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 버킹엄궁 들어서자 비 그치고 햇빛 쨍쨍”

이미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대통령의 패션,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을 뽐내며 20분 간 진행한 연설, ‘창조경제’와 ‘문화 행보’를 선보인다는 소식까지 ‘대통령 순방 보도’에 나올 만한 것은 다 나온 상태였다. 하지만 “잔뜩 찌푸린 하늘 뒤에 숨었던 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고, “박 대통령을 태운 왕실마차가 버킹엄궁에 들어설 때는 햇빛이 쨍쨍 비췄다”는 <이데일리> 기사는 결정적이다.

해외 순방 기간 중 ‘대통령 띄우기’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모습이 아니다. 대통령이 타국 정상과 만나는 사건은 뉴스 가치가 높고, 해외 방문의 목적과 성과에 대한 정리와 평가는 당연히 언론이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언론이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보도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피상적이었다. 패션, 외국어 실력과 창조경제와 문화외교 같은 ‘화려한 수식어’를 빼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상황이 이런데도 언론은 오히려 더 ‘튀는’ 보도를 하기 위해 애쓰는 모양새다.

그동안 자주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대통령과 날씨를 연결 짓는 보도도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월 1일 <파이낸셜뉴스>는 취재수첩 꺼내며 코너에서 ‘朴대통령과 날씨’라는 글을 선보인 바 있다. 정인홍 정치경제부 차장은 박 대통령이 가는 곳마다 현지에서 보기 힘든 날씨였던 것을 들어, 박 대통령의 ‘상서로움’을 이야기해 ‘창조적인’ 대통령 띄우기 보도를 선보였다.

<이데일리>도 이 흐름에 가세해 5일 밤 ‘朴대통령, 버킹엄궁 들어서자 비 그치고 햇빛 쨍쨍’이라는 기사를 올렸다. 기자의 주관적 시각이 들어간 취재수첩도 아니고 일반 스트레이트 기사다. 기사 말미에는 박 대통령과 엘리자베스 여왕의 옷차림 묘사를 포함시켜 패션까지 훑었다.

[런던=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박근혜 대통령의 영국 국빈방문 공식환영식이 열린 5일(현지시간). 아침부터 비를 퍼붓던 런던의 하늘은 환영식이 시작될 즈음부터 개기 시작했다.

마침내 오후 12시10분 행사가 시작되자 잔뜩 찌푸린 하늘 뒤에 숨었던 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박 대통령을 태운 왕실마차가 버킹엄궁에 들어설 때는 햇빛이 쨍쨍 비췄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모처럼의 공식환영식이 비 때문에 망쳐질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으나, 좋은 날씨 속에서 행사가 치러지자 크게 안도했다.

앞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이날 오전 기자들이 ‘우천시 행사 계획 변경 여부’를 묻자 “예상컨대 대통령께서 (버킹엄궁에) 가시면 비가 그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고 농담한 바 있다. 이러한 예상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셈이다.

SNS 상에서도 해당 기사가 수차례 언급되고 리트윗됐다. 트위터 이용자들은 “신문이야, 에세이야”, “기삿거리가 그렇게 없냐”, “국정홍보처 같은 기사가 많아지고 있다”며 조롱하고 있다. “북한 <로동신문>이 울고 갈 기사”, “김일성 우상화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등 도를 넘은 찬양 보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패션·외국어 연설…이번엔 '미담' 추가

<이데일리>의 한 수에 대통령의 외국어 실력과 패션을 호들갑스럽게 다뤘던 기존 보도들이 평범해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언론들은 기존 해외 순방 때 쏟아냈던 기사들을 재생산했다. 언론이 보도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은 가히 완벽해 보인다. 현지인들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가기 위해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뽐내며 긴 연설을 하고, 한국의 미를 알리기 위해 한복을 입으며, 창조경제와 문화외교를 부르짖는 대통령. 이 같은 공식은 되풀이되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지난 방중 때보다는 패션 보도의 열기가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방중 때 대통령이 입었던 옷 색을 분석해 ‘빛깔의 정치’라는 리포트를 내놨던 MBC <뉴스데스크>도 수위를 낮췄다. 지난달 29일 열린 방송문화진흥회 국감에서 김문환 방문진 이사장이 ‘패션 보도가 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 바 있어, <뉴스데스크>가 ‘동물의 왕국’에 이어 ‘패션 프로그램’으로의 변화를 꾀하지는 않을까 우려했지만 다행히 이번엔 힘을 좀 뺐다.

▲ TV조선 '주말뉴스 토일' 2일자 방송

여전히 대통령의 옷차림을 과잉 해석하는 언론도 있었다. TV조선 <주말뉴스 토일>은 2일 ‘박 대통령, 유럽 정상 만나 한복 외교 펼친다’ 리포트를 통해 “박 대통령이 이번 유럽 순방에서 아름다운 한복으로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릴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주말뉴스 토일>은 미국, 중국, 러시아 방문 때 박 대통령이 입었던 패션을 두루 소개했고, “박 대통령이 어떤 한복을 입을까가 벌써부터 관심사”라며 “박 대통령의 한복 외교가 대한민국의 존재감을 확실히 알릴 것으로 기대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프랑스어 연설도 인기 소재였다. SBS <8뉴스>는 4일 톱 보도가 대통령의 순방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 프랑스어로 20분 연설…기립박수 받아’ 리포트는 2번째 꼭지로 보도됐다. 같은 날 KBS <뉴스9>는 11번째 리포트로 이 소식을 다뤘다. MBC <뉴스데스크>는 5번째 리포트로 프랑스어 연설을 언급했지만 올랑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초점을 맞췄다. TV조선 <뉴스쇼 판>은 “프랑스에 간 박근혜 대통령이 가는 곳마다 불어 실력을 마음껏 뽐내고 있는데, 박 대통령은 도대체 몇 개 국어를 하는 건지”라고 치켜세웠다.

해외 순방 때마다 계속되는 패션, 외국어 보도로 비판과 지적이 제기되자 언론은 ‘미담’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 MBC '뉴스데스크' 5일자 보도

MBC <뉴스데스크>는 5일 박 대통령이 프랑스 유학시절 인연을 맺은 도지사 부인 보드빌 씨와의 만남을 전하며 “39년을 뛰어넘는 감격의 재회 순간”, “40년 가까운 세월, 따뜻한 배려와 감사 그리고 우정을 일깨워준 만남”이라고 묘사했다. 육영수 여사 피습으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박 대통령이 보드빌 씨에게 보낸 엽서를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었다는 훈훈한 이야기는 덤이다.

이밖에도 ‘최고 대우’, ‘예우’ 등을 강조한 보도가 쏟아졌다. 특히 해외 정상을 한 해에 1~2명 초대한다는 영국의 이야기를 전하며 박 대통령을 특별히 ‘귀빈 대접’했다는 이야기가 반복됐다. <연합뉴스>와 채널A <종합뉴스>는 ‘지상 최고 의전’이라는 표현을 앞다퉈 사용하기도 했다. 조중동의 6일자 1면은 엘리자베스 여왕과 박 대통령이 마차를 타고 가는 사진으로 채워졌다.

▲ 6일자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1면

KBS <뉴스9>는 5일 버킹엄궁의 환영행사에 나가 있는 현장 기자를 연결하는 적극성을 보였고, 전날인 4일에는 ‘이 시각 현장’ 코너에서 한불 정상이 회담을 마치고 식사하고 있는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의 모습을 담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유난히 해외 방문이 잦은 편이다. 5월 미국 방문을 시작으로 지난 2일부터는 6박 8일 간의 서유럽 순방에 나섰다. 청와대에 따르면 프랑스, 영국, 벨기에, EU본부를 거치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글로벌 이슈 논의를 주도하는 EU 주요국들과의 글로벌 파트너십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언론은 해외 순방의 목적과 의미, 예상되는 성과는 무엇인지, 왜 박 대통령은 중요 현안을 외면하고 순방길에 나서는지, 한 해에 왜 이렇게 많은 방문 일정을 잡았는지 등을 분석하지 않는다. 그저 청와대가 준비한 ‘정돈된 설명’을 받고, 대통령 순방에서 연출되는 ‘화려한 볼거리’를 집중 보도한다. 과한 ‘대통령 띄우기’ 기사로 노이즈 마케팅을 벌이는 언론도 속속 등장한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이데일리>의 날씨 기사를 보고 “이러다가 축지법 기사도 나오겠네”라는 평을 남겼다. 내년 해외 순방길에는 정말 그런 보도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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