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랑할 사람이 없이는 살 수 없다.’

강유정(황정음 분)은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한 구절을 남기고는 조민혁(지성 분)을 떠났다. 강유정은 그런 여자였다. 사랑할 사람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사랑하는 조민혁의 곁을 떠났다. 사랑할 사람이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는 운다. 하염없이 운다. 안도훈(배수빈 분)을 잃어버렸을 때, 산이를 잃어버렸을 때, 아버지를 잃어버렸을 때 눈물을 다 쏟아낸 줄 알았건만,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 물색없이 쏟아낸다.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일은 심장을 도려내듯 아프다. 이번에는 진짜 사랑인 것 같아 아린 가슴이 더하다.

조민혁도 운다. ‘자기 앞의 생’에 적힌 그 한 마디를 읽어 내려가며 그도 운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강유정이 오롯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사실에 눈물이 흐른다. 어떻게 이렇게 바보 같은 여자가 있을 수 있을까? 더더욱 눈물이 쏟아지는 이유는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강유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별은 아팠다. 그 이별로 인한 슬픔은 뜨겁고 시리고 아렸다. 마지막회를 남겨둔 ‘비밀’ 15회의 이야기는 강유정과 조민혁의 이별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최종회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비밀’의 주제야말로 ‘사람은 사랑할 사람이 없이는 살 수 없다’일진대, 설마 강유정과 조민혁이 사랑을 잃어버린 것으로 끝나는 잔인한 결말로 매듭짓기야 하겠는가.

강유정이 조민혁만큼은 쉽사리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복선은, 조민혁과 안도훈이 높은 빌딩 옥상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은근 슬쩍 보였다. 안도훈은 비열했고 치졸했다. 회사 일로 강유정 일로 조민혁을 두 번씩이나 놀라게 했다. 그러나 조민혁은 무너지지 않았다. 조민혁이 안도훈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눈빛은 두려움이 아닌, 동정심이었다.

‘전 어차피 더 잃을 게 없습니다. 유정이가 그러더군요. 가진 게 많은 사람이 더 불안한 법이라구. 조민혁씨 저보다 더 많이 가지지 않았습니까? 뺏고 싶었는데 벅차네요. 그래서 같이 잃으려구요. 65억 내가 횡령한 걸로 하죠. 대신 K그룹과 신화재단 같이 망가집시다. 회장님 구치소 구경 좀 시켜드리고 당신과 세연씨 그리고 신의원님까지 검찰 드나드느라 좀 번거로울 겁니다.’

안도훈은 제안이 아닌 협박으로 조민혁의 목을 조른다. 나 혼자만 잃을 수는 없다, 그럴 거면 크든 작든 모두가 잃어야 한다. 안도훈의 생각은 위험했고, 그 생각은 그를 위태로운 외줄타기에 오르게 했다. 그는 자신의 배신과 욕심, 증오와 패악이 만든 외줄타기에 모두를 끌어들이고 있다. 자폭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며 또한 최고임을 굳게 믿으면서 말이다.

‘서지희씨 사고 당일 유정이가 아니라 제가 운전했습니다. 녹음이라도 하실래요? 아니면 다시 말할까요? 유정이가 아니라 제가 죽였다구요. 유정이가 저 대신 들어가겠다고 하더군요. 말려도 봤죠. 소용없었습니다. 그런 여잡니다. 그까짓 사랑 때문에 지 인생도 포기하는... 파일, 녹취록.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궁금하네요. 내가 지키지 못한 당신의 여자, 그런 걸로 지킬 수 있을지.’

안도훈의 두 번째 폭탄선언은 보다 치명적이었다. 안도훈이 범행사실을 고백할 줄 몰랐다. 아니 그럴 거라는 걸 예상은 했었지만, 그 고백 뒤에 이렇게 위협적인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조민혁은 회사 문제에 대한 협박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쳤다. 꽤나 이상주의자라고 안도훈을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강유정에 대한 문제만큼은 그 어떤 농담도 나오질 않는다. ‘유정이는 건드리지 마!’ 조민혁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의 무의식적인 보호본능이었다.

안도훈은 강유정이 어떤 여자인지를 잘 알고 있다. 자신을 사랑했던 대로라면, 건드리지 않아도 망가지게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안도훈의 눈에 강유정은 모든 것을 잃었고, 모든 것이 무너졌으며,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 여자일 뿐이다. 하지만 정말로 누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그의 앞에 선 조민혁이다.

한 남자가 협박을 하고, 다른 한 남자는 이에 대응한다. 이 둘 사이에는 한 여자가 있다. 한 남자는 그녀를 사랑했었고, 다른 한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보통 이러한 두 남자의 대립은 거친 갈등의 분위기를 빚어낸다. 눈빛이 맹렬해지고 주먹다짐도 하게 되며 험악한 욕들을 토해낸다. 그러나 이들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조민혁과 안도훈, 이들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안도훈의 눈에 비친 눈물은 죄책감이었다. 지옥행 티켓을 따놓은 행각들을 벌이고 있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강유정을 향한 미안함이 있고, 야욕에 대한 허망함이 있으며, 자신의 발등을 찧고 싶은 자괴감이 있다. 배수빈은 그런 안도훈의 심경을 흘러내릴 듯한 눈물로 멋지게 담아냈다. 맹수의 눈에 어린 수치심의 눈물, 묘하게 슬펐고 이상하게 아팠다.

조민혁의 눈도 어느새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처음엔 강유정을 향한 걱정, 염려, 보호본능이었다가, 이내 안도훈을 향한 동정심으로 이어지고 만다. 강유정이 사랑했다는 남자가 이렇게까지 망가져갈 줄이야... 조민혁의 눈물의 반은 강유정을 위해, 나머지 반은 안도훈을 위함이다. 지성의 눈물연기는 섬세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당한 눈물 기운을 세심하게 그려낸 출중함을 보여줬다.

그들의 갈등은 거칠지 않았다. 소리치지도 않았고 격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남자들이 그려낸 그 어떤 갈등보다, 그 어떤 대립보다 묵직하고 깊은 여운을 남겼다. 조민혁과 안도훈, 그들을 연기한 지성과 배수빈의 그렁그렁한 눈물연기 때문이다. 때로는 여자들의 눈물보다 남자들의 눈물이 더 깊게 파고들 때가 있다. 바로 어제 ‘비밀’ 15회에서 지성과 배수빈의 눈물이 그랬다.

대중문화에 대한 통쾌한 쓴소리, 상쾌한 단소리 http://topicasia.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