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진편(先進篇) 16장(章), 안연편(顔淵篇) 9장(章), 안연편(顔淵篇) 17장(章), 안연편(顔淵篇) 18장(章), 계씨편(季氏篇) 1장(章)을 소재로 여덟 번째 이야기를 풀었습니다.
공자는 왜 평등을 외쳤던가?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평등’ 가치를 공자도 외쳤다고 하면 아무라도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계씨편(季氏篇) 1장(章)을 보면 공자에게도, 그리고 공자의 시대에도 비록 봉건체제와 신분질서의 한계 안에서이기는 하지만, ‘평등’은 정치의 주요한 과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이 무너지면 나라가 허약해지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나머지 다수 백성들이 소수의 노예가 되면, 다수가 나라를 지키는 데 관심이 없게 되거나 오히려 나라가 뒤집히기를 바라게 되고 따라서 나라가 허약해진다.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을 물리친 아테네의 힘은 바로 평등에서 나왔다.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의 힘도 자영농민이자 군인이기도 한 시민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전성기의 아테네와 로마는 요즘 말로 하면 중산층이 두터운 나라였다. 그리고 다수 시민이 자신의 재산을 가진 독립 가장(家長)이었고, 그래서 또한 스스로 나라의 주인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처자식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말년의 공자가 내전(內戰)을 일으키려는 제자들과 치열한 논쟁을 하는 가운데 이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 논쟁(論爭)은 논어에서 보기 드물게 길게 이어지는 계씨편(季氏篇) 1장(章)에서 전개된다.
계씨편(季氏篇) 1장(章)
季氏將伐顓臾러니 冉有季路 見(현)於孔子曰 季氏將有事於顓臾리이다
孔子曰 求아 無乃爾是過與아 夫顓臾는 昔者에 先王이 以爲東蒙主하시고 且在邦域之中矣라 是社稷之臣也니 何以伐爲리오
冉有曰 夫子欲之언정 吾二臣者는 皆不欲也로소이다
孔子曰 求아 周任이 有言曰 陳力就列하여 不能者止라하니 危而不持하며 顚而不扶면 則將焉用彼相矣리오 且爾言이 過矣로다 虎兕出於柙(합)하며 龜玉이 毁於櫝中이 是誰之過與오
冉有曰 今夫顓臾固而近於費하니 今不取면 後世에 必爲子孫憂하리이다
孔子曰 求아 君子는 疾夫舍曰欲之오 而必爲之辭니라
爾 : 너 이, 兕 : 외뿔소 시, 柙 : 짐승우리 합, 櫝 : 궤(匱) 독, 疾 : 미워할 질
* 顓臾(전유)는 나라 이름이니 노나라에 속한 나라(附庸國)다. 東蒙(동몽)은 산 이름이다. 선왕이 전유를 이 산 아래에 봉하여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니, 노나라 땅 칠백 리 안에 있었다. 夫子(부자)는 계손(季孫)을 가리킨다. 周任(주임)은 옛날의 어진 사관(史官)이다. 相(상)은 소경(瞽者)의 길을 안내해주는 사람이다. 비(費)는 계손(季孫)이 소유하고 있는 성읍의 이름이다.
계씨(季氏)가 장차 전유(顓臾)를 치려하니, 염유(冉有)와 계로(季路 = 子路)가 공자를 뵙고 말하였다. “계씨(季氏)가 장차 전유(顓臾)에서 일을 벌이려 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求)야, 이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냐? 저 전유(顓臾)는 옛날에 선왕께서 동몽산의 제주로 삼으셨고, 또 우리나라 안에 있으니, 이는 사직(社稷)의 신하이다. 어찌 정벌할 필요가 있겠는가?”
염유(冉有)가 말하였다. “부자(夫子, 즉 季孫)께서 하시려 했을지언정 저희 두 신하는 모두 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求)야, 주임(周任)이 말하기를 ‘능력을 펴서 지위에 나아가 제대로 할 수 없다면 그만두라’고 하였으니, 위태로운데도 붙잡아 주지 못하며 넘어지는데도 부축해주지 못한다면 장차 저 상(相, 도와주는 신하)을 어디에다 쓰겠느냐? 또 네 말이 잘못되었다. 호랑이와 들소가 우리를 뛰쳐나오며, 거북 등껍질과 옥(玉)이 궤 속에서 훼손됨이 누구의 잘못이겠느냐?”
염유(冉有)가 말하였다. “지금 저 전유(顓臾)가 <성곽이> 견고하며 비읍에 가까우니, 지금 취하지 않으면 후세(後世)에 반드시 자손의 우환(憂患)이 될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求)야, 군자는 그것을 갖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굳이 변명하는 것을 미워한다.”
바로 이어서 공자는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丘也聞하니 有國有家者는 不患寡而患不均하며 不患貧而患不安이라하니 蓋均이면 無貧이요 和면 無寡요 安이면 無傾이니라
患 : 근심 환, 寡 : 적을 과, 蓋 : 덮을 개(여기서는 대개, 대체로), 傾 : 기울 경
나(丘)는 들으니, 나라를 소유한 자는 백성이 적음을 근심하지 않고 고르지 못함을 근심하며, 가난함을 근심하지 않고 편안하지 못함을 근심한다고 한다. 고르면 가난함이 없고, 화(和)하면 적음이 없고, 편안하면 기울어짐이 없다.
바로 이 대목이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백성의 불균(不均)과 불안(不安)을 걱정하라!” 균(均)하고 화(和)하고 안(安)하면 나라가 안정될 것이며, 외적(外敵)이 침략하더라도 모든 백성이 자신의 처자식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울 것이며 단결하여 막아낼 것이다.
이어지는 공자의 말씀은 제자들을 준열하게 꾸짖는다.
夫如是故로 遠人이 不服하면 則修文德以來之하고 旣來之면 則安之니라 今由與求也는 相夫子하되 遠人이 不服而不能來也하며 邦分崩離析而不能守也하고 而謀動干戈於邦內하니 吾恐季孫之憂 不在顓臾而在蕭墻之內也하노라
崩 : 무너질 붕, 析 : 쪼갤 석, 干 : 방패 간, 戈 : 창 과, 蕭 : 쑥 소, 墻 : 담 장
* 蕭墻(소장)은 병풍이다
이와 같으므로 먼 지방 사람들이 복종해오지 않으면 문덕(文德)을 닦아서 그들을 오게 하고, 이미 왔으면 편안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유(由)와 구(求)는 부자(夫子, 즉 季孫)를 돕되 먼 지방 사람들이 복종해 오지 않는데도 오게 하지 못하며, 나라가 분열되고 무너지는데도 지키지 못하고, 그런데도 창과 방패를 나라 안에서 움직일 것을 꾀하니, 나는 계손(季孫)의 근심이 전유(顓臾)에 있지 않고 병풍 안(집안)에 있을까 두렵노라.”
점차 불균(不均)하고 불화(不和)하고 불안(不安)한 나라가 되어 가는 우리나라를 걱정하는 말씀 같고, 그런데도 외부에 대한 공격성으로 내부 문제에 눈감는 사람들을 꾸짖는 말씀 같다.
주(周)나라의 토지제도(井田法)와 세금제도(徹法)를 지켜라!
선진편(先進篇) 16장(章)
季氏富於周公이거늘 而求也 爲之聚斂而附益之한대 子曰 非吾徒也로다 小子아 鳴鼓而攻之 可也니라
聚 : 모을 취, 斂 : 거둘 렴, 附 : 붙을 부, 益 : 더할 익
“계씨가 주공보다 더 부유했는데도 구(求 = 冉有)가 세금을 많이 걷어서 재산을 더 늘려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求)는> 우리 무리가 아니다. 아이들아, 북을 울려 그의 죄를 성토함이 옳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참으로 반가웠다. 왜냐하면 논어에서 극히 드물게 보는 경제 문제, 인민의 생활과 직결된 세금 문제와 관련된 논쟁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무척 궁금했다. 그 시대는 과연 우리가 아는 대로 정치가 경제를 압도한 시대였던가? 개인에게 법률적인 소유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고, 권력은 쉽게 개인의 재산을 강탈했던가? 무엇보다 실제로 토지가 국가의 소유로 되어 있었던가? 그렇다면 경작권을 가진 농민들 사이에 발생하는 빈부의 격차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공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주장을 펼쳤는가?
구(求)라면 선진편(先進篇) 2장(章)에서 공자가 자로(子路)와 함께 정사(政事)에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한 염유(冉有)가 아닌가? 그리고 계강자(季康子)가 공자 대신에 등용한 사람이고, 또 그가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후에 계강자에게 간청하여 공자를 노나라로 다시 모셔 오도록 한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그런 고마운 제자 염유를 이렇게까지 비난하다니, 공자께서 화가 나기는 많이 난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막말이 나온 데에는 나름대로 배경이 있을 것이다. 아마 공자는 염유를 진작에 꾸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염유는 자신이 노나라의 실권자 계씨에게 충성을 해서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말년의 공자가 국가 원로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으니, 이 또한 모두 선생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원래 현실정치란 게 그런 것인데 선생님은 이상적인 말씀만 하고 있다고, 속으로 오히려 불평하면서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이런 말씀을 하시니, 이와 비슷한 갈등이 제자들과 공자 사이에 없었을 리 없다. 평생 보디가드로 따라다닌 고마운 동생 같은 제자 자로도 여러 차례 심하게 꾸짖었다. 사실 자로는 공자의 '정치적 경호실장'이기도 하였다. 자로는 중요한 정치적 판단을 내려야 할 때 오히려 공자보다 냉정한 현실적 판단을 하기도 한 사람이다. 어쩌면 제자들과의 갈등이나 논쟁이 실제로는 논어에 드러나 있는 것보다 더 격렬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공자는 고법(古法)을 무시하고 세금을 가혹하게 걷은 제자를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이로부터 우리는 상상을 해본다. 어쩌면 공자가 복원하자고 주장한 주(周)나라의 예(禮)의 바탕에는 바로 정전법(井田法)을 비롯한 토지제도와 세금제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 사정은 율법을 지키라는 선지자(先知者)들과 예수의 외침에 빈부격차를 막는 유대 특유의 오랜 제도로서 희년(禧年)의 율법을 지키라는 핵심이 있었던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공자의 사상과 주장은 세금을 더 걷어서 최대한의 군대를 길러야 했던 당대의 군주들에게는 절박한 현실을 모르는 한가한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춘추 말기 전쟁의 시대, 모든 나라들이 요즘 북한 사람들의 말로는 선군정치(先軍政治)를 하던 그 현실 속에서 공자는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 보였고, 그가 만난 어떤 군주도 그를 등용하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논어를 읽다보면 우리의 상상을 뒷받침해줄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인정(仁政)은 경계를 바로잡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안연편(顔淵篇) 9장(章)
哀公이 問於有若曰 年饑用不足하니 如之何오 有若이 對曰 盍徹乎시니잇고 曰 二도 吾猶不足 이어니 如之何其徹也리오 對曰 百姓이 足이면 君孰與不足이며 百姓이 不足이면 君孰與足하시리오
盍: 어찌아니 합, 徹: 통할 철, 여기서는 1할의 세금제도
* 유약(有若)은 곧 유자(有子)이지만 임금(哀公)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라 이름으로 표기한 듯하다.
애공(哀公)이 유약(有若)에게 물었다. “흉년이 들어 재용(財用)이 부족하니 어찌해야 하는가?” 유약이 대답하였다. “어찌하여 철법(徹法)을 쓰지 않습니까?” 애공이 말하였다. “2할도 오히려 부족한데 어떻게 철법을 쓰겠는가?” 유약이 대답하였다.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부족하시며, 백성이 풍족하지 못하면 임금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풍족하시겠습니까?”
주(周)나라의 토지-세금 제도는 사방 1리(里)의 농지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100무(畝)씩 9등분한 다음 그 중앙의 한 구역을 공전(公田)이라 하고, 둘레의 여덟 구역을 사전(私田)이라 하여 여덟 농가에게 맡기고 여덟 집에서 공동으로 공전을 부쳐 그 수확을 나라에 바치게 하였다.
그래서 대체로 백성들은 10분의 9를 얻고, 국가(公)는 1할을 취하였다. 이를 철법(徹法)이라 하였다. 원래 徹(철)이란 글자에는 두루 통하고 균등하다, 공평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노(魯)나라는 선공(宣公) 때부터 공전(公田)을 농사지어 나라에 바치는 세금에 더하여 추가로 사전(私田)에도 1할의 세금을 매기니 세금은 모두 2할이 되었다. 철법은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흉년이 들어서 세금을 올릴 생각을 하는 애공에게 유약은 오히려 세금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노나라의 임금 애공이 공자의 제자 유약에게 물었으니, 이런 중대한 문제에 대한 유약의 답변은 개인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아마 공자당(孔子黨)의 공통된 입장이자 정견(政見)이었을 것이다.
송나라 학자 양시(楊時)는 “인정(仁政)은 경계를 바로잡음으로부터 시작되고 경계가 바루어진 뒤에는 정지(井地)가 균등해지고 곡록(穀祿)이 공평해진다”고 하였고, 또 “10분의 1은 천하의 중정(中正: 균형 잡히고 올바른)한 법이니, 이보다 많으면 걸(桀 = 폭군 걸왕)이요 이보다 적으면 (불모지가 많은) 북쪽 오랑캐의 법이니 고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仁政 必自經界始 經界正而後 井地均 穀祿平... 什一 天下之中正 多則桀 寡則貉 不可改也, 經 : 바로잡을 경, 貉 : 오랑캐 맥)
논어집주(論語集註)에 인용된 양시(楊時)의 이 말이야말로, 당대의 군주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후대의 유학자들이 간과했지만, 사실은 공자의 가르침과 주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지적한 건 아닐까?
그러니까 공자가 되살리려고 한 예(禮)의 밑바탕에는 주나라의 토지제도와 세금제도가 있었던 것이며,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외칠 때 공자는 바로 군주들과 귀족들의 탐욕을 꾸짖고, “주(周)나라의 토지제도(井田法)와 세금제도(徹法)를 되살리라”고 외친 게 아니냐는 이야기다.
안연편(顔淵篇) 18장(章)
季康子患盜하여 問於孔子한대 孔子對曰 苟子之不欲이면 雖賞之라도 不竊하리라
盜 : 훔칠 도, 苟 : 구차할 구, 雖 : 비록 수, 竊 : 훔칠 절
계강자가 도둑을 걱정하여 공자에게 대책을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만일 그대가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비록 상을 주더라도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다.”
계강자가 오래된 토지-세금제도를 무시하고 탐욕을 부려 가혹한 세금을 걷으니,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도둑으로 변하였다. 공자께서 그 점을 무뚝뚝하게, 또 분명하게 지적하신 것이다.
안연편(顔淵篇) 17장(章)
季康子問政於孔子한대 孔子對曰 政者는 正也니 子帥(솔)以正이면 孰敢不正이리오帥 : 거느릴 솔, 孰 : 누구 숙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치의 요체(要諦)는 바로잡음에 있으니, 그대가 바름으로 솔선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게 하지 않겠는가?”
유명한 ‘政者正也’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정치는 곧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바로잡는 것이 제사의 절차나 제례 음악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데 그치겠는가? 반드시 백성들의 생활과 직결된 토지제도와 세금제도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조치들이 포함되지 않을 수 없다. 아니라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아마 틀림없이 안연편(顔淵篇)의 17장과 18장은 같은 시기에 같은 뜻으로 하신 말씀이며, 계강자의 탐욕과 그로 인해 정전법(井田法)과 철법(徹法)이 무너짐을 비판하는 말씀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