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14일,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2>가 개봉한다.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같은 감독의 작품, <친구>의 속편이다. 언젠가부터 원작 있는 영화와 시리즈물 제작은 할리우드 시스템의 대세였다. 흥행이력이 검증되었거나 흥행가능성이 보장된 기획을 선호하는 것일 텐데, 이 점에선 근래 충무로 역시 다르지 않다. 시장에서 탄력을 얻은 연출 코드를 되풀이하고, 양질의 기존 텍스트 얼개나, 익숙한 이미지를 뜯어온다. (아마 또 다른 후속편은 제작되지 않겠지만) <친구2>는 큰 인기를 모은 전작을 시리즈물로 재편한, 현행 제작 경향 하에 있되, (일련의 조폭 코미디 물을 제외하곤) 아직은 보기 드문 형식을 갖췄다. <친구2>의 흥행성적은, 현재 충무로 흥행 재생산 전략의 내구도와 최소/최대 외연을 가늠할 일말의 잣대로 쓰일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2001년 발표된 <친구>를 되살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거다.

 

<친구>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필름 누아르다. <친구>가 불러 모은 관객은 800만 명이다. 거침없는 욕설과 잔인한 폭력 묘사의 19세 이상 관람가임을 떠올리면, 과연 대단한 흥행이다. 이것은 납득할 만한 일이다. <친구>는 70년대를 시작으로 90년대에 도착한다. 오프닝 내레이션처럼 <친구>는, “내 머릿속을 떠다니는 섬들”을 향해 노를 젓듯 과거와 친구의 그럴싸한 단상을 분절된 에피소드 방식으로 나열한다. 여기엔 유기적으로 짜인 연속된 서사 구조가 없다. 곽경택 감독은 이야기 전개를 위한 예비 작업이나 중언부언 없이 각각 완결되고 서로 매듭이 풀린 토막사연을 지루할 틈 없이 잇대고 붙여놓았다. 그 에피소드들은 시대의 향수와 학창시절의 풍경을 노골적으로 호출한다. 필름 누아르의 정조와 경상도 지역색을 배색하여 진하고 걸쭉한 남성 판타지를 화룡점정처럼 덧칠하였다.

<친구>는 ‘오래두고 가까이 사귄 벗’ 네 친구의 이야기다. 그들은 건달의 아들 준석(유오성)과 준석의 ‘시다바리’ 동수(장동건), 익살스런 분위기 메이커 중오(정운택), 중산층 부모를 둔 모범생 상택(서태화)이다. 한편으론 실제 조직 폭력배 고향친구를 둔 곽경택 감독의 자전적 서사다. (넷 중에 감독을 재현하는 인물은 상택이다.) <친구>는 곽경택 감독의 대표작이며 잠재된 역량을 터트린 상업 성공작이다. 자신의 고향, 부산의 '단면'을 흥미롭게 전시하며 리얼하면서도 미묘하게 가공한 사투리 악센트를 점철한다. “니가 가라 하와이”, “느그 아버지 머하시노?”, “내는 니 시다바리가?”. 귓전을 맴돌고 입가에 착착 달라붙는 찰진 대사는,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어 숨 줄을 얻고 팔다리가 돋은 채 아직까지 회자된다.

비주얼 상으로도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Robert Palmer의 팝송 <Bad Case Of Loving you>를 틀어놓고 갖가지 앵글과 편집기법을 총동원한 달리기 시합 장면, 서른 번이 넘는 칼침을 맞고 비장한 외마디와 함께 스러지는 저 유명한 동수의 최후가 그렇다. “고마해라. 마이 무따이가” 감독의 개인사 한편에 소장하고 있을 법한 극적이고 인상적인 장면을 가려모아 핍진하게 소조하고, 장르와 시대의 살을 붙여 보편성을 불어넣은 것이 그 상업적 매력일 것이다.

그러나 의심스럽다. 이것이 우정에 대한 회고담이라는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아무래도 순진한 일일 것 같다. <친구>는 맥락 따윈 상관없다는 듯 복고의 소품을 추억 팔이 하며 진열한다. 소독차를 따라가는 아이들,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상점 앞 간이 오락기, 롤러스케이트장, 버스 출입문을 여닫는 여성 차장, 고교 학예회의 <연극이 끝난 후>, 낡고 퀴퀴한 추억의 단관 영화관…. 여기엔 막연하게 합의 된 예스러움의 표상이 있을 뿐, 구체적이고 특정한 시대의 기록은 없다. 더불어 역사와 개인, 시대와 우정사이 아무런 상호작용이 없다. <친구>의 플롯은 꼭 70년대, 80년대가 아니라 다른 시대로 ‘ctrl + c,v’해도 얼마든지 성립한다. 과거에 대한 역사적 반추와 조명이 아니라, 과거를 손잡이 삼아 분사하는 실체 없는 보편적 관념, 탈역사적 노스텔지어의 모노톤 파노라마가 번지고 피어오른다.

<친구>는 관절이 빠진 듯 고정점이 애매한 영화다. 제목부터 ‘친구’이고 잊을만하면 뜨거운 제스처로 형제애를 외치지만(“친구야!!”) 우정에 대한 탐구는 없으며 정작 의리와는 별다른 관련이 없는 결론으로 연착해버린다. 네 친구는 어깨동무를 걸고 유년기와 청년기를 숨 가쁘게 가로지른다. 미안하지만 실제로 친한 것이 아니라 그냥 ‘친한 척’을 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들의 우정은 이미 본말이 완성된 채 등장한다. 친분을 맺은 과정과 관계양상의 내밀한 서술이 없다. 이것이 유일하게 작동하는 관계는 동수와 준석이다. 서사의 갈등과 애증을 떠받치는 두 축은 어디까지나 두 명의 건달이다. 배우 이름값을 보아도 <친구>의 주인공은 동수와 준석이다. 상택은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양 위장술을 벌이며 준석의 소울메이트로 간택 받는다.
 

조직폭력단 중간 보스로 성장한 준석은 반대파에 투신한 동수와 세력 싸움을 벌이다, ‘오래두고 가까이 사귄 벗’을 교살한다. 감독은 말꼬리를 흐리듯 준석과 동수의 죽음이 무관 할지 모른다는 애매한 여지를 남긴다. 이 비밀은 <친구2>에서 공개 할 모양이다. 그러나 동수의 죽음 전후로 그것이 준석의 범행임을 암시하는 대사와 공들인 상징적 숏이 잇따른다. 그를 부정하는 단서는 두루뭉술한 한마디에 불과하다. “니, 와 그랬노?” (왜 법정에서 누명을 자인했냐며 안타깝게 묻는 상택의 대사) 준석은 동수에게 최후의 통첩을 전하러 가기 전, 유학을 떠나는 상택에게 편지를 쓰며 배웅 하러 갈 수 없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막상 동수를 만나서는 함께 상택을 배웅 하러 가자고 권한다. 그 내심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동수는 권유를 따라 공항으로 나섰고 대기 중이던 은기 패거리에게 살해당한다. 적어도 <친구2>가 아닌 <친구>에서는 관객이 상택의 말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살아남은 준석이 감옥에서 남기는 마지막 말엔, 요절한 벗에 대한 죄의식이 아닌 고고하고 마초적인 나르시시즘이 묻어있다. “건달(수컷)이 쪽 팔리모 안된다이가”.

노스텔지어를, 과거에 존재했었다고 믿는 대상, 이상화 된 관념을 향한 선망이라고 정의해보라. <친구>는, 더벅머리 남학생들이 한번쯤 품었을 법한, "내 친구가 일진 두목이라면" 판타지를 건드리는 면모가 있다. 압도적인 주먹으로 나를 보호하고, 다른 세계의 일탈로 초대하는 친구는 매력적이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편린을 간직한 공간이 제도 교육 하의 남학교라면, 그 곳을 힘으로 지배하는 우두머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건 흥분 되고 우쭐한 일이다. 정말이지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을 것이다. 두 명의 시민과 두 명의 조폭이 한 패의 불알친구를 이루고, '건달의 핏줄'이자 학교의 ‘통’ 준석과 심장을 나눈 인물이 순진한 모범생 상택이란 설정은, 사실 자연스럽다. ‘오래두고 가까이 사귄 벗’ 친구는, 법과 질서를 일탈한 힘의 쾌락과 거칠고 위험한 건달의 ‘가오’를, 소시민 남성들이 내밀하게 동경하고 안전하게 소비 하도록 씌워놓은 위장포인 셈이다. 70년대를 경유하여 우정을 말하는 복고드라마 <친구>에는, 그러므로, 과거도 친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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