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능력을 발휘하신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왼쪽), 오른쪽은 범인에 해당하는 김종철 연세대학교 로스쿨 교수.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이 12일 <통합진보당의 운명은?>이란 주제로 방송된 <MBC>의 백분토론에 나와 “유신 독재가 뭐가 잘못됐나”, “아 거기까지로 하고, 공안 정국이 뭐가 잘못됐습니까?”라고 말해서 화제다.

하지만 김진 논설위원의 과거 발언들을 돌아보면 이러한 발언이 그에겐 결코 ‘실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누군지 안다면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은 이 시대를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두 가지 ‘필살기’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필살기는 막걸리다.

“유일한 살인이 75년 인혁당재건위 8명을 사형한 것이다. 당시는 월남 패망 20여 일 전이었다. 정권이 비정상적 심리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어쨌든 이는 정권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이다. 정보부는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하고, 검찰은 협박했으며,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권은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집행만 미루었다면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천상(天上)에서 인혁당 8인에게 사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조국을 얘기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유족을 껴안는 일은 이승의 딸에게 남겨져 있다.“(<중앙일보> 2012년 9월 17일 38면 <박정희 독재 어떻게 볼 것인가>)

▲ 2012년 9월 17일자 중앙일보 38면

즉 이분은 막걸리만 드시면 영혼이 유체이탈하여 천상계로 떠나 죽은 자들이 서로 화해했는지 아닌지를 관람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다. 범인들이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다. 이분의 능력은 이뿐만이 아니다. ‘필살기’가 또 있다.

“신은 인간의 손을 빌려 인간의 악행을 징벌하곤 한다. 가장 가혹한 형벌이 대규모 공습이다. 역사에는 대표적인 불벼락이 두 개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독일 드레스덴이 불에 탔다. 6개월 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들 폭격은 신의 징벌이자 인간의 복수였다. 드레스덴은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의 복수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일본 군국주의에 희생된 아시아인의 복수였다. 특히 731부대 생체실험에 동원된 마루타의 복수였다. 똑같은 복수였지만 결과는 다르다. 독일은 정신을 바꿔 새로운 국가로 태어났다. 하지만 일본은 제대로 변하지 않고 있다.“(<중앙일보> 2013년 5월 20일자 34면 <아베, 마루타의 복수를 잊었나>)

▲ 2013년 5월 20일자 중앙일보 34면

천상계로 가서 귀신들의 동태만 구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의지가 역사에 어떻게 현현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이다. 아직 이분의 종교는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다신교인지 일신교인지는 모른다. 어찌됐건 이쯤 되면 한 시대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큰 무당이 아닌가.

흰소리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이성적인 인간에겐 고역이나 그래도 이런 발언들에서 일관성이라고 볼 만한 걸 찾아보자. 김진과 같은 이들은 역사적 행위나 사건에 대해 어떤 목적을 부여하고 그 목적을 위해선 어떤 수단이든 정당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들을 부여할 권리는 오직 나만 가지고 있고 다른 이들이 뭐라고 반박하든 무시한다. 전형적인 독재자의 사고방식인데, 독재자들은 총 맞아 죽거나 감옥에 다녀오면서도 제 사고방식의 ‘열화복제’를 이렇게나 많이 만들어내니 크나큰 문제다.

김진은 박정희 독재를 옹호하면서 당시의 한국 사회를 ‘욕구를 통제해야 했던 가난한 수험생’에 비유한다. 수험생이 이성교제나, 영화나, 여행이나 잠을 참는 것을(꼭 이것들을 철저하게 다 참아야 하는지도 의문이지만) 자유와 인권을 잠시 유보(?)하는 것, 독재정권을 견디는 것에 비유하였다. ‘사이즈’가 전혀 다른 얘기를 포개 놓았을 뿐더러, 맥락도 정반대다. 누가 박정희더러 자기절제를 잘해서 문제라 했던가? 아니면 누군가 수험생을 방구석에 가두더라도 죄가 아니란 걸까?

인혁당 희생자들에 대해선 ‘신의 징벌’이라 칭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바꾸어 말하면 김진은 인혁당까지는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진처럼 말해도 국내정치 이슈에선 현직 대통령보단 더 진보적이란 게 이 시대의 희극성이다.

하지만 김진은 독일군이나 일본군 만행과 상관없는 시민들의 살생을 ‘신의 징벌’이란 말로 옹호하면서 결정적인 한발을 내딛고야 만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누가 누구를 죽이든 옹호하는 건 식은죽먹기다.

인간의 삶이나 역사 그 자체에 어떤 목적이 깃든 것은 아니다. 다만 특정 시기의 인간이나 사회는 목적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목적이 있더라도 그가 그것에 부합한 수단을 택했는지에 대해선 논의할 수 있고, 한 단체 내에서도 서로의 목적이 다르거나 목적에 부합하는 수단이 무엇일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면 토론을 해봐야 한다.

김진의 방식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저 자신의 취향에 맞는 목적을 목적이라 우기며 그것을 위해선 무엇이든 다 정당화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다만 자기 편의주의의 극치일 뿐이며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공허한 설명이다.

범인들은 현대 사회에 와서 이런 말들을 하면서 남들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게 할 수가 없다. 김진 논설위원이 얼마나 큰 무당인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 분을 어찌 범인들과 함께 사회문제에 대해 토론하라 내보냈단 말인가. <MBC> 방송의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우리들은, 큰 무당께서 본인의 장기인 막걸리와 ‘신의 징벌’을 즐기며 안락하게 노후를 보내도록 배려할 일이다.

<중앙일보> 역시 큰 무당의 영능력을 그만 훔쳐 쓰고 인간사의 일은 인간들끼리 해결하는 삶의 자세를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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