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프로그램 가운데 드라마가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적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높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대한민국은 드라마공화국이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그리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편성되는 드라마는 각 방송사에서도 광고료 수입의 절대 기준인, 시청률을 담보해주는 효자 프로그램이다. 일일연속극이 각 방송사의 뉴스 시청률을 좌지우지한다는 조사 결과는 이제 진부할 정도이니, 이만 하면 대한민국을 '드라마공화국'이라 불러도 논리적 비약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요즘 볼 만한 드라마가 없다고 한다. KBS1의 <너는 내 운명>, KBS2의 <돌아온 뚝배기>, MBC의 <춘자네 경사났네>, SBS의 <애자 언니 민자>와 같은 일일연속극이나, KBS2의 <엄마가 뿔났다>, MBC의 <천하일색 박정금>, SBS의 <행복합니다>와 같은 주말연속극은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소재로 시청자의 일상과 함께 호흡하면서 고정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재미' 면에서 크게 문제 삼을 것은 없다. '월화', '수목'으로 구분되면서 드라마의 질적 발전과 변화를 주도했다는 일련의 '미니시리즈' 혹은 '특별기획' 드라마가 시청자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 MBC 월화 미니시리즈 <밤이면밤마다>
적게는 16부작에서 많게는 24부작까지 제작·방영되는 미니시리즈 드라마는 1990년대 초반 MBC의 <질투>로 대표되는 트렌디드라마 열풍과 맞물려 기록적인 시청률을 자랑하면서 드라마 시장을 주도했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시청률 면에서 일일연속극과 주말연속극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드라마 시장의 주도권을 상실했다. 게다가 일부 미니시리즈 드라마의 경우, 소위 톱스타급 배우들의 출연료 인상 경쟁과 물가 상승의 여파로 전체 제작비 규모가 커지면서 투자 대비 수익률이 떨어지는 '돈 먹는 하마'로 전락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것일까?

미니시리즈 드라마의 부진은 '자본, 극본, 연출, 연기'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두절미하고 이야기하건데,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부실한 극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극본은 바로 드라마에서 설계도면에 해당한다. 설계도면이 부실한데, 아무리 많은 자본을 들여 성실하게 시공한다 하더라도 훌륭하고 멋있는 건축물이 탄생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부실한 극본에서 좋은 드라마가 나오기는 힘들다. 간혹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쪽 대본' 문제에서 파생되는 제작 현장의 불협화음도 따지고 보면 부실한 극본의 반증일 뿐이다.

작가와 연출자 그리고 배우와 매니저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드라마 제작 현장의 문제를 다루면서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온 에어>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쪽 대본'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쪽 대본' 문제만 해결되면 만사형통할 것이라 믿는 순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그래서 이미 오래 전부터 수없이 지적되었던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것은 극히 일부에 해당하지만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작사들이 극본 집필을 마치 공장에서 공산품을 생산하듯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유행처럼 소재의 새로움만 부각시킨 것으로 전문직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일 뿐이다. 사건은 정해진 공식에 따라 '웃음'이나 '눈물'을 적당히 버무려 짜 맞추기 식으로 전개되고, 그 결과 등장인물의 행동에서는 개연성을 찾아보기 어려워 극적 긴장감을 느끼기 힘든 드라마에 공감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시청자는 많지 않다. 이것은 시청률과 상관없이 최근 방영중인 대부분의 미니시리즈 드라마들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문제이다.

▲ SBS 월화드라마 <식객>
허영만의 만화를 원작으로 비교적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식객>은 만화적 상상력을 드라마의 현실성으로 전이시키기 못함으로써 극적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경우이다. 이성찬은 타고난 요리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형제처럼 자란 오봉주에게 운암정 후계 자리를 양보하고 도망치듯 운암정을 나와 차 장사를 한다. 그러다가 쇠고기 납품권을 따내기 위해 벌이는 경합 과정에서 목격한 운암정의 비인간적인 행동에 분노하여 운암정에 맞서 경합에 나선다. 그 과정은 철저할 정도로 '오봉주'와 '이성찬'이라는 '선악' 구도로 설정된 틀에 맞춰 진행된다.

최고의 '한우, 정형사, 요리사'로 나뉘어 3차에 걸쳐 진행되는 경합 과정에서 오봉주의 운암정과 이성찬의 대림유통이 1차와 2차 경합에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이좋게 한 번씩 턱걸이로 진출하는 과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성의가 없는 구성이다. 운암정의 실수로 최고의 한우가 근 출혈을 일으켜 감점을 당하고 그로 인해 턱걸이로 2차전에 진출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왜 그 책임을 이성찬에게 떠넘겨 비난하는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구성이 오로지 오봉주와 이성찬의 대립 구도를 형성하기 위한 의도인 것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지만, 극적 개연성을 확보하지 않는다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이런 문제 때문에 드라마의 재미가 떨어지는 것이다.

문화재 도굴꾼 아버지를 둔 문화재청 문화재단속반과 문화재 복원 전문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전문직드라마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겠다는 포부를 내세웠던 <밤이면 밤마다>나 대한민국 굴지의 펀드매니저와 톱스타 부부, 그리고 이혼 전문 변호사의 세계를 보여주겠다는 의도로 역시 전문직드라마의 새로운 영역 개척에 나선 <대~한민국 변호사>가 시청자의 외면을 받는 것도 무늬만 새로운 소재에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진부한 공식을 단순하게 적용했기 때문이다.

<밤이면 밤마다>의 '허초희'는 '김범상'과 부딪치면서 끊임없이 "쟤 뭐야?, 왜 저래"라는 물음을 던지는데, 이 같은 물음은 '도굴꾼 아버지가 훔친 문화재로 모두 되돌려 놓으면서 7년 전에 사라진 도굴꾼 아버지를 찾고 싶은 욕망'으로 행동하는 허초희를 바보로 만들어 놓을 뿐이다. 허초희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기 때문에 김범상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이미 정황상 모두 드러나 있는데, 그것을 모른다면 허초희가 세상 물정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라는 반증일 뿐이다. 그 결과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었던 캐릭터가 매력을 잃어버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답답한 캐릭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변호사>의 '한민국'이나 '우이경', '변혁', '이애리'도 그저 상황에 맞춰 행동하는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최고의 자산 전문가가 이혼 후 위자료 청구 소송을 변론한 변호사를 구하지 못해 전 부인의 여고 동창생이자 제대로 사건 수임 한 번 못해본 초짜 변호사에게 소송을 의뢰한다는 것 자체부터 납득하기 어렵다. 이러한 구성은 네 명의 남녀 주인공을 한 자리에 엮기 위한 작위적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극적 개연성을 확보하지 않은 채 진부한 공식만 답습하는 드라마의 도입부는 결코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없다. 아무리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라 하더라도 말이다.

▲ KBS 미니시리즈 <태양의여자>
반면에 출생의 비밀, 두 여자와 두 남자의 이중의 삼각관계, 복수와 애증, 선과 악의 대립 구도 등 어느 것 하나 새로울 것이 없는 두 여자 이야기 <태양의 여자>는 탁월한 심리 묘사로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킨 미니시리즈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매 신도영과 윤사월의 대립과 갈등 구도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설정이다. 특히 고아원에서 입양되어 파양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의 공포에서 비롯한 신도영의 아픔, 입양된 언니에게 버림받아 20년을 고아로 살아야 했던 윤사월의 고통에서 비롯한,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와 피해자로 자리 이동을 하면서 생기는 극적 긴장감은 그렇고 그런 뻔한 이야기 속으로 시청자들을 끌어들인다.

신도영이 성공한 아나운서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살아가면서도 비밀을 숨기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야 하고, 윤사월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언니 때문에 부모와 헤어져 20년의 세월을 고통 속에 살다가 끝까지 외면하는 언니에게 복수를 하는 과정은 신도영과 윤사월 어느 한 쪽의 편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심리적 개연성이 담보된 행동들이다. 그런 만큼 신도영과 윤사월의 대립과 갈등에서 긴장감이 고조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진부하고 상투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청자들이 <태양의 여자>에 빠져들어 재미있게 보는 이유인 것이다. 자고로 드라마는 이런 긴장감을 담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제작자들이 그토록 오매불망하는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참신한 소재라 하더라도 등장인물의 성격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고 정형화된 공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창작을 한다면 시청자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 시청률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의 만족도가 그것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몇 년 동안의 시청률 통계 자료는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일수록 욕하면서 보는 경우가 많았음을 잘 보여준다. 시청률이 높았던 일부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의 만족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던 것이다.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일수록 오히려 욕하면서 보는 경우가 많다는 그동안의 분석도 이를 뒷받침한다.

뼈를 깎는 고통으로 창작에 임하는 작가들에게 욕하면서 본다, 혹은 욕하려고 본다는 평가처럼 치욕적인 경우는 없다. 좀처럼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그래서 마음이 가지 않는 미니시리즈 드라마의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 만큼 시청률 강박증에서 벗어나 '인생의 진정성'이 담보된 드라마를 창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들의 피와 땀이 드라마공화국 대한민국의 열혈 시청자들의 공감 속에 빛을 발하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윤석진 교수는 2000년 여름 한양대에서 <1960년대 멜로드라마 연구-연극·방송극·영화를 중심으로>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004년 가을 <시사저널>에 '캔디렐라 따라 웃고 웃는다'를 발표하면서 드라마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김삼순과 장준혁의 드라마공방전> <한국 멜로드라마의 근대적 상상력> <한국 대중서사, 그 끊임없는 유혹> 등의 저서와 <디지털 시대, 스토리텔러로서의 TV드라마 시론> <극작가 한운사의 방송극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충남대 국문과에서 드라마 관련 전공 과목을 강의하면서 한국 드라마의 영상미학적 특징에 대해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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