사이의 몸싸움을 두고 여야가 정면충돌했다.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현존하는 싸움도 수습해 주지 않았고 잘잘못이 어디에 있건 간에 새로운 싸움만 남았다.
새누리당은 시정연설 이후 특위는 수용하고 특검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나왔다. 민주당은 두 제안을 모두 받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맞받아쳤다. 사실 검찰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새누리당이 특검제안을 곧바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그토록 야당을 무시하지 않았다면 민주당의 태도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최소한 같은 내용이라도 시정연설의 초반부에 야당을 달래는 언사를 쓰면서 당부를 하고 그 뒤에 예산안에 대해 설명했다면 민주당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자신을 '진흙탕 정쟁'에 초연한 이로 자리매김하려고 했고 그 행동은 지지층에겐 '멋있는 대통령'으로 어필할 수 있었을지언정 야당에겐 '전면적 항복'을 요구하는 태도를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야당에 그런 행동 앞에서 타협을 논할 수 있었겠는가?
▲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9차 본회의에서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방식이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의회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치의 중심은 국회”라 말했고 “국회 안에서 논의되지 않을 일이 없다”라고 말했으며 “여야가 합의한다면 정부는 이를 국민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이겠다”지만 대통령이 여당을 통제하는 상황 속에선 공허한 얘기다.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다수당임에도 구하고 ‘날치기’와 ‘몸싸움’을 선택하지 못하는 나름의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저렇게 나온다면 민주당 역시 새누리당의 합의 없이는 청와대에 어떠한 요구를 한들 ‘공염불’인 난감한 상황이 된다.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태도를 보였다면 어땠을까. 보수언론이 사설과 기사에서 원색적인 언어로 비난했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여론도 안 좋아지면서 지지율도 내려갔을 테고 그런 환경의 변화 때문만이 아니라 정치적 성향과 스타일 때문이라도 대통령이나 집권여당이 직접 타협의 장에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공영방송은 순치되어 있고, 보수언론은 노골적으로 편향적이며, 소수 진보언론들의 외침엔 반향이 없다. 여론의 변화나 지지율 하락도 더디다. 박근혜 대통령은 제6공화국 헌법의 대통령의 권한을 최대한 활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실험하는 중이다. 급기야 정치권 일각이나 진보언론에서 개헌논의까지 나오게 된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나 이에 대해서도 별다른 반향이 없다.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민주당 역시 난감한 상황이다. 국정원 선거개입 문제나 이에 대한 검찰 수사 과정에서의 정치적 외압 문제는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으로서 민주당이 먼저 타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1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9차 본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하는 동안 전병헌 원내대표, 정성호 원내수석부대표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대통령이 전혀 타협할 의사가 없고 새누리당이 이에 끌려가고 있기에 민주당은 강경책을 취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서 전혀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민주당이 가진 마지막 카드가 예산안 연계 투쟁이겠지만 이조차 녹록하지 않다. 대통령은 시정연설을 통해 간곡하게(?) 부탁했기에 그럼에도 민주당이 강경하게 나간다면 여론이 자신을 편들 거라고 여기는 듯하다.
이러한 대통령의 통치방식은 임기 말에 부메랑을 맞기 쉬운 위험한 것이지만, 당장만 생각한다면 그 판단은 옳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민주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놓인다. 국정원 개혁을 위한 특별검사제를 요구하면서 모인 야권 내부의 생각 역시 단일한 것이 아니다.
가령 무소속 안철수 의원 측의 대응을 보자. 안철수 의원 측은 오늘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에서 매번 박수를 친 새누리당 의원들과 전혀 박수를 치지 않은 민주당 등 다른 야권 의원들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는 북한 문제나 유라시아 철도, 원전비리 등에 대해 대통령이 언급할 때 박수를 쳤으며 대통령이 예산안의 신속한 처리를 당부할 때에도 박수를 쳤다.
앞의 박수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지막 박수는 무소속 안철수 의원 측이 민주당이 예산안 연계 투쟁까지 나아갈 경우 합세하지 않겠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안철수 의원 측은 예산안 연계 투쟁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 왔다.
▲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9차 본회의에서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마친 뒤 퇴장하며 의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기립해 박수친 반면 민주당 의원들은 자리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대통령이 결자해지 하려 들지 않고, 새누리당도 대통령 눈치만 보며 타협안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야권은 단합되어 있지 못하고 국민들의 반응에도 온도차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 데엔 민주당의 무능 탓도 있겠지만, 무슨 일을 하든 ‘50% 국민’에겐 사랑받는 특이한 캐릭터를 대통령으로 맞이한 까닭이 더 크다.
대선 1년여 만에, ‘100% 대한민국’이란 구호는 ‘50% 대한민국’이란 현실로 반토막이 나버렸고, 대통령은 이 사실을 교정할 의사 없이 ‘마이웨이’를 걷는 중이다. 날씨가 추워지는 가운데, 향후 정국도 꽁꽁 얼어붙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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