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행님, 진짜 까리뽕삼하다." "짐승 같은 쓰레기성 나왔으면은 야, 우린 뼈도 못 추렸어야." 전작만한 후속작이 없다는 속설을 웃어넘기며 응답하라 1994가 흥행 가도를 달리는 것은, 무엇보다 현재 가장 뜨거운 반응을 이끌고 있는 쓰레기 신드롬 덕분일 것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노랫말 속이든 차고 넘치는 사랑 이야기 가운데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유일무이한 비기는, 바로 관객을 얼마만큼 사랑에 빠뜨릴 수 있는가이다. 멜로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의 역할이 시청자의 이상향이라면 남주인공의 역할은 관객의 이상형이 된다. 즉 응답하라 1994 그리고 쓰레기 열풍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방증이나 다름없다.

의외인 것은 이만큼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낸 쓰레기(정우 분)이지만 지난 회차 속 그의 족적을 돌이켜보면 생각보다 그리 분량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동갑내기인 하숙생 멤버들과 달리 사회인의 반열에 들어선 쓰레기는 여러모로 포지션이 다를 수밖에 없기에. 극을 이끌어가는 메인에피소드에서조차 그는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항상 에피소드의 중심 같았던 착각은, 짧은 분량으로도 큰 임펙트를 이끌어내는 배우 정우의 힘일지도.

그런 의미에서 처음으로 쓰레기를 에피소드의 중심으로 내건 5회차는 여러모로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몇 번이나 빙그레의 구전으로만 떠돌던 하숙집 밖 쓰레기의 실물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까. 어림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나정이의 집을 벗어난 쓰레기의 모습은 온갖 판타지의 집결체와도 같았다. 교내의 축구시합에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의대 4강 진출을 이끈 것은, 홀로 두 골을 넣으며 그라운드를 누빈 쓰레기의 힘이 컸다고 하니까. 해태는 그런 쓰레기 성님을 '등장하는 순간 뼈도 못 추릴 짐승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으며 그 삐딱하던 삼천포 도련님마저 "쓰레기 형님, 진짜 까리뽕삼하다"며 탄성을 내질렀다.

기껏 어리광까지 부렸건만, 찾아오지 않는 쓰레기 오빠의 빈자리를 탄식하며 오징어를 씹던 나정이의 귀는 그가 주체가 된 수다에 솔깃해진다. 그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동경에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하며 올라가는 입꼬리. 시청자의 입꼬리 또한 같은 방향을 그렸음은 애써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집에서는 기껏 상한 우유를 마시고도 아무렇지 않은, 세수를 하고 발매트로 얼굴을 닦는 모습조차 당연한 쓰레기 오빠야가 바깥에서는 최고치의 평가를 찍는 멜로드라마의 남주인공인 것이다.

"근데 그 선배님은 안 보이네." "작년에 혼자 두 골 넣은 선배님 있다아이가." 그리고 타인의 대사 속에서도 쏟아지는, 남자아이들에게 두려움이요 또는 선망의 대상인 쓰레기의 실체. 그를 사랑하는 나정이의 심장이 뿌듯함으로 최고점을 찍을 때 터지는 비지엠과 함께 빙그레에게 헤드락을 걸고 까리하게 걸어오시는 그분. "작년에도 와갖고 다 뒤집어불더만 올해도 느지막이 등장해분다야."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야말로 순정만화의 집결체랄까.

순정만화 판타지의 정점을 찍은 첫 번째는, 그야말로 감성 스틸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귀신같은 음악 타이밍과 시선이다. 나정이는 타인의 평가 속에서 발현되는 쓰레기의 이미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경험하고 있었다. 남자아이들에겐 두려움이자 선망의 대상, 그리고 학교의 퀸들조차 소녀팬으로 만들어버리는 위력적인 존재감. 그런 그를 나정이의 시선으로 쫓는 쓰레기의 등장은 시청자의 가슴마저 고조시키는 힘이 있었다. 이 대단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자긍심 섞인 두근거림.

교내의 모든 시선이 쓰레기를 향할 때 그라운드를 달리며 누군가를 찾던 그의 얼굴이 다름 아닌 나를 발견해서 미소로 바뀌는 순간, 배경으로 흐르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너에게가 2013년 판 성시경의 너에게로 오버랩된다. (리메이크의 퀄리티가 아쉬웠지만) 나는 음악감독의 이 감성적인 센스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시청자는 지금 2013년의 공간에 있지만 1994년의 배경과 고스란히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태지보이스의 너에게와 성시경의 너에게가 결합하는 순간, 1994년의 감정이 2013년도로 전이되는 판타지를 느낀다는 것.

판타지 실현의 첫 번째 공로가 제작진의 힘이라면 그것을 사그라지지 않는 현실감으로 완성하는 것이 배우 정우의 연기력이다. 학창시절, 그라운드를 달리는 첫사랑을 단 한 컷의 그림도 놓치지 않고 쫓아다니던 그 시선을 그대로 재연한 카메라 워크가 서운하지 않게 첫사랑하고 싶은 선배의 이미지를 그대로 재림시켰다.

게임에 들어가기 전, 벗은 옷을 맡겨줄 대상을 찾아 주목된 시선을 뚫고 들어와 웃어버리곤 심드렁하게 벗은 옷을 던지고 제 팔의 시계를 풀어 채워주는. 결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제스추어와 표정들. 상황 자체는 분명 판타진데 그의 연기는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제작진이 어떤 과한 씬을 쏟아내도 배우 자신의 강약조절로 캐릭터의 중용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제작진이 제공한 판타지에 정우는 밀착된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집에선 엽기적이지만 바깥에선 천재의대생이라는 캐릭터는 분명 대본이 만들어낸 프로필이다. 하지만, 친근하지만 어쩐지 위압적이며 누구와도 친해 보이지만 막상 벽을 두고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의 공기는 지문이나 대사로 만들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새내기들 사이의 유치한 장난이 어울리는 쓰레기지만 한편 그들이 범접할 수 없는 홀로 어른의 아우라를 느낄 때마다 이 배우의 캐스팅은 정말 1994의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누군가에겐 몇 년 전, 혹은 몇십 년 전의 판타지. 운동장을 누비는 첫사랑을 쫓아가던 소녀의 시선. 그 공간을 2013년의 지금으로 옮겨놓은 환상적인 음악 타이밍. 그리고 판타지를 현실로 다가서게 한 정우의 리얼한 연기력까지. "내 나이 스물, 나는 지금 첫사랑을 한다." 이미 해봤건 처음이건 간에, 우리는 지금 첫사랑에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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