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주: 내 직업은 책을 읽고 보고서를 써서 보내는 일이다. 이 일을 하게 된 계기는 회사 때려치우고 카페 차리겠다는 선배 때문이다. 인테리어 용품 사러 간다는 선배를 따라 골동품 점에 간 나는 타자기를 하나 사들고 돌아왔고, 시험 삼아 자판을 두들겼다.

그런데 이 타자기를 만든 게 외계인일 줄이야…….
외계인, 정확히 <행성 파흐레느헤이트451> 사람들이 만든 함정이었다. 나는 반강제적으로 그들이 만든 <범은하활자박멸비밀위원회>의 <지구지부 서울파출소> 소속 에이전트가 되고 말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일정한 주기로 특정한 책에 대한 ‘보고서’를 보내는 일이다. 그 책이 위험하다 판단되면 그들은 책의 존재 자체를 말살하는 처치인 ‘망각’을 시행한다. 문제는 내가 책을 좋아하고, 애초에 내 직업은 팔리지 않아도 작가라는 점이다.
나는 내 삶의 질을 위해 저항 활동을 시작했다. 이 글은 우주로 보내는 독서 감상문이자, 책을 지키기 위한 소소한 반항의 기록이다. 어차피 그 놈들은 활자를 싫어해 제대로 듣지도 않을 것이니, 대신 당신이 대신 재미있게 읽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와 함께 활자 존속을 위한 저항활동에 참가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간단히 말해 책, 책, 책을 읽읍시다. 제발.
---(이하 보고서)---
범은하활자박멸운동위원회 정기 보고서
작 성 자: 9급 에이전트 S009
문서번호: 20131110SMCHS402-17GNM00001
시행일자: 201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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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살의의 쐐기
저 자: 에드 맥베인
출 판 사: 피니스 아프리카에
보고내용:
1. 작가는 인물의 성격이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리는 수법을 쓰곤 한다. 나도 이 수법을 빌리려 한다. 당신들 파흐레느헤이트인은 모를 수 도 있지만, 지구인에게 ‘스티븐 킹’은 전설이다. 이 전설이 선배 전설, 에드 멕베인을 소개한다. “끝내주는 작가”였다고.
당신들이 활자를 없애 세상을 지배하려는 것과 달리, 작가들은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그곳에 군림하고 싶어 한다. 에드 맥베인은 자기 고향인 뉴욕을 바탕으로 가상의 도시 ‘아이솔라’를 만들었다. 87분서라는 경찰소와 현실에서는 보기 드문 개성 넘치는 경찰들을 잔뜩 밀어 넣고, 이에 못지않게 독특한 범죄자들과 싸우게 했다. 스티브 카렐라, 마이어 마이어, 코튼 호스, 버트 클링, 아서 브라운, 핼 윌리스, 피터 번스……. 그의 수많은 아들들의 활약이야 말로 미국의 수사물 드라마를 낳은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경찰이 활약하는 추리물은 특이한 것이 아니다. 영국에는 J. J. 마릭(존 크리시의 필명으로 각종 필명으로 600권을 쓴 괴물이다. 어떠냐, 외계인들아! 듣기만 해도 무섭지!?)의 기데온 시리즈도 있었고, 그 외에도 경찰이 탐정이 되어 활약하는 소설도 잔뜩 있다. 프랑스에서는 아예 추리소설을 경찰소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도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에드 맥베인의 힘은 무엇인가?
2. 에드 맥베인을 두고 스티븐 킹은 “장르 소설에 리얼리즘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최초의 작가”라고 말한다. 그는 ‘미국의 현실’을 보여준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실제로 살아있고 만나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이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고 궁금하게 만드는 서스펜스 때문에, 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특히 <살의의 쐐기>에는 시작부터 서스펜스로 가득 차 있다.
검은 옷을 입은 미인, 버지니아 도지는 손에는 폴리스 스페셜 .38 권총과 니트로글리세린 병을 들고 자기 남편의 원수 스티브 카렐라를 내놓으라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을 스티브 형사가 잡아갔고, 결국 감옥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정작 그 순간 스티브 카렐라는 산부인과 의사에게서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임신 소식을 듣게 되고, 자살로 보이는 밀실살인사건을 해결하러 외근을 나간다. 여기까지 진행되는 데 20쪽 밖에 안 걸린다. (햐! 과연 대가로다!)
그 뒤로는 경찰서 내의 경찰들이 버지니아 도슨을 제압하려는 심리전과 스티브 카렐라가 밀실살인을 캐내기 위한 피해자 가족과의 심리전이 내내 이어진다. 팽팽하다 못해 끊어질 것 같은 긴장감과 함께,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인물들 간에. 그렇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말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다. 당신들 <위원회>가 함부로 이 책의 존재를 없앤다면, 이건 살인이다. 살인은 당신들 세상에서도 죄라고 들었다. 에드 맥베인의 아들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아 달라.
4.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조금 볼륨이 작다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에드 멕베인의 87분서 시리즈는 해를 거듭할수록 볼륨이 두툼해져갔다. 다른 작가라면 쓸데없이 분량을 늘렸다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그의 경우는 다르다. 다양한 사건과 풍부한 디테일이 아이솔라를 더더욱 진짜 도시처럼 만들고, 그 속의 사람들을 더더욱 살아있게 만든다. <살의의 쐐기>는 조금 소품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읽기 쉬운 느낌을 준다. 당신들도 읽기 쉬울 것이다.
당신들은 이 소설을 ‘망각’ 시켜서는 안 된다. 제발 없애지 말고,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읽기 싫다면 최소한 잊지 말아줬으면 한다. 그럼 당신들의 생각도 달라질 것이다.
끝.
범은하활자박멸운동위원회 지구지부 서울파출소

손지상

소설가이면서 번역가이다. 미디어스에서는 범은하활자박멸운동위원회에 정기 보고서를 제출하는 '9급 에이전트 S009'를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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