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시야로 함몰된 인간의 행위는 때로 극단적인 참사를 불러온다. 나치 시대에 관한 책 중 마지막으로 펼쳐 본 것은 유대인 학살의 현장을 기록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이진모 역, 책과함께, 2010)이었다. 이 책에는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차출돼 온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학살자로 변모해 갔는지 생생히 기술되어 있다.

101 경찰대대의 구성과 최초의 학살
독일은 2차 대전 후반에 들어서면서 점령지를 담당하기 위해 대규모 경찰병력을 투입, 배치한다. 이 경찰병력은 치안과 군사적 업무를 담당한 준군사적 조직이었다. 최초 이들의 임무는 낙오된 적군을 체포하고, 남겨진 무기를 수거하며, 전선 배후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방 전투지역이 확대되고 정규군 수가 부족해지자, 히틀러에 의해 공표된 유대인 절멸의 ‘최종해결책’은 이들에 의해 시행될 수밖에 없었다. 경찰병력은 새로이 점령된 폴란드로 투입되었으며 유대인 학살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었다. 여기에는 함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101 경찰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101 경찰대대는 대규모의 부대가 아니었으며, 구성원들 역시 잘 훈련된 전투 병력과 거리가 멀었다. 총 11명의 장교와 하사관 32명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을 제외하면 전투경험이 없는 “평범한 함부르크 주민” 450여명으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그들 대다수는 노동자 출신이었으며 “나치의 이념과는 다른 정치적 가치들과 도덕규범을 아는 자들” 이었고, “가장 덜 나치화 된 지역으로 명성 있던 함부르크 출신이었으며 다수는 정치 문화적으로 반(反)나치 정서를 가지고 있던 사회계급 출신”(p84)이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 절멸을 수행할 전문 학살자들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101 경찰대대는 1942년 새 점령지인 폴란드 유제푸프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7월 13일, 유제푸프에 거주하는 1800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학살의 방법은 전형적인 것이었다. 우선 거주지에서 유대인을 끌어내 광장이나 넓은 건물에 집결시킨다. 이 와중에 거동이 불가능한 노약자나 낙오자는 현장에서 사살한다. 집결된 유대인은 약 40명 단위로 학살 장소인 숲으로 이동시킨다. 그곳에서 유대인들이 바닥을 보고 엎드리도록 한다. 그 후 총검을 장착한 소총을 어깨뼈 위쪽의 척추에 겨냥한 뒤 신호에 따라 일제사격을 가한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이 ‘처리’ 될 때까지 이 “시계추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분명히 유제푸프에서의 최초의 학살은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았다. 처음 유대인을 집결시킬 때, 101 경찰대대원들은 거동이 불편한 “갓난아기와 어린아이”에게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고, 그 때문에 광장은 엄마의 손을 잡고 따라온 어린아이들로 시끄러웠다. 지휘 장교가 대원들을 질책했으나 광장에 유입되는 노약자 수는 별로 줄지 않았다. 숲에 투입된 사살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사살임무가 시행되자마자 대원 중 몇몇은 곧바로 “이 임무가 자기에게 ‘역겨우니’ 다른 일을 맡겨 달라고” 장교에게 부탁했으며, 현장에서 무단이탈하여 트럭에서 서성거리는 것은 물론, 아예 엉뚱한 곳에 숨어버린 대원들도 있었다(p102~103). 현장에 남아 방아쇠를 당기던 대원들도 일을 처리하기 힘들었다. 우선 희생자를 정확히 조준하기 어려웠고, 살해 후에도 “총알이 희생자의 두개골에 너무 강력하게 명중한 결과 두개골 전체 또는 적어도 두개관 뒷부분이 부서져 피와 뼛조각, 뇌수가 주변에 뿌려졌고 사살조 대원에게까지 튀”는 상황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대원들은 피와 뇌수와 뼛조각들로 범벅이 되었다”(p105). 이런 현장에서 제정신으로 사살임무를 계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자리를 이탈하기 위한 휴식요청이 빈번해졌고, “중앙광장에 모이는 대원의 수가 계속 늘어났다.” 학살은 아주 느리고 지지부진했으며 장교들은 속도가 느리다고 대원들을 끊임없이 질책했다. 아침에 시작된 학살은 밤늦게야 끝났다.
학살을 마친 대원들을 지배했던 정서는 “수치심과 공포”였다. 막사에 도착한 후 “그들은 침통해 했고, 화가 났고, 괴로워했고, 동요하고 있었다. 그들은 식사를 별로 하지 않았고 술만 많이 마셨다.”(p111) 아무도 오늘 그들이 한 일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답해 줄 사람도 없었으며 모두들 언급을 피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 물고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감돌았지만, 그들은 쇼크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일례로 한 대원은 그날 밤 잠을 자다가 갑자기 천장을 향해 마구 총을 쏘면서 깨어나야 했다.
이들의 가슴에 각인된 것은 저항하지 않는 선량한 유대인, 즉 ‘보통 사람을 대량 살해’했다는 죄책감이었다. 도덕적 감수성이 이들을 자극했으며 수치심과 악몽에 시달렸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들 어떤 구실을 대던 다음 학살명령은 피해야한다고 생각했고, 그렇지 못하다면 미쳐버리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치심과 죄책감에 짓눌려 잠자리에 들었던 101 경찰대대원들은 그 다음날 아침부터 점차 효과적이고 무감각한 학살 집행자로 변해갔다.
워마지 학살과 이어지는 풍경들
101 경찰대대가 두 번째 학살 임무 앞에 서게 된 것은 한 달이 지난 8월 중순경이었다. 그들은 워마지로 이동했으며 그곳에는 약 3000명의 유대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의 학살과정은 전과 동일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사살해야 할 유대인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구덩이를 파고 유대인을 살해한 뒤 그 시체 위에서 다시 사람을 죽이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었다. 구덩이로 유대인들은 끌려왔고 방금 전에 총살당한 유대인 시체 위에 조용히 엎드렸다. 총성이 울려 퍼지고 학살이 기계적으로 반복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사격조와 장교들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며 만취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교들은 유대인들을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고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으며 비틀대며 낄낄거렸다. 그 뒤로 새로운 유대인들이 시체 위에 엎드렸고 사살조는 방아쇠를 당겼다.
“구덩이까지 피로 물든 지하수가 점점 불어나기 시작해 곧 자원 경찰들의 무릎 위까지 차게 되었다. 취기가 더해가면서 사격병들은 하나 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넘어졌다. (...) 한 친위대 장교가 ”너희 개똥같은 경찰 놈들은 총을 안 쏘고 있잖아“라고 부르짖었다. 이에 대해 그나데(101 경찰대대 장교 - 인용자)는 ”좋아 그렇다면 우리 대원들이 쏴야겠군“이라고 응수했다. 이에 드루커와 셰어 소위가 자신의 하사관을 불러 모아 사살조를 편성해 자원 보조 경찰들이 먼저 했던 것처럼 사격을 집행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그러나 (...) 하사관들은 이 방법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이미 구덩이에 지하수가 불어나서 수위가 50센티미터를 넘었기 때문이었다. 그 밖에도 전체 구덩이 지대에서 시체가 널려 - 좀 더 상세히 말하자면 이미 둥둥 떠- 있었다.” (p130)
워마지 학살은 유제푸프 학살과 간단히 동일시되지 않는다. 이 학살에서 사살조의 임무를 수행한 것은 자원 보조 경찰이었으며 101 경찰대대는 사살의 직접적인 현장에는 최대한 적게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현장에서 방아쇠를 한 번 내지 두 번은 당겼으며, 피가 흐르다 못해 구덩이를 채우고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처음과 달리 죄책감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즉 직접적 학살과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첫 번째 학살 이후에 생겨난 무감각함이 자리 잡은 것이다.
워마지 학살을 경험한 후, 101 경찰대대원은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살인마로 변한다. 9월말 그들은 세조코뮬라 지역에서 다시 학살명령을 받는다. 이곳에서는 사살조의 임무를 대신해 줄 자원 보조 경찰대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는 사실에 망설이지 않았다. 101 경찰대대원은 “유대인들을 자갈 채취장 옆의 폐기물 더미들 가운데 한 더미 위로 데려갔다. 거기서 유대인들은 대원에게 등을 돌린 채로 2미터 깊이의 비탈 앞에 나란히 세워졌다. 대원들은 명령에 따라 가까이서 경부사격을 실시했고, 총에 맞아 죽은 그들은 비탈로 굴러 떨어졌다. 얼마 동안 순서에 따라 다음 유대인 그룹이 같은 자리에 세워졌고, 그들은 앞서 사살된 시체 더미를 보며 역시 사살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 차례 사살이 반복된 후에야 비로소 사격병들은 사살 장소를 변경”(p157~158)하는 방식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심지어 그들은 초과로 더 많은 유대인을 사살하기까지 했다. 폴란드 게릴라의 공격에 의해 독일인 병장이 살해당하자 보복조치로 200명을 죽이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이에 101 경찰대대는 78명의 폴란드 인을 죽인 뒤 할달량을 채우기 위해 코츠크 게토로 이동, 180명의 유대인을 벽에 세워놓은 뒤 기관총을 난사하여 사살한다. 이는 할당량의 200명보다 60여명이 초과된 인원이었다. 이런 살해를 벌이면서도 이들은 “어떤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다.”(p161)
101 경찰대대는 지속적으로 학살 임무에 투입된다. 10월과 11월 사이에 실시되었던 최소 6차례 이상의 이송 작전에 합류, 도망치거나 거동이 불편한 유대인을 1000명 이상 살해하였고, 이송 작전 중간 중간에 게토를 소거하며 아사 직전의 유대인 500 여명을 추가로 ‘제거’했다. 101 경찰대대는 끊임없이 하달되는 학살 명령에 복종했으며 살해방법은 효율적으로 변해갔고, 시간은 단축되었다. 결국 이들의 학살 행위는 11월에 시행된 ‘추수감사절 작전’에서 정점을 찍는다.
루블린 지역의 모든 유대인을 소거하는 ‘추수감사절’ 작전은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수행한 최대 규모의 단일 작전”이었으며, “키에프 근처에서 3만 3000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악명 높은 바비야르 집단학살을 훨씬 능가”(p205)하는 수준이었다. 이 작전을 통해 ‘소거’되어야 하는 유대인의 숫자는 무려 4만 5000명이었다.
101 경찰대대는 추수감사절‘ 집단학살의 모든 단계에 참가한다. 예의 악명 높은 구덩이가 파여졌고, 유대인들은 한 곳에 집결되었다. 그들은 남녀로 분리되어 이송되었고, 모든 옷을 벗어야 했다. 유대인들이 구덩이가 파여진 수용소로 들어가는 동안 트럭에 장착된 2개의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모든 소음을 뒤덮을만한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수용소 안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총성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학살이 진행되는 수용소 안에는 익숙한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풍경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새로 도착한 유대인들이 앞서 사살된 희생자들의 시체 위에 엎드리고는 마찬가지로 자동소총의 집중 사격에 의해 사살되는 것을 보았다. 이때 보안대 대원들은 사살된 유대인들의 시체가 층층이 쌓여서 새로 도착한 유대인들이 3미터 높이까지는 그 시체 위에 엎드릴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 그러나 이 작전 전체는 내 평생 보았던 가장 끔찍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집중 사격 후에도 단지 부상을 당했을 뿐인 유대인들이 이른바 확인 사살 없이 사망한 희생자들과 함께 산 채로 묻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상자들이 시체 더미 속에서 친위대 대원들을 저주했던 것을 기억한다.” (p212)
추수감사절 작전을 통해 4만 5000명의 유대인은 ‘실질적으로 제거’되었다. 이 작전을 끝으로 101 경찰대대는 ‘최종해결책’이 부여한 자신의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송, 색출, 소거, 학살의 사이클을 반복하면서 최종해결책을 수행한 101 경찰대대의 총 대원수는 아무리 많게 잡아도 500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유대인 수는 최소 8만 3000명에 달했다.
무엇이 이들을 학살자로 만들었는가
모든 유대인 학살에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101 경찰대대원이 무자비한 학살자로 변해간 것에 대해서는 의도주의적 분석(반유대주의에 침윤된 주체들의 의지적 행위)과 기능주의적 분석(나치 독일의 구조가 주체들의 학살행위를 유발했다)이 적용가능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학살현장에서 대원들 개개인이 느꼈을 동조의 압력과 도덕이 굴절되어 나타나는 모습이다. 즉 학살현장에서 대원들에게 방아쇠를 당기도록 했던 것은 반유대주의나 구조적 압박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행동이 동료에게 어떻게 보일까라는 동조의 문제 그리고 자신이 학살을 거부하게 되면 “궂은 일”을 동료에게 전가하게 된다는 책임의식이었다.
“사실 몇몇 대원이 이탈한다고 해도 대대는 그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살조 참여거부는 부대 전체가 함께 불쾌한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작전에서 자신의 몫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기적인 행위였다.”(p275)
여기에는 이중의 압박이 있었다. 다른 동료들이 시행하는 임무를 자신만 거부하는 행위는 개인의 도덕성에 기반을 둔 죄책감을 유발하는 한편,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것이라는 위협에 시달리게 했다. 점령지의 적대적인 주민들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동료의 호의를 잃는다는 것은 심각한 위험에 자신을 몰아넣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의 시야가 굴절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축소되고 협소해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시야는 ‘동료에 대한 죄책감’과 ‘고립의 위협’으로 축소되었으며,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의식, 그리고 그곳에서 벗어나면 안된다는 도덕적 감각이 자신이 행하는 ‘살인’을 정당화하고 이를 자연스레 행하는 ‘일상’으로 전치시켰다. 그 결과 101 경찰대대원은 “아침을 못 먹은” 일과 “아직까지 한명의 유대인도 죽이지 못”(p194)한 사실을 동급으로 인식하는 무자비한 학살기계로 전락해 갔던 것이다.
101 경찰대대의 학살을 현대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문제와 직접 연결시킬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양한 변수와 배경이 고려되어야 하며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비유적으로 볼 때, 101 경찰대대가 수행했던 학살의 현장은 자꾸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환기시킨다.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조직에 속해 있으며, 이 조직에서 밀려나면 안 된다는 실질적, 심리적 불안감에 시달린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의 책임의식은 조직의 목표로 수렴되며, 우리의 도덕성은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로 한정된다. 우리의 목표는 프로젝트를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달성하는가에 있지,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숙고하는데 있지 않다. 그렇게 대상과 내용이 분리되고 우리의 시야는 조직의 틀과 범위 속에서 협착 된다. 이는 101 경찰대대원들도 똑같이 겪었던 과정이다.
우리는 조직의 목표에 시야가 한정되고, 도덕성을 함께 일하는 사람의 책임의식으로 환원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만약 어떤 계기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을 수 있을까? 내게 주어졌으며 효율적으로 달성되어야 할 지금의 프로젝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할지 숙고할 수 있을까? 과연 현대사회에 사는 우리는 ‘악의 평범성’을 비켜갈 수 있는가? 이런 물음에는 좀 더 다른 책들이 필요하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도 이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유대인 학살의 현장을 생생히 제시하면서 그런 질문들을 근심어린 목소리로 되묻는다.

고덕영

2006년에 결혼했다. 결혼 직후 용돈이 궁한 탓에 한 번 사면 오래 읽을 수 있는 난해하고 어려운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그런 책들을 오독하다 보니 '인문 딜레당트'로 '전락'하여 이런 저런 책을 뒤적뒤적하며 나락에 빠진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의구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로 인문 쪽 책들을 건너다닌다. 한 아이의 아빠이자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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